하나님 앞에서

 

 

[잠언 251-7]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 개혁가였던 칼빈(Calvin)의 일생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가운데 하나가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코람 데오란 라틴어로 ‘Coram’ 즉 ‘앞에’라는 뜻과 ‘Deo’ 즉 ‘하나님’을 뜻하는 두 단어가 합해져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잘 보이고 '세상 앞에서(coram mundo)' 명예롭고 잘 살기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구하며(롬 12;2)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 중세 시대에 종교 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의 방식을 요약했던 말입니다. 아울러 이 말은 동시대 개신교를 탄생시킨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이 내세웠던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라는 다섯 가지 슬로건의 기초가 되었습니다(인터넷).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코람 데오 신앙생활'은 '하나님 주의'-하나님의 관점에서 늘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동일한 믿음을 지켜나가는 삶일 것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5장 5절과 6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왕 앞에서”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교훈의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생각해 볼 때 왕 중의 왕이신“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받은 교훈을 적용하여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오늘 본문 2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과 왕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절을 보십시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무슨 뜻입니까? 먼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라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은 모든 사람의 지식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계시되 우리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지식(시 92:5; 전 3:11)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헤아릴 수 없으신 하나님(욥 5:9; 시 145:3)은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counsel)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기에 일을 숨기신다는 말입니다(MacArthur). 예를 들어 욥기 5장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모든 고난을 겪게 허락하셨는지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나요? 과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새찬송가 620장 2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주님의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

 

여러분,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헤아릴 수)가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명철이 한이 없으신(사 40:28)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시145: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숨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들을 자신에게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화입니다(잠 25:2). 그러나 왕은 어떻습니까?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2절 하반절에서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왕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세움을 받은 왕으로서 한 나라(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를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자 살펴야(찾아보아야)하기(search) 때문입니다(MacArthur). 그 한 예로 다윗 왕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들 수가 있습니다. 역대상 22장 12절을 보면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왜 아버지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길 기도했습니까? 그 이유는 솔로몬이 자기를 이어 왕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잘 다스리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이 된 후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대하 1:7)고 말씀하셨을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wisdom and knowledge)을 주시길 구했습니다(10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11절)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사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11절). 결국 솔로몬이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셔서(왕상 3:10)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12절). 그리고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창기 두 여자의 재판을 잘 심리하여 판결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 왕의 속에 있어 바로 판결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했습니다(28절). 이렇게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 재판하고 잘 다스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입니다(잠 25:2). 이렇게 일을 살피는 왕의 마음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3절을 보면 마치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치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왕에게 알려(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숨기시듯이 왕도 그의 사람들에게 어떤 지식은 헤아릴 수 없도록(unsearchable) 숨긴다는 말입니다(Walvoord).

 

그러면 이러한 왕 앞에서 무엇을 하라고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까? 한 2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두 교훈을 겸손히 받아 우리가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4-5절을 보십시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여러분, 은에서 찌꺼기를 어떻게 제하는 줄 대충 아시죠? 은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여 불순물인 찌꺼기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물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은을 얻으려면 여러 번 높은 열로 제련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대장장이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높은 열과 싸우고 수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원하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인터넷). 잠언 17장 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마치 대장장이가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여러 번 높은 열로 은을 제련하듯이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자 “고난의 풀무 불”(사 48:10)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더러운 것들이 불순물처럼 들어 있을 때에 우리들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제하고 이에 대하여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연단의 불인 시련과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인터넷).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 욥기에 나오는 욥입니다.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려고 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25장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무슨 뜻입니까?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고자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결국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시키셔서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5절 상반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이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고 명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바로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5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왕의 신하들 중 악한 자들이 득실거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위가 견고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한국 사극 드라마를 보다보면 힘이 없고 연약해 보이는 왕 밑에 신하들이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즉, 그 중에는 충성된 신하들도 있지만 악한 신하들이 있어서 간교하게 행하여 권력을 최대한 키워서 왕까지 컨트롤 하여 왕으로 하여금 나라를 바로 치리하지 못하게 제지하는 면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자는 간신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구분했다고 합니다(인터넷): “마음을 반대로 먹고 있는 음험한 자, 말에 사기성이 농후한데 달변인 자, 행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고집만 센 자, 뜻은 어리석으면서 지식만 많은 자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며 해택만 누리는 자.” 만일 이러한 여러 유형의 간신들이 득실거린다면 그 왕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늙고 교활한 간신배들에게 권력을 농락당하여 결국 부정부패가 성행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5장 5절에서 솔로몬은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16장 12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바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합니다(8:13).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이 악을 행하는 것도 경계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신하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신하들을 제거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신하들 중에 간사한 악인들을 제하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만일 그 간신들을 제하여 버리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해가 된다는 것은 그 나라에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왕은 단호하게 간신들을 척결합니다. 그리하므로 그는 자신의 왕위(보좌)를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견고히) 서있게 합니다(16:12). 그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히 서있게 하고자 충성된 신하들을 자기 옆에 둡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충고를 잘 받습니다. 잠언 16장 13절을 보십시오: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여기서 “정직하게 말하는 자”나 “의로운 입술”은 충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충신은 왕에게 정직하게 말한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왕은 이러한 충신들을 자기 옆에 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고를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충신들의 입술은 “의로운 입술”이요 그들의 입술에서는 정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13절).

 

저는 이 교훈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악을 제거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해야 할 악 중에 하나는 바로 우상입니다. 마치 사무엘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긴 것처럼(삼상 7:4) 우리도 재물이던 무엇이던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해야 할 악은 바로 “굳은 마음”(heart of stone)입니다. 성경 에스겔 36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새 영을 우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되 우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참고: 겔 11:19).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36:34). 우리의 강퍅한 마음, 단단한 마음을 방망이와 같은 말씀으로 부서트려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노력이 쉽지는 않습니다. 마치 저희 집 잔디에 물을 주고 잘라 주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것처럼 마음을 기경하기 위해서는 말씀과의 씨름에 애써야 합니다. 애쓰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32:37).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죄를 부끄러워해야 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야 하며 황무한 땅과 같은 마음을 부지런히 기경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불의”(all our sins)를 제거해야 합니다(호14:2).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함이 없으십니다(대하 19:7).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딤후 2:19).

 

마지막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6절을 보십시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여러분, 혹시 여러분 앞에서 잘난 체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만일 있으셨다면, 그 상대방에 여러분 앞에서 잘난 체를 할 때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느 인터넷 글을 보니까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난 척 심한 사람 옆에 있으면 참 피곤합니다. 끝도 없이 자화자찬을 듣노라면 피로가 몰려오고, 때로는 울컥 울컥 짜증도 납니다. ‘제발 그만해. 너 혼자 잘난 너만의 섬으로 돌아가 버리라’고 하고픈 마음이 목구멍 위로 스물스물 올라옵니다”(인터넷). 왜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는 것일까요? 그 심리는 겉보기에는 잘난 척을 하니까 자신감이 많아 보이는데, 어쩌면 실제로는 누구보다 겁이 많고 자신감도 없고 또한 자격지심이 커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자꾸만 타인의 입을 통해서 확인을 받고 또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잘난 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터넷). 그리고 우리가 잘난 체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눌려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면 왜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높은 체 하는 것일까요? 성경 잠언 12장 9절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비천이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종을 거느린 자는 잘난 체하면서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보다 낫다”]. 여기서 ‘비천이 여김을 받을지라도’란 말씀은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겸허한 위치에 두며 결코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는 생활 자세를 가리킵니다(삼상18:23, Delitzsch). 이러한 비천이 여김을 받는 자가 종을 부린다는 말은 자신을 섬기는 종을 부릴만한 지위와 여력을 가졌다는 말입니다(Delitzsch). 이러한 자가 스스로 높은 체 하지만 음식이 핍절한 자, 곧 절대적 빈곤해 처한 자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높은체하고”는 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자를 말합니다(Fleisher). 이 말씀을 보면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높은 체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남들 앞에서 내세우고 싶은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가진 것도 없이 절대적으로 빈곤해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소유한 것처럼 내세우고 싶어 하는 것이 좀 웃기지 않습니까? 내용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 보이기에는 뭔가가 많이 있는 것처럼 너무나 지나치게 겉모양을 꾸미는 것은 비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게 덕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 잠언 30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만일 미련하게도 잘난 체하였거나 악한 일을 계획했다면 네 손으로 입을 막아라”]. 성경은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자는 미련하다 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미련합니까? 시편 14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자가 미련한 이유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시편 10장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결국,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자는 미련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6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제가 한국에서 사역을 배울 때에 경험한 두 가지 일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담임 목사님과 부목사님들과 함께 교회 성도님 부부의 집에 심방을 좇아갔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담임 목사님이 소파에 앉으시니까 그 옆으로 수석 부목사님, 그리고 순서대로 앉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그 때 저는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정문에서 교역자들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담임 목사님이 자기 바로 옆에 서 있는 교육 전도사님에게 저 쪽으로 가라는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아마 사진을 찍을 때도 서열(?)로 찍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6절에서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여러분, 좀 상상이 되십니까? 스스로 높은 체(잘난 체)하면서 높은 정치인들이 앉는 자리에 우리도 끼어 앉아 있다가 그 정치인들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이 자리는 당신이 앉을 자리가 아니오, 저리로 내려가서 앉으시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우리가 그 정치인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므로 밑에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 정치인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리로 올라와 앉으세요’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비슷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14장 8-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복음성가 중 “주님 앞에 섭니다”란 찬양이 있어 그 가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 앞에 섭니다 거룩하신 나의 주 주를 경배합니다. 주 앞에 무릎 꿇고 그 얼굴 구할 때 내 앞에 오신 주님 나를 만지시네. 주 앞에 무릎 꿇고 그 자비 구할 때 내 앞에 오신 주님 날 새롭게 하네. 변함없는 주의 사랑 나의 모든 아픔 눈물 씻으시네. 주의 손 날 붙드시니 이제 내가 일어나 주를 경배합니다”(인터넷).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완전히 제거해 주시사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입게 하시어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천국 보좌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찬양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린 구원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 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