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야 할 일들

 

 

[잠언 2410-20]

 

 

여러분, 지난 주 유 권사님 옆에 앉아 있었던 꼬마 아이 기억나시나요? 그 꼬마가 유 선교사님 부부의 손주인데 아마 유 권사님께서 그 손주에게 집에 가셔서 나중에 아이가 잠들기 전에 성경책을 읽어 드리고 기도하시면서 아이에게 수요기도회 때 제가 설교한 내용 중 무엇이 기억나는지 물으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라고 말하더랍니다. 하하. 그 말씀은 우리가 묵상한 전도서 9장 18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묵상한 잠언 24장 1-9절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을 것 같아 잠깐 지난 2주 동안 우리가 잠언 24장 1-9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 있는 자는 어떻게 행하는지 한 3가지로 이미 받은 교훈을 좀 복습하고자 합니다: (1) 지혜 있는 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1절), (2) 지혜 있는 자는 자기 집을 견고하게 세웁니다(3절), (3) 지혜 있는 자는 전략으로 싸워 승리합니다(6절).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4장 10-20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한 6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6가지 교훈을 받으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깨달음을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면 너는 정말 약한 자이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어려움이 우리 홀로 감당하기 너무나 힘들고 벅차므로 주위에 도움을 청해보지만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충분히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의지할 분이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 간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주님으로부터 응답이 없는 듯 해보일 때 우리는 더 큰 낙심을 할 수가 있습니다(눅 18:1). 이렇게 낙심하고 또 낙심할 때 우리의 힘도 많이 약해져서 우리는 심신이 지쳐 자포자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7장 32절을 보면 목동 다윗이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여기서 “그”는 바로 “블레셋 사람의 싸움을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을 가리킵니다(23절).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24절) ‘그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32절). 여러분은 이 다윗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윗의 말을 듣고 골리앗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낙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는데 저와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하지도 않으면서 낙담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사울 왕에게 자기가 나가서 그와 싸우겠다고 말한 것일까요?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의 반응을 보십시오: “…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33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용사인 골리앗과 소년인 다윗과의 싸움은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은 아예 하려고 하지도 않는 게 본능입니다. 그 이유는 싸움에서 질줄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한 것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37절 상반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골리앗의 손에서 건져내실 줄 믿었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다윗이게 있었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낙심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다 보면 힘들고 어려움으로 인하여 낙심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시 42:5, 11;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우리는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소년 다윗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엡 3:12) 앞으로 전진 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 하려고 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하며 살인자의 손에 끌려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라”].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이미 들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금년 4월 15일 나이지리아 북동부 보르노주 치복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보코하람이 여학생 276명을 납치했습니다. 이후 수십 명이 탈출하여 지금은 약 219명이 아직 붙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아직도 나이지리아 정부가 그 219여명의 여학생들을 구출해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인터넷 신문(7월 9일)을 보니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나이지리아 당국이 밝혔다고 합니다. 전직 대통령과 주지사, 의회 지도자 등으로 이뤄진 나이지리아 국가위원회의 고드윌 아크파비오 의장이란 사람이 기자들에게 "치안 요원들이 소녀들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어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소녀들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구출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들 외에도 지금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악한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감금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지금 세상 여기저기서 어린 소녀들과 소년들이 성노예(sex slave)를 팔리는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 Australia) 호주 지부에 의하면 필리핀 세부(Cebu) 지역에서 어린 소녀들과 소년들이 성노예로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한 사역을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선교회는 성노예로 팔려간 아이들을 구출하는데 필리핀 정부와 경찰과 검찰에 도움을 주어 5년간 사역을 통해 성노예로 팔린 220명의 아이들이 구출되었고 아이들을 착취한 90명이 넘는 어른들이 구속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또 다른 예는 미국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2012년 5월 21일 미 언론에 따르면 미시간법대와 노스웨스턴 법대가 법원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유죄판결을 받은 뒤 복역 중에 뒤늦게 무죄로 확인된 사례가 최근 23년간 무려 2천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렇게 이 세상엔 억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4장 11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우리에게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속히 그들을 구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11절 말씀을 10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살인자의 손에 끌려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11절) 그들은 충분히 낙담(낙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10절). 만일 우리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낙심과 절망 속에서 다 포기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힘의 미약함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이 억울하게 죽게 된 미약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억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속히 구출해 주길 간절히 바라지 않겠습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그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자포자기하여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면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그 상황에서 속히 건져 주길 간절히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저와 여러분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보면 속히 그를 구출하고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4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네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현대인의 성경) “너는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네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라. 네 마음을 살피시며 너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는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줘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피하지 말아야 할 참으로 중요한 책임은 무엇일까요? 에스겔 33장 7-9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피를 우리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하시는 것 같이 들립니다. 물론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고 자기의 죄악으로 죽으면 우리의 생명은 보전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겔 33:11).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는 자가 우리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그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며 지켜보고 계시기에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핑계나 변명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잠 24:12).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복음 전파의 책임을 충실히 잘 감당하여 주님께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내 아들아, 꿀을 먹어라. 이것이 좋다. 특별히 송이꿀은 더 달다. 이와 같이 지혜도 달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라. 분명히 너에게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며 너의 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꿀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가끔 아내가 인삼차를 타줄 때 설탕대신 꿀을 넣어서 저에게 줘서 마시곤 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꿀이 몸에 어떻게 좋은지 알고 계십니까?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꿀은 혈당 농도를 조절해 주어 몸의 피로를 없애 주고 칼슘, 마그네슘이 있어 불면증 신경통 관절염에 아주 효과가 뛰어나고 각종 염증(고름)에 좋다’고 기록되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리고 히포크라테스나 12세기 유태인 마이 모니드의 ‘무병장수론’을 보면 꿀은 최고의 보약이며 변비에 좋고 목욕한 뒤 목이 마를 때 마시면 좋다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꿀은 벌이 미리 소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흡수가 잘되고, 또 여느 당분과는 달리 신장이나 위의 내벽을 자극하지 않아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며, 또한 칼로리가 우유의 여섯 배나 되고 칼슘, 아연, 구리 등 무기질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어느 웹사이트를 보니까 벌꿀이 왜 좋은지 그 효능을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인터넷): (a) “제독작용: 해독과 함께 종창에도 이용한다. (b) 조변작용: 설사나 이질에 좋고, 만성이 된 상습 변비에도 이용된다. (c) 진통작용: 가슴앓이나 근육통, 치통, 유방염 등의 통증에 이용된다. (d) 치해 작용: 기침이나 기관지염 등에 이용된다. (e) 안신작용: 노이로제나 놀란 데에 응용되며 불면증, 야뇨증에 좋다. 어린이가 정서불안증을 보이고 눈꺼풀이나 입 가장자리가 경련을 일어날 때 이용된다. (f) 생기·소염작용: 새살을 돋게 하며, 종기나 편도선염, 중이염, 인후염 등 화농성 질환에도 이용된다. (g) 자음 작용: 음위, 즉 발기부전을 치료한다. (h) 윤피 작용: 얼굴을 윤택하게 해주고, 습진이나 소아단독(열기에 의한 독성으로 피부가 벌겋게 되면서 화끈거리고 열이 나는 병증)에 이용된다. (i) 부인과에 대한 작용: 난산이나 대하증 등에 이용한다. (j) 보위작용: 비위장 소화기의 기능을 좋게 하고 위를 보호한다. (k) 장수에 대한 작용: 소련에서 110~120세의 고령자 200명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 양봉을 하는 집안에서 자랐거나 늘 꿀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l) 살균작용: 박테리아, 디프스, 파라티프스 균을 살균하는 작용이 있다. 즉 꿀 속에서는 박테리아가 생존할 수 없으며, 디프스 균은 48시간, 파라티프스균은 25시간, 티프스 바이러스는 5시간, 만성 기관지염을 일으키는 균은 4일, 적리(급성 전염병인 이질의 한 가지)를 일으키는 아메바는 10시간 안에 모두 사멸된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4장 13-14절 상반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꿀을 먹어라. 이것이 좋다. 특별히 송이꿀은 더 달다. 이와 같이 지혜도 달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라 ….” 지금 잠언 기자는 꿀이 좋으니까 먹으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송이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송이꿀이 더 달다”고 말하면서 지혜도 송이꿀같이 달콤하니 지혜를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송이꿀”은 다양한 종류의 꿀 중 벌통에서 막 흘러내리는 것을 채취한 꿀이라고 합니다. 이 꿀은 가장 달콤하고 순수한,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꿀로 통한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가 “지혜”를 “송이꿀”에 비교한 이유는 송이꿀이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처럼 지혜도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송이꿀과 같은 지혜는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을까 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의하면 꿀은 반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81편 1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렇게 꿀이 반석에서 나오듯이 지혜도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 지혜는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 4장 5-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우리는 잠언 기자의 말대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지혜(깨달음)를 얻어야 합니다. 그 만큼 지혜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지혜를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꿀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30:5)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평생 옆에 두고 읽고 또한 주야로 묵상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송이꿀을 먹듯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언 24장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이것(지혜)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지혜를 얻어야 하는 이유는 지혜를 얻으면 분명히 우리에게 밝은 미래(장래)가 있고 소망(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3장 17-18절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세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시 73:24). 그래서 성경 잠언 14장 32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송이꿀과 같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 지혜를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5-16절을 보십시오: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은 악한 자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그들로 인하여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악한 자들만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악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한 2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이리 저리 자빠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죄악 된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죄를 지므로 낙심하며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쓴 아삽의 경우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여 거의 넘어질 뻔했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돈도 잘 벌고 등등 그런 모습을 볼 때에 부러워하여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지난 번 교회 34주년 기념 말씀 집회 둘째 날에 강사 목사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1-25절 말씀 중심으로 “구원의 증인”이란 제목 아래 설교를 하셨는데 그 말씀 내용 중 23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는 사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탄이 예수님만 넘어지게 하는 자인가요? 아니잖습니까. 사탄은 예수님의 교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지금 사단은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바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사도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걷는데서 돌이켜 세상의 넓은 길을 걷게 하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사람의 뜻을 생각게 하여 주님의 뜻을 버리고 내 뜻대로 살게 만들려고 계속해서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교회도 엿보아 어떻게 해서든 우리 모두를 넘어지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여기저기서 여러 교훈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4장 16절 말씀에만 근거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넘어지되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일곱 번, 아니 무수히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넘어지므로 말미암아 실망도 되고 죄책감으로 인하여 괴로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오뚝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오뚝이를 치면 넘어졌다가도 다시금 금방 일어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탄과 악인들이 우리를 쳐서 넘어지게 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오뚝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오뚝이는 아래 부분이 가장 무거우므로 우연히 윗부분이 아래로 기울어지더라도 중력의 영향 때문에 가장 무거운 부분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서 결국 언제나 똑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게중심이 아래에 위치해야만 안전하고, 외부의 영향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릴지라도 다시 중심을 잡고 서게 된다는 점입니다(인터넷). 저는 우리 그리스도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게 하고 다시 중심을 잡고 서게 해주는 “무게중심”은 바로 반석이신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수 없이 넘어진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되 수 없이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넘어진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주신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완수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낙심한 영혼을 다시금 소성시키시므로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을 우리에게 내밀어 주시사 우리의 손을 붙잡아 다시금 일으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우리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네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아라”].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원수가 넘어질 때에 속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의 본능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한) 우리의 원수가 넘어질 때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의 원수가 망할 때 그 모습을 보던지 또는 그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니 내 대신 복수해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마음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에스겔 33장 11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 본문 잠언 24장 17절에 적용해 본다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입니다(겔 33:11).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수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우리의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거나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잠24:17,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우리의 원수가 넘어지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성경 본문 잠언 24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 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무슨 뜻입니까?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어기고 우리의 원수가 넘어지던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고 우리의 원수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망함)을 보고 기뻐하면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 지도(돌이키실 지도)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4:18). 무슨 뜻입니까? 원수의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 자신도 넘어질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인터넷). 그래서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잠언 17장 5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지니라.”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장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성경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오늘 본문 잠언 24장 17절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잠언 기자의 말대로 우리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우리는 행악 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행악 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여러분은 여러분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때에 화가 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가 눈물 나게 만들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악한 사람들을 보면 매우 화가 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참으로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살면 화가 나지 않습니까? 화가 나면서 동시에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부럽지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한 것을 보면 우리는 충분히 화가 치밀어 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형통함을 은근히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24장 19절을 보면 성경은 행악 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잠언 24장 1절에서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또한 잠언 23장 17절에서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잠언 기자는 반복적으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오늘 본문 잠언 24장 19절에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언 24장 20절을 보십시오: “대저 행악 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여러분, 악인들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없고 희망의 등불도 꺼질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에 밝은 미래가 있을 것 같고 또한 평생 그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일지라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장래가 없겠고 그들의 등불은 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3장 18절을 보면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정녕히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잠언 24장 14절을 보면 송이꿀과 같은 지혜를 얻는 자에게는 정녕히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이 끊어지지 않고 분명한 장래(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지혜를 얻은 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행악 자들로 인하여 분을 품지 않고 또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행악 자들에게 분을 품지 말고 장래의 소망이 없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은 저와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11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0-20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 6가지를 배웠습니다: (1)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4)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5) 우리는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6) 우리는 행악 자들로 인하여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 해야 할 일들을 행하므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