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잠언 24장 27-34절]
여러분, 이 세상은 보고 배울 것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냥 무심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한번쯤은 다시 보고 관찰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면 배울 점이 충분히 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 한 예로, 바로 개미입니다. 요즘 저는 개미하고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개미들이 저희 집 여기저기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 개미들을 잡아 죽일 뿐만 아니라 어디서 개미들이 들어왔는지를 발견하여 그 틈이나 구멍들을 막느라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개미”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6장 6-11절에 나오는 개미에 대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때 우리는 개미보다 못한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지혜를 게으른 자는 얻어야 합니까? 바로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여 일하는 것을 게으른 자는 배워야 합니다(7절). 또한 그는 개미에게로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8절).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합니다(10절). 그 결과 게으른 자에게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 가난이 온다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개미를 보면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보고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32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보고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우리가 보고 훈계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보고 훈계를 받아야 하는 것은 미리 준비할 것은 먼저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27절을 보십시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여러분, 보통 집을 짓는다고 하면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경제적 준비일 것입니다. 만일 집을 짓겠다고 결정을 했으면 집 지을 때 들어가는 재정 예산을 잘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준비해야 할 것은 집 지을 땅을 구입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을 위한 최적의 지역을 선택해서 매입비를 명확히 하고 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축가와 부지를 체크하고 법규와 규모를 확인한 후에 부지를 구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집을 짓기 위해선 신중하게 건축가를 선택하여 집 설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시공, 즉 공사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인터넷). 비슷한 말씀이 성경 누가복음 14장 28-30절에도 나와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려 할 때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할만한 돈을 가졌는지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기초공사만 하고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이 시작만 해 놓고 끝내지 못했군’하고 비웃을 것이다.” 맞는 말씀 아닙니까? 망대를 세우려고 할 때 먼저 그 망대를 완성할 만 한 돈을 가졌는지 비용을 계산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경제적 준비가 돼 있지 않는 상황에서 시공(공사)을 시작하면 망대를 짓다가 돈을 모자라서 기초만 쌓고 완성을 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완공을 하지 모하고 기초공사만 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실제로 저는 몇 년 전에 원로 목사님이 계시는 중국 시안에 처음 갔었을 때 비행장에서 원로 목사님이 계시는 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좀 놀랐고 동시에 의아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택시 타고 가면서 보고 또 본 것은 여기 저기 건물들을 짓고 있는데 그 주위에 빌딩 꼭대기 위로 서 있는 크레인들을 여기저기서 보았습니다. 그저 그런 모습을 한두 개 보았으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미완공된 대형 빌딩들을 많이 본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크게 한 2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부동산 시장의 경기변동에 의한 원인이고 또 다른 원인은 정부 정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체적 원인을 보면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는데 그 첫째가 바로 “후속자금의 조달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라고 합니다. 즉, 개발회사의 출자계획에 차질이 생겼거나 은행의 지원이 중단된 경우라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4장 27절에서 잠언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집을 세우기 위해선 먼저 준비할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잠언 기자는 가정을 이루려면 먼저 경제적 준비가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여러분, 결혼할 남녀가 결혼 준비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하면서 경제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그 커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식을 제대로 올리겠습니까? 아마 결혼식을 올려도 그 부부는 경제적인 문제로 계속해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취업포털 커리어(www.career.co.kr)에 기혼 직장인 278명을 대상으로 부부 싸움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부부 싸움을 하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가 25.5%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합니다(인터넷). 또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2005년 해 상담소를 방문한 이혼상담자 3천 537명 가운데 별거중인 1천 304명(여성 1천102명, 남성 202명)의 현황을 분석한 결과 경제적 갈등이나 생활 무능력, 빚 등 경제문제(33%)가 별거 사유 1위였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오늘 잠언 24장 27절의 말씀대로 가정을 이루어 잘 세우기 위해서 경제적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우리는 던져보아야 합니다. 저는 그 대답을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6장 7-8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여러분,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이를 아시죠? 그 유명한 이야기를 보면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개미들을 조롱합니다: “어이, 개미들, 여름에 겨울 준비를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추운 겨울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매일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며 살다가 겨울에 되서는 먹을 음식이 없어 밥을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이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개미처럼 되어야지 베짱이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개미처럼 근면성실하게 살아야 하지 베짱이처럼 게으르게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이 이솝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저 개미처럼 근면성실해야 한다는 교훈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잠언 6장 8절에서 성경은 개미보다 못한 사람에게 개미에게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 30장 25절에서도 성경은 개미를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 즉 자기들의 음식을 여름에 미리 준비하는 개미들이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개미들은 “여름”에 겨울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여름이 추수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에 개미들은 겨울철 먹을 것을 모아 들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미들은 추수 때에 자기들이 겨울철에 먹을 음식들을 미리 준비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개미처럼 추수할 시기에 미래(장래)를 위하여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 특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4장 4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우리 모두가 준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눅 12:47). 그러면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14:27). 그러면 주님을 따르는 자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박윤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에서 망대를 건축하는 자의 비용 예산(28절)과 전쟁하려는 임금의 군사력 강화의 준비(31-32절)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들로서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는 준비를 하는 가운데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우리 모두와 회계하실 텐데 그 때 잘 준비하여 주님께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마25:21).
둘째로, 우리가 보고 훈계를 받아야 하는 것은 거짓 증거로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28-29절을 보십시오: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우리의 본능은 상대방이 나에게 뺨을 한 대 때리면 나도 그 상대방의 뺨을 한 대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대방을 한 때 때리면서 우리의 본능대로 상대방에 갚아준 것을 이렇게 합리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 21:23-25). 우리가 상대방에 나에게 행한 것처럼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을 합리화 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합리화 시키면서까지 우리가 우리의 본능대로 상대방이 나에게 뺨을 한 대 때렸으면 나도 그 상대방에게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우리는 본능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능대로 행하려고 했던 사람이 구약 성경 사무엘상 25장에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나발이란 사람에게 자기기 친히 복수하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리하려고 했던 이유는 다윗이 나발을 매우 선대하였지만(15절) 나발은 다윗을 선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모역하였기 때문입니다(14절). 다윗의 소년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 나발의 목자들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을 헤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발의 양들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7절). 즉, 나발의 목자들이 나발의 양을 지키는 동안에 다윗의 소년들이 그들과 함께 있어 밤낮 그들에게 담이 되었으므로(16절) 그들이 다치거니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15절). 그런데 다윗이 자기 소년 10명을 나발에게 보내서(5절) 그들로 하여금 나발에게 은혜를 얻게 하려고 했는데(나발의 손에 있는 대로 다윗과 다윗의 소년들에게 주기를 원했는데)(8절)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10절)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다윗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고 오히려 그들 모역하였습니다(14절).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사람들에게 각기 칼을 차라고 명한 후 한 400명을 데리고(13절) 나발의 집으로 가서 자기가 친히 복수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는 일을 막았습니다(26, 31, 33절). 그녀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31절상). 무슨 말입니까? 만일 다윗이 나발에게 친히 보복을 하였다면 나중에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나발에게 복수한 일로 인하여 그의 양심에 걸리는 것이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바가일을 통하여 막으셨기에 그럴 염려는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 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33절). 결국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통하여 다윗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는 일을 막으셨던 것입니다(26절).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로마서 12장 19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주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에게 보복하는 것을 막으신 이유는 원수 갚은 것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다윗을 위하여서 친히 갚아 주실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에게 보복하는 것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잠언 24장 29절을 보면 성경은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보복(복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에게 선히 대했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나에게 모욕을 줬다면 나도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대로 나도 그 사람에게 모욕을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분노 가운데 나에게 말을 막한다고 해서 나도 그 사람에게 그대로 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특히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우리는 까닭(이유) 없이 우리 이웃의 거짓 증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입술로 우리 이웃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대방에게 그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친히 보복(복수)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을 속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이웃이게 거짓말을 하고 속인다면 그것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요 8:44).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의 황금률(The Golden Rule)대로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함에 있어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핵심 원리입니다(22:39). 그 원리는 ‘내가 상대방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내가 먼저 그에게 그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나는 상대방이 나를 좀 이해해 주길 원한다면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을 대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진실을 원하듯이 우리가 먼저 그 상대방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거짓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거짓증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진실 된 증거를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보고 훈계를 받아야 하는 것은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30-34절을 보십시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모든 게 속도가 전보다 훨씬 더 빨라졌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일을 빨리 빨리 속도 있게 처리해야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쁜 생활 속에서 할일이 너무 많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던져보아야 할 질문은 ‘과연 바쁜 것이 부지런한 것인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쁘게 사는 것이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꼭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바쁘게 살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게으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바쁜 삶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일들을 미루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미루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게으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30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게으른 자”(the sluggard)의 밭과 “지혜 없는 자”(the man who lacks judgment)의 포도원을 지나가면서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를 동의어(synonym)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 없는 자”란 영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판단력이 부족한 자’란 의미입니다. 과연 게으른 자가 부족한 판단력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게으른 자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 그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그런데 학개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집보다 먼저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바빴습니다(학 1:4, 9). 그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황폐하게 되도록 놓아두고 자기 집을 화려하게 짓는 데만 바빴습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벌이란 무엇입니까? 학개 1장 6절과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9절상).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농작물에 흉년(한재)이 들게 하시사(11절) 그 수확을 빈핍하게 하셨습니다(6, 9절)(박윤선).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재정에 가뭄을 들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궁핍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선순위를 바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궁핍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른 자는 지혜가 없어서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므로 가난하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는 판단력이 부족하여 해야 할 일을 미룹니다. 예를 들어 성경 잠언 6장 10절과 오늘 본문 잠언 24장 33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게으른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이렇게 게으른 자는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좀더 자고 졸고 누워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게으른 자는 깨야할 시간에 깨지 않고 나중으로 미룹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룹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다른 것(상황, 사람 등등)을 탓합니다. 즉, 게으른 자는 책임을 질 줄을 잘 모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잠언 6장 11절과 오늘 본문 잠언 24장 34절을 보십시오: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24:33) 가난이 온다는 뜻입니다(MacArthur).
성경 잠언 6장 9절은 게으른 자에게 이렇게 면책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지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또한 성경 잠언 21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들은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게으른 자들은 일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11-13절을 보십시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게으른 젊은 과부는 오히려 집집에 돌아다니면서 망령된 폄론을 하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므로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에게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26:16)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3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게으름의 악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개미처럼 추수할 시기에 미래(장래)를 위하여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깨어서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찬송가 330장 “어둔밤 쉬되리니”라는 찬양 가사를 보십시오: (1절) 어둔 밤 쉬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2절)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수고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3절)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 이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에게는 반드시 일할 수 없는 밤이 옵니다. 오되 우리가 일할 수 없는 날이 “속히”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할 때에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부지런히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생각을 깊이하면서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27-34절에서 우리는 보고 훈계를 받아야 할 3가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할 것을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 증거로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보고 또 보면서 깊이 생각하며 주님의 주시는 훈계를 겸손히 받고 받은 훈계대로 신실하게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