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잠언 23장 1-8절]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느 한 단체에서 3주에 걸쳐 3만 3,000여명이 참가한 페이스 북 설문조사를 통해 ‘당신이 뽑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50선’을 내놓은 기사를 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기사를 보니까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50개 중 1위에서 10위까지가 모든 동양권 음식이었습니다. 1위와 2위와 6위가 인도네시아 음식이었습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모르는 음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음식인 일본 음식 스시(Sushi)와 라면은 3위와 8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태국 음식 파타이(Pad thai)는 5위였습니다. 한국 음식으로는 김치와 불고기가 12위, 23위였고 월남 국수 포(Pho)는 20위, 멕시코 음식인 타코(Taco)는 27위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마 여러분이 배가 고프시면 먹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배고픔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몸의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뭔가를 섭취해야 한다는 신호라고 합니다. 이러한 배고픔은 크게 두 가지 기전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혈당이요 또 다른 하나는 위장이 비어있을 경우라고 합니다. 만성피로, 해독, 비만 및 임상 영양치료의 최고 권위자라는 차의과 대학교 항노회연구소 김상만 교수라는 사람은 “우리 뇌는 혈액 중의 당이 떨어진 것을 감지하게 되면 식욕중추를 자극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공복감”이라고 합니다. 이 공복감을 우리가 느끼게 되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면서 음식을 먹게 된다고 합니다. 위장이 비어있을 경우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경우입니다. 대부분 위장이 비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김상만 교수는 “그렇게 되면 위가 수축을 하게 되면서 그렐린이라는 장호르몬을 분비하게 된다.”고 밝히고 “이것이 뇌에 전달되면 공복감을 느끼게 되면서 먹을 것을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과식을 하는 것인가 입니다. 왜 우리가 음식의 유혹에 넘어가서 과식하는 것일까요? 김상만 교수는 과식을 부르는 최대 주범으로 ‘스트레스’를 꼽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스트레스는 단순히 직장상사한테 받는 그런 감정적인 스트레스뿐만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즉,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상황은 모두 다 내 몸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간관계어서 다투던지 해서 분노를 하면 그것은 분명 우리 몸에 스트레스를 줍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에는 에너지 저하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저혈당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면 뇌는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연료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즉각 보내고 이때 필요한 것은 지방도 아니고 단백질도 아닌 바로 당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오로지 당만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 함량이 높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게 된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과식을 부추기는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비밀은 호르몬에 얽힌 비밀이라고 합니다. 김상만 교수는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그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물질도 나와 주어야 한다.”고 밝히고 “그 물질의 대표가 바로 세로토닌”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돼야 하고 그래야 우리는 스트레스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로토닌을 분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하기도 하고 매운 음식을 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술을 먹기도 하고 심지어 마약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김상만 교수는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어도 스트레스를 이기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나오게 된다.”고 밝히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식을 탐하게 된다.”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3장 3절과 6절을 보면 성경은 두 번이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한 세 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맛있는 음식을 탐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3장 3, 6절에서 잠언 기자는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는 말은 “음식을 탐하는” 것(gluttons)을 말합니다. 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 여기서 ‘음식을 탐하는 자’들이란 영어로는 “gluttons”로서 한국 번역으로는 “폭식, 과식”입니다. 이 단어의 라틴어 “gluttire”는 “to gulp down or swallow,” 즉 ‘한 입에 꿀꺽 집어삼키다’, 그것도 빨리 그리고 시끄럽게 음식을 삼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뜻은 음식을 “탐닉하다”(over-indulgence), 너무나 과도하게 먹는다(over-consumption)란 의미입니다. 유대교의 토라 안에 613 계명(613 commandments)이란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 계명 중 169번째 계명을 보면 과식이나 과음은 금한다고 써있다고 합니다(Wikipedia). 성경을 보면 음식을 탐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문란한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16장 49-50절 상반절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 이 성경 말씀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소돔과 고모라가 범한 죄 중에 “음식물의 풍족함”(overfed)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너무나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소돔과 고모라는 “태평함이 있”다(unconcerned)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너무나 음식을 많이 먹고 배가 불러서 태평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그들의 죄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에스겔서 말씀을 생각할 때 지난 주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신명기 31장 20절과 32장 1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할 줄 알았습니다. 신명기 8장을 보면 성경은 그 가나안 땅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땅”(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땅(9절), “옥토”(10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12절) 거기서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며 그들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염려했습니다(13-14절). 그 염려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입니다(17절). 이 말씀과 연관해서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 맛있는 음식을 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먹어 배부르고 살찌고 비대해 져서 결국에는 마음도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식을 탐하는 것과 마음의 교만함과 연관돼 있습니다. 음식을 탐하다가 먹고 배부르고 살찔 때 배만 살찌는 게 아니라 마음도 살이 쪄서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사람의 본능은 헛된 것에 육체적인 보안(carnal security)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러분, 음식을 탐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성경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9절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성경은 멸망을 당할 악한 사람의 신은 “배”(stomach)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사람은 음식을 탐하여 먹는 것에 중독돼 있다는 말입니다(Torrey). 여러분은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에 중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중독”하면 주로 술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성중독 등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중독”하면 인터넷 중독도 있고 또한 쇼핑 중독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음식 중독이 있을까요? 캐나다 의학회 저녈(CMAJ)(2010년 3월 9일)에는 지금 현재 가장 빠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는 21세기 유행병인 비만에 ‘음식중독(Food Addiction)’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을 다뤘다고 합니다. 비만의 원인은 몸에서 소비하는 칼로리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기 때문인데 칼로리 섭취과잉(과식)이 ‘강박적’이고 본인의 의지로 컨트롤이 안 되는 상태라면 그 상태를 가리켜 일부학자들은 ‘음식중독’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인터넷). 결국 오늘 본문 잠언 23장 3,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음식에 중독이 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여도 문안하다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경은 누구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3장 3절과 6절에서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1절을 보십시오: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즉, 성경은 “관원”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관원”이란 그냥 보통 “관원”이 아니라 호화로운 부자 관원(the luxuries of a wealthy ruler)입니다(MacArthur). 그리고 이 호화로운 부자 관원은 영항력 있는 사람입니다(an influential person)(MacDonald). 그런 사람이 연회(banquet)를 베풀었을 때 그가 준비한 맛 있은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향력 있는 호화로운 부자 관원은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성경은 “악한 눈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한 눈이 있는 자”란 히브리어 원어로도 올바른 번역인데 영어 성경에는 “a stingy man”(인색한 사람)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한 눈이 있는 자”에서 “악한 눈”이란 단어는 여기 잠언 23장 6절 외에 딱 한번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잠언 28장 22절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성경은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한 눈”과 반대되는 말은 “선한 눈”(a good eye)으로 잠언 22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A generous man will himself be blessed, for he shares his food with the poor). 여기서 “선한 눈을 가진 자”는 영어 성경에는 “a generous man”(너그러운 사람)으로 변역돼 있는데 그 이유는 선한 눈을 가진 자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눈을 가진 자”는 그와 정반대로 자기의 풍족한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인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악한 눈을 가진 자는 구두쇠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구두쇠는 어떠한 사람인지 오늘 본문 잠언 2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는 언제나 비용부터 먼저 생각하는 자이다. 그가 말로는 너에게 와서 먹으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관원”은 언제나 비용부터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인색한 자가 연회를 베풀어서 음식을 공급한다는 것은 위선적으로 자신이 너그럽다는 것을 가장하는 것입니다(Walvoord). 그의 마음을 결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7절). 이러한 자는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가난한 자를 학대하기까지 하며 자기보다 더 큰 부자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뇌물까지도 줍니다(22:16).
저는 성경에 나오는 구두쇠, 즉 자신의 풍족한 양식을 다른 이와 나누지 않는 호화로운 부자를 생각할 때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의 남편인 “나발”이 생각납니다. 나발은 누구입니까? 나발은 유다의 갈멜에 살던 사람으로서 성경 사무엘상 25장 2절을 보면 그는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 “나발”의 뜻은 ‘미련하다’(Fool)입니다(25절). 즉, 그는 자기 아내가 보기에게도 “미련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 아비가일의 말을 빌리자면 나발은 “불량한 사람”(wicked man)이었습니다(25절). 심지어 나발의 하인들도 자기들의 주인에 대해서 아비가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17절).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 자기 아내뿐만 아니라 자기의 하인들조차도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한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습니다(3절). 그래서 그는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21절). 즉, 다윗은 나발을 매우 선대하되(15절) 다윗의 소년들이 나발의 하인들에게 담이 되어 밤낮 그들과 함께 있어 그들과 그들이 지키는 양 떼들을 다 보호해 주었습니다(15-16절). 그러므로 그들의 것이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7절). 그러나 나발은 불량하고 완고하여 행실이 악하여 다윗이 보낸 사환들을 괄시하고 박대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사환들이 찾아 와서 “내 소년들에게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8절)고 말하면서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8절)고 말했지만 나발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10절).
여러분, 우리는 인색한 사람하고 식사할 때 우리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대접하는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왜 성경은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3장 3절을 보십시오: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그가 베푼 것이 진수성찬이라도 탐하지 말아라. 그것은 너를 속이는 미끼가 될 수도 있다”]. 관원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 음식은 속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음식은 우리를 속이는 미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음식이 속이는 미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이 질문을 던질 때 한국 드라마에 호화스럽게 사는 인색한 부자가 정치인하고 식사하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주로 그러한 장면의 모습들은 부자가 권력을 가진 정치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뇌물을 제공하므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모습을 봅니다. 그 때 그 정치인은 그 부자에게 그 뇌물을 받고자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봅니다. 결국 부자는 정치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돈이라는 미끼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속셈이고 정치인은 그 돈의 미끼에 넘어가서 그 부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볼 때에 둘 다다 탐심에 이끌림을 받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의 식사는 음식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 그 음식 식사를 같이 하는 두 사람 마음의 동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부자가 불순한 동기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얻고자 여러분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같이 식사하다가 그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뇌물을 주면서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 2장 13절을 보십시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현대인의 성경) “결국 그들은 악한 짓을 한 그 댓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낮에 흥정 대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여러분과 함께 앉은 잔치 자리에서까지 속이고 쾌락을 즐기는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지키지 않는 거짓 선생은 음식을 탐하되 그는 우리와 함께 앉은 잔치 자리에서까지 우리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속임수에 넘어간다면 나중에 그의 속임수이 우리가 넘어간 것을 깨달을 때에 그 먹었던 것을 토할 만큼 마음에 불쾌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잠 23:8)(박윤선). 그리고 그에게 식사 대접을 받았을 때 감사하다고 한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8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 거짓 선생의 맛있는 음식을 탐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속이는 음식입니다(2절).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생의 “속이는 음식”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악한 눈을 가진 부자의 미끼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궁핍해서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돈이 꼭 필요한 데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을 절박한 상황일 때 악한 부자가 던지는 돈의 미끼에 넘어가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는 우리 사람의 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돈의 미끼는 충분히 유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잠언 23장 4절 말씀처럼 만일 우리가 탐심 가운데서 “부자 되기를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악한 부자가 던지는 돈의 미끼에 충분히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부자 되기를 애쓰고 있다면 무엇에 주목하겠습니까? 재물이 아닙니까?(5절) 성경 디모데전서 6장 9-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파멸과 멸망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여 돈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릅니다. 그 래서 성경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여러분, 오늘 본문 잠언 23장 4절을 보면 성경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현대인의 성경)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거짓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려고 하는 사사로운 인간의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박윤선). 여기서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란 말씀이 현대인의 성경에는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이 번역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우리는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자제하는 지혜”가 무엇일까요? 한 2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자제하는 지혜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되 지금 내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1절).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식사를 해야 합니다. 그 말은 달리 얘기한다면 생각의 날개를 펴서 상대방의 대해서 마음대로 생각하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자제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되 상대방의 말만 무조건 듣고 다 믿지 말고 분별력을 가지고 잘 들어서 그 상대방의 마음의 동기를 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자제하는 지혜란 절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3장 2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입맛이 당겨도 절제하여라”]. 우리는 생각의 절제도 해야 하지만 음식의 절제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음식의 절제란 특히 문맥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의 절제입니다. 우리는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시 62:10). 마음의 절제란 어떠한 종류의 탐심의 유혹이라도 뿌리치고 자족하는 마음을 지키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탐심의 유혹에 넘어가서 탐심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제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인데(약 1:5) 우리는 지혜를 구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절제”(self-control)를 간구해야 합니다(갈 5:23).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재물을 탐하는 것은 허무한 것임을 좀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3장 5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현대인의 성경) “재물은 사라지는 법, 독수리처럼 날개가 돋쳐 날아가 벌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어질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딤전6:17)(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로 과식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를 뚱뚱보로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김상만 교수는 그것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습관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과식은 혈관 건강을 위협하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과식을 하면 활성산소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식은 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 이상을 먹기 때문에 쓰고 남은 에너지는 어디에든 축적이 되어야 한다. 축적을 하는 곳은 지방세포다. 지방세포가 늘어나면서 먹고 또 먹어서 들어온 영양분을 저장한다. 그러나 지방세포가 이들 영양분을 저장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지방세포가 더 이상 저장할 수 없을 때 그 영양분은 혈관 내에서 떠돌면서 갖가지 만행을 저지른다. 혈관에 지방이 쌓여 고지혈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혈관에 당이 쌓여 혈관을 약하게 만들어 혈관 내 출혈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식은 21세기를 주도하는 만병의 근원이 된다. … 우리가 먹은 음식은 산소를 이용해서 에너지 대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필연적으로 불안전하게 연소되는 산소가 남게 된다. 그것이 활성산소다. 이러한 활성산소는 노화를 촉진하는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또 우리 몸속 장기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만성질환을 유발하는 원흉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과식을 하게 되면 우리 몸의 무법자 활성산소도 덩달아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김상만 교수는 ‘과식을 막는 것은 노화를 막고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우리가 과식을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과식을 막는 생활 실천 법 4가지는 음식을 천천히 먹는 것, 세로토닌 분비가 잘 되도록 하는 것, 당성분이 많이 든 음식을 삼가는 것, 그리고 감칠맛에 버릇을 들이지 말 것입니다. “과식하지 않으려면 생활 속에서 MSG를 먹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감칠맛의 유혹을 끊어내는 비결이고, 과식을 막는 첩경이다. 김상만 교수는 “오늘날 우리 주변 곳곳에는 짭짤하고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의 천국과도 같다.”고 밝히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되도록 맛없게 먹고,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 것”이라고 당부한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잠언 23장 1-8절은 우리에게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색한 호화로운 부자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음식은 속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음식은 우리를 속이는 미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제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제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마음을 절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탐심의 유혹이라도 뿌리치고 예수님 한분으로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