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있는 자는 강합니다.

 

 

[잠언 241-9]

 

 

여러분, 유태인의 생활 규범인 “탈무드”에 대해서 들어보 셨죠? “탈무드”는 구약성서가 쓰인 뒤 유태교의 법률, 전통적 습관, 축제, 민간 전송, 해설 등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성서 다음으로 유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유태인들의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라 법적 규정이나 판례법 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유태민족의 생활양식은 물론 기독교와의 관계를 아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이 탈무드에 대해서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첫째는, 유태인들은 이 탈무드를 흔히 큰 바다로 비유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다는 거대하고 모든 것이 거기 있고 그러나 무엇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탈무드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은 공백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탈무드를 연구한 어느 목사님에 의하면 그 이유는 탈무드는 항상 밤이나 낮이나 반복하여 평생 읽는 책이지 시작과 끝이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나 연구하여 기록해 넣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이 유태인들의 탈무드에서 지혜가 무엇인지 한 4가지로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1) 지혜는 하나님 자신이다, (2)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3) 지혜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4) 지혜를 통하여 주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현대인의 성경) “지혜 있는 자가 힘 센 자보다 강하고 지식 있는 자가 무력을 쓰는 자보다 강하다”].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지혜 있는 자는 강합니다”란 제목 아래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절을 보십시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우리는 이미 잠언 23장 1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기쁘게 하는 자녀는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에게는 장래와 소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8절).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기쁘게 하는 자녀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17절).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는 악인의 형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즉, 그는 시편 92편 7절 말씀처럼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한 3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1) 우리가 현실 삶 속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악인들은 흥왕하데 신속하게 흥왕합니다. 시편기자가 악인들을 풀과 비교하면서 "생장"한다고 말하였는데 그들은 수고도 들이지 않고 간교함 속에서 신속하게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2) 악인들의 형통은 마치 들풀의 무성함과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열매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악인들이 그들의 흥왕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엔 아무 열매를 맺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풀과 같은 악인의 형통, 그것이 바로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악인의 모습입니다. (3) 악인들의 신속한 형통은 결국 영원히 멸망당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돼지를 도살장에 끌고 가기 위해 잘 먹여서 살을 찌우는 것처럼 악인의 형통의 목적은 영원한 멸망을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D.L. Moody 목사님은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인은 필경 풀처럼 연료가 되기 위하여 생장한다." 실제로 시편 73편 17-20절을 보면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악인들의 종말은 파멸과 황폐와 전멸 및 멸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들과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4장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그 이유는 악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그들의 마음은 멸망을 연구한다는 뜻입니다(인터넷). 이렇게 마음으로 멸망을 연구하는 악인들은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사악한 자”들(the schemers)요 이들은 (항상) 악행하기를 꾀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오늘 본문 9절에서 성경은 “미련한 자”들(folly)이요 또한 “거만한 자”들(mocker)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죄”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악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있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강포는 자기 자신들을 소멸한다고 잠언 21장 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정의를 행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참고: 사 29:20). 또한 잠언 13장 21절은 “재앙은 죄인을 따”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둔다고 성경 잠언 22장 8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아예 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시사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지혜 있는 자는 자기 집을 견고하게 세웁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3절을 보십시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2008년 5월 가정의 달에 역대상 17장 16-27절 중심으로 “주여, 저희 가정을 세우소서!”란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3가지기도 제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 ‘주여,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림을 받는 내 가정이 되게 하소서!’(16절). (2) ‘주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정에 권위가 되게 하소서!’(23절). (3) ‘주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내 가정이 되게 하소서!’(25절). 오늘 이 기도 제목을 다시금 생각할 때 과연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정에 권위인지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가정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4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미련한 여인은 자기 좋은 대로만 행하며[“패역하게 행하는 자”(2절)], 교만하며(3절) 또한 거만하여(6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지식이 없다(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여인은 자기 자신을 속이며(8절) 또한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9절). 그녀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에 진리를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를 모르기에 그녀는 악을 행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기 범한 죄악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할 능력을 그녀는 상실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모르며 죄를 죄로 여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미련한 여인은 “행악으로 낙”을 삼습니다(10:23). 그러기에 미련한 여인은 죄로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각하게 여기시는데 미련한 여인은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이러한 미련한 여인은 결국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헙니다(14:1).

그러나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웁니다(1절). 어떻게 그녀는 자기 집을 세웁니까? 지혜로운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정직히 행합니다(2절). 그녀의 입술에는 지식이 있고(7절) 또한 부지런합니다(4절).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갈 길을 압니다(8절).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향하신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기가 할 일을 바로 알고 그 일을 행합니다(고전 7:17). 그 하나님의 뜻 중 하나는 바로 자기의 집을 세우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이 주님의 뜻을 알고 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주님께 충성하며 부지런히 노력하되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겸손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여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집을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3절에서 성경은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집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견고하게 건축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업자는 집을 지으면서 집의 주추(its foundation)를 반석 위에 놓습니다(25절). 여기서 “반석”하면 생각나는 개념은 ‘든든하다, 견고하다’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의 상징적인(figuratively) 의미는 바로 ‘견고함, 단단함’(firmness) 또는 ‘안정성’(stability)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미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요 그 교회의 영적 주초는 바로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지혜 있는 자는 자기 집의 주초를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 위에 세웁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4장 4절을 보십시오: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과연 이 말씀의 뜻이 지혜로 자기 집을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 위에 견고히 세울 때 그 집이 풍부한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 보배로 채우게’ 된다는 사상도 물질이 풍부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지혜(하나님을 경외함)로 말미암아 받는 복이 풍부한 재물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이 말씀은 비유이니, 진실한 신자에게 하늘의 보화가 많을 것을 보여준다”(인터넷). 지혜로운 자가 이 땅에 보화를 쌓아두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려고 하겠습니까? 하늘 아닙니까? 미련한 자들이나 이 땅에 재물을 쌓아둡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하늘에 보화를 쌓아둡니다. 이렇게 지혜로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의 위에 집을 견고히 세우는 지혜 있는 자는 하늘에 보화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므로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립니다. 결국 주님께서 세우시는 우리 각자의 집이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견고히 세워지므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워져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가정과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지혜 있는 자는 전략(지략)으로 싸워 승리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6절을 보십시오: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우리가 잠언을 묵상해 오면서 잠언 기자가 승리의 비결은 전략(지략)으로 싸워야 할 교훈을 몇 번이고 교훈한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복습을 하자면 잠언 20장 18절을 보십시오: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또한 잠언 11장 14절을 보십시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이 말씀들의 요점을 정리한다면, 전쟁에서 승리의 비결은 지략의 많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무기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할 텐데 잠언 기자는 오히려 지략이 많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 대답을 전도서 9장 18절 상반절에서 찾았습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전략(지략)으로 싸워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단도 전략으로 영적 전쟁에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가능한 한 거짓을 많이 퍼뜨려 진리를 부인하고 오염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주된 전략이다"(맥아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은 비복음적이며 비진리인 거짓에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상호 존중이란 시대의 흐름 아래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혼동하고 있으며 혼합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전략들을 이미 묵상했었습니다. 한 2가지만 나눕니다: (1) 출애굽기 14장 3절에 나타난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로 하여금 목표가 없이 방황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과 우리를 코너에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2) 사도행전 21장 27-36절에 나타난 사단의 전략입니다. (a)그 사단의 전략이란 첫째로 “충동”(질)입니다(27절). 뭔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그저 추측 가운데서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하여 주장을 피므로 결국 주위 사람들을 충동하여 자기편을 만들어 그룹을 형성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b) 또한 그 사단의 전략은 “소동”입니다(30절). 사단은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교회 안에서도 충분히 소동을 일으킵니다. (c) 사단의 전략은 “소문”입니다(31절). 사단은 교회 안에서도 악성 소문을 퍼트립니다. (d) 사단의 전략은 “폭행”입니다(35절). 이러한 사단의 전략을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함에 있어서 우리의 적군의 전략을 파악해야 우리도 전략을 바로 세워서 싸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을 세우되 중요한 것은 잠언 21장 31절 말씀처럼 “이김은 여호와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믿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전략을 세워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다고 하니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 15:31). 여기서 아히도벨이란 사람은 다윗 왕의 모사였지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 왕을 배반할 때 다윗 왕을 버리고 압살롬을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15:31). 그가 베풀었던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16:23).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20절)고 말하였을 때 아히도벨은 그에게 좋은 계략 두개를 베풀었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베푼 첫 번째 계략은 다윗 왕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라는 것이었습니다(21절). 그 이유는 “그러면 왕의 부친(다윗)이 왕(압살롬)을 원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이며 왕(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크게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21절, 현대인의 성경).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베푼 두 번째 계략은 자기에게 병력 12,000명만 주시면 그날 밤 다윗을 추적하여 그가 지쳐서 피곤할 때 그를 기습하여 다윗만 죽이고 다윗과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은 압살롬에게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17:1-3). 이 얼마나 좋은 계략입니까? 이 두 번째 계략을 들은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 아히도벨의 말을 좋게 생각하였습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또 다른 지혜로운 자인 아렉 사람 후새의 말도 듣기를 원했습니다(5절). 여기서 아렉 사람은 후새는 다윗의 친구였습니다(대상 27:33). 그는 다윗의 명대로 다윗과 함께 가지 아니하고(33절) 오히려 모반을 일으킨 압살롬이 거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4절). 그 목적은 그가 기도한 내용대로[(삼하 15:31)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34절). 그가 압살롬에게 베푼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자기 자신과 12,000명의 병력이 다윗을 추적하는 것)과 달리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모아 막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압살롬이 직접 그 군대를 지휘하여 친히 전장에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17:11). 또한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다윗만 죽이는 것)과 달리 압살롬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찾아 기습 공격을 하여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의 군대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만일 다윗이 어느 성으로 도망가면 그 성까지도 무너뜨려야 한다고 것이었습니다(13절). 이 후새의 계략을 들은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14절). 그런데 실제로 과연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나은 것이었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16:23) 아히도벨의 계략이 후새의 계략보다 훨씬 저 좋았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후새의 계략을 선택하지 않고 아히도벨의 계략을 선택하여 아히도벨에게 병력 12,000명을 주어 그로 하여금 그날 밤 다윗을 추적하였다면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후새의 계략을 선택한 결과) 오히려 다윗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말대로 다윗만 죽임을 당하였으면 다윗을 따르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에게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압살롬은 이렇게 좋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버리고 후새의 계략을 택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15:31)를 들으시사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17:14).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처럼 영적 전쟁에서 많은 전략(지략)으로 싸우되 하나님께 사단의 전략을 물리쳐 달라고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지혜 있는 자는 강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지혜를 주셔서 강한고 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군사들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우리 집과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 나아갈 수 있길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지혜 있는 자들이 되어 전략(지략)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