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부자
[잠언 22장 1-16절]
새해를 맞이해서 새벽기도회 때마다 성경 창세기를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복을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요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아가시는 진실한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불성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신실하게 복주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해 나아가신 것을 봅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창 12:2)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24:1).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에게도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26:3; 참고: 24절).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13절). 그러면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고(28:1, 4)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을 수고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매우 번창”케 하셨습니다(30:43).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32:10).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사 축복해 주신 것을 묵상할 때 저는 디모데후서 2장 1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신실성이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것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인 창세기 28장 15절을 묵상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며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행할 때까지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진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이루실 것임을 다시금 재확인하며 재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를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1절)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그 사랑을 항상 찬송합니다.”
여러분, 성경 잠언 10장 2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부하게 되는 것이지 노력만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2장 1-16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부자”란 제목 아래 과연 지혜로운 부자는 어떠한 자인지 6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른 선택을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1절을 보십시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그 올바른 선택이란 그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그리고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재물을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명예를 선택하셨습니까? 여기서 “명예”(a good name)란 “좋은 이름”(a good name)을 가리키는데 저는 이 단어를 생각할 때 전도서7장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제가 전도서 7장 1절을 상반 절만 읽지 않고 다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이름”과 “죽는 날”과는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연관은 결국 죽는 날에 우리의 이름이 좋은지 안 좋을지 평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는 날에 조문객들이 우리 이름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을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평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평판이 좋을지 안 좋을지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1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예”란 훌륭한 성품으로 인한 명예로운 평판입니다(Walvoord). 솔로몬 왕은 이 명예가 많은 재물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명예가 많은 재물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명예보다 많은 재물이 더 낫다고 믿고 있습니까?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재물이 명예보다 더 낫다고 믿고 여태껏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물은 모았는데 만일 그리도 열심히 모으면서 우리의 성품이 안 좋다는 평판을 주위 사람들에게 듣기까지 했다면 우리의 장례식은 그리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명예의 우선순위를 두고 일도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하되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면서 재물을 얻었다면 우리를 향한 주위 사람들의 평판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22장 1절 하반절에서 “은이나 금보다 은총(grace or favor)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금은보다 은총, 즉 “호의, 친절, 은혜”(favor)를 더욱 택하라는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금은과 같은 재물보다 우리 이웃을 위하여 그들을 돕는 일이나 호의를 베푸는 것을 더욱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러한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리 삶을 살아드릴 때 우리는 죽는 날에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평판이 좋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므로 조문객들도 우리 인생의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다. 명예를 얻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재물은 실제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오히려 그 많은 재물은 우리의 명예를 망칠 것입니다(Walvoord).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선택하십시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부자의 바른 선택입니다.
둘째로,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른 지식이 있습니다.
그 올바른 지식이란 오늘 본문 잠언 22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이던 부한 자이던 그 모두를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명예와 은총보다 많은 재물을 선택한 미련한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모두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무지함 가운데서 가난한 자들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앞에서 교만합니다. 교만하되 그 미련한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난한 자들을 주관함에 있어서(7절) 자기의 교만함을 드러내기에 바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대하 25:19) 또한 자기의 영광을 들어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시 31:18) 행합니다. 심지어 조롱까지 합니다(119:51).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심히 압박합니다(10:2). 이렇게 미련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고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지도 않습니다(겔 16:49). 오히려 그들을 학대합니다. 성경 잠언 14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미련한 부자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님을 공경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혜로운 부자가 주님을 공경하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지혜로운 부자는 미련한 부자와 달리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자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만드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잠 19:17) 그들을 구제합니다(28:27). 성경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바로 지혜로운 부자는 이 진리를 알고 있기에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는 환난 중에 고아와 과부를 돌봅니다. 또한 그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구제합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지켜주신다고 오늘 본문 잠언 22장 1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이나 부한 자들 모두 다 만드셨다는 이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른 자세가 있습니다.
그 올바른 자세란 오늘 본문 말씀에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지혜로운 부자의 올바른 자세는 겸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4절을 보십시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여러분, 미련한 부자는 거만합니다(10절). 그래서 그에게는 다툼과 싸움과 수욕이 그치지 않습니다(10절). 그러나 지혜로운 부자는 결코 거만하지 않습니다(10절). 오히려 그는 겸손하여 하나님을 경외합니다(4절).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22장 7절을 보면 성경은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한다 할지라도 지혜로운 부자는 겸손한 자세로 가난한 자를 주관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4절). 지혜로운 부자는 비록 자기가 가난한 자를 주관한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다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고(2절) 그 주님께서 자기와 가난한 자를 다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므로 그는 겸손히 가난한 자를 주관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나와 있는 상전과 종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이자 윤리입니다. 에베소서 6장 9절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골로새서 4장 1절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중요한 원리는 상전들도 그들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고 중요한 윤리는 그러므로 상전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고 그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자는 이 성경적인 중요한 원리와 윤리를 지켜 행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냅니다.
여러분, 이렇게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보상해 주시는지 아십니까? 그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riches, honor and life)입니다(잠22:4).
(3) 지혜로운 부자의 또 다른 올바른 자세는 바로 부지런함입니다.
잠언 22장 13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미련한 부자의 잘못된 자세입니다. 그 잘못된 자세는 바로 게으름입니다. 즉, 미련한 부자는 게으름입니다. 어느 정도로 게으른가 하면 미련한 부자는 사자가 밖에 있으므로 자기가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임을 당한다는 변명으로 집 밖으로 나아가 일하러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MacArthur). 즉, 게으른 자는 실제로 밖에 사자가 있어서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일하러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러 가기 싫어서 말도 안 되는 변명까지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MacDonald). 이것을 어떻게 짐작할 수가 있는가 하면 비슷한 말씀인 잠언 26장 13절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여러분, 정글의 왕인 사자가 뭐 하러 사람들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 와서 길에 어슬렁거리겠습니까? 어쩌면 게으른 자는 길 밖에 있는 고양이 소리를 듣고 사자라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집 밖으로 나아가 일하러 가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겁을 집어먹고 자신이 없을 때 핑계를 대는 구실을 만들기 바쁩니다. 이렇게 미련한 부자는 게을러서 손으로 열심히 일하기보다 머리만 열심히 굴려서 꾀를 부려 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는 미련한 자로서 ‘자기 살을 먹는다’라고 전도서 4장 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미련한 자는 게을러서 아무런 수입을 얻지 못하고 다만 멸망을 자취하는 것뿐이라는 뜻입니다(박윤선). 그와 반대로 지혜로운 부자는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지런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미련한 부자처럼 이런 저런 핑계나 변명을 되면서 일하러 가지 않고 놀고먹지 않습니다. 그의 일 철학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입니다(살후 3:10). 그러므로 지혜로운 부자는 부지런히 일합니다. 그러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을 것입니다(잠 13:4).
넷째로,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르게 행동합니다.
여기서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은 한 4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지혜로운 부자는 재앙을 보면 피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3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무조건 그 위험한 일을 부딪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닙니다. 즉, 우리는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피신해야 하면 피신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이 다윗을 질시하여 그를 죽이고자 했을 때 다윗은 용맹스럽다고 하여 사울 왕에게 나아가 골리앗과 싸우듯이 싸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에게 피신하여 여기 숨어 다녔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3절에서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숨어 피한다’는 것은, “신자가 환란 중에 주님을 위한 목적 없이 생명이 희생되거나 무의미한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함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런데 왠지 가끔 기독교 뉴스를 보다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일들이 접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생각에 순교할 각오를 한다고 하면서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국가에 가서 선교를 무모하게 하다가 선교도 제대로 못하고 희생을 당한다면 과연 이것이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겠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오늘 본문이 우리 신자들에게 세 가지를 말해준다고 말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주님을 위하면서도 적당한 시기가 오기 전에는(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전에는) 지혜 없이 위험한 일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님을 복음을 위하여 무모하게 반대자들의 반발을 일으킴으로 핍박을 초래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박윤선). 그런데 지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우리 기독교인들 중 얼마나 무모하게 안티기독교인들의 반발을 일이키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만용”하고 “용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맹종”과 “순종”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맹종과 만용은 결코 우리 신자들의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지혜로운 행동은 위험할 때 피신할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지혜로운 부자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잊지 않고 위험할 때에 잠시 그곳을 피신하지만 다른 곳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2) 지혜로운 부자의 올바른 행동은 패역한 자의 길을 멀리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영혼을 지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5절을 보십시오: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여기서 “패역한 자의 길”이란 마음이 구부러진(crooked) 자의 길을 말합니다(박윤선). 마음이 구부러졌다는 것은 그의 길 또한 구부러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가시와 올무에 찔리고 걸리지 않기 위해선 아예 그 길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잠언 22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음녀의 .. 깊은 함정”입니다. 이 음녀의 함정에 지혜로운 부자는 빠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그 음녀의 패역한 길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5절). 그 리고 그가 패역한 자의 길을 멀리하므로 자기 영혼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는 그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11절). 그러나 미련한 부자는 그 음녀의 패역한 길을 가까이 하여 그녀의 집 쪽을 걸어갑니다. 잠언 7장 7-8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가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로 잠언 4장 14-15절에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지켜 행하므로 악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으로 새겨듣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며 악인의 길로 다닙니다.
잠언 7장에 나오는 한 지혜 없는 자가 바로 이러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 어리석은 자는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지나갈 때(8절)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오히려 돌이켜 떠났어야 했습니다(4:15). 그러나 그 어리석은 소년은 그 음녀의 길을 돌이켜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걸어가되 그 음녀의 집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그것도 해가 저물고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 그 어리석은 소년은 그 음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7:9). 왜 대낮이 아닌 깊은 밤 흑암 중에 그 소년은 음녀의 집으로 향했을까요? 그는 아무도 자기를 보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리석은 소년은 남에게 자기 행위를 감추려고 은밀히 깊은 밤에 창녀에게로 간 것입니다(박윤선).
(3) 지혜로운 부자의 올바른 행동은 그는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습니다.
성경 잠언 22장 16절을 보십시오: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미련한 부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악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는 탐심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가난한 자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까지 끌고 가기도 합니다(약2:6). 그리고 미련한 부자는 법정에서 악한 판사에게 뇌물까지 줘가면서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도록 하며 가난한 자의 권리도 박탈합니다(사 10:2). 또한 미련한 부자는 자기보다 더 큰 부자에게 선물들을 줍니다(잠 22:16). 그 선물들이란 바로 뇌물성이 있는 선물들입니다. 그가 이러한 뇌물성 있는 선물들을 자기보다 더 큰 부자에게 주는 이유는 더 큰 부를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기까지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온가족 식구들을 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27절을 보십시오: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그리고 미련한 부자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진리는 바로 잠언 28장 8절입니다: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결국 미련한 자가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성경 잠언 14장 3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잠언 22장 8절을 보십시오: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결국 미련한 부자는 악을 뿌리므로 재앙을 거두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련한 부자는 자기의 이익을 구하고 탐하다가 결국에는 재앙을 당하지만 지혜로운 부자는 결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고(29:7) 그를 불쌍히 여겨(시 72:13) 그를 구제하며 (잠 28:27) 도와주며 또한 보살펴 줍니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줍니다(시82:4). 그가 그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가난한 자의 유익을 구합니다[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13:5)].
(4) 지혜로운 부자의 올바른 행동은 그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줍니다.
성경 잠언 22장 9절을 보십시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지혜로운 부자는 “선한 눈을 가진 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a generous man”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 뜻은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원어 히브리어를 보면 ‘친절한 눈을 가진 사람 또는 자비로운 눈을 가진 사람’[a man of a kind eye or of merciful eye(Gesenius)]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비로운 눈을 가진 자가 복을 받는 이유는 그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기 때문입니다(9절).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부자는 가난하고 힘이 없고 무력한 자들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눈으로 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자기의 음식을 그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15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주되 아끼는 마음을 품지 않고 자기의 것을 나눕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이 바로 지혜로운 부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우리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히13:16).
다섯째로,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른 입술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11절을 보십시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서 올바른 입술이란 바로 덕이 있는 입술을 가리킵니다. 바로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덕이 있는 입술’이란 바로 ‘은혜로운 입술’입니다. 즉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은혜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22장 11절 하반절에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고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바로 임금의 충성된 신하라 생각됩니다. 즉, 충성된 신하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로서 자기 입술로 임금에게 덕이 있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충성된 신하가 섬기는 임금에게 덕이 있는 말을 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시편 15편 2절을 보면 성경은 주님의 장막에 머무를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신하는 자기가 섬기고 있는 임금이 잘못하고 있을 때 그 임금에게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입니다. 그는 그의 임금에게 정직하게 해야 할 말을 하므로 잘못하고 있는 왕의 잘못을 깨우치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 에베소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현대인의 성경)(speaking the truth in love). 그러나 간신과 같은 신하는 어떠합니까? 그는 결코 마음에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하고 있는 왕에게 정직한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왕에게 아부나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부나 하는 말은 오늘 본문 잠언 22장 12절에서는 “사악한 사람의 말”(the words of the unfaithful)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겉보기와 달리 위험한[treacherous(Walvoord)]말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왕을 바로 세워주는 말이 아닙니다. 즉, 아부는 덕을 세우는 말이 결코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부자는 덕을 세우는 말들을 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사람을 세워주는 은혜스러운 말들입니다. 전도서 10장 12절을 보십시오: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롭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은혜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고 계십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지혜로운 부자는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합니다.
과연 지혜로운 부자는 어떻게 자기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합니까? 물론 그는 올바른 선택과 지식과 자세와 행동 그리고 입술로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하는 면도 있지만 오늘 본문 잠언 22장 6절과 15절에서 2가지 올바른 자녀 양육 방법을 우리는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올바른 2가지 자녀 양육 방법이란 바로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6절)과 자녀를 징계하는 것입니다(15절).
(1) 먼저 첫 번째 자녀 양육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잠언 22장 6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제 자신에게 비춰볼 때 과연 나는 저의 세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자녀 양육을 잘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여태껏 잠언 22장 6절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나 자신과 더불어 우리 교회의 부모님들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3가지를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고 권면했었습니다. 그 3가지란 바로 바른 가치관(Right Value), 뚜렷한 목적관(Clear Purpose), 그리고 영원한 인생관(Eternal View of Life)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선한 길”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왕상 8:36; 대하 6:27).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부모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자녀들에게 주신 재능을 발견해서 개발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디딤돌이 되어야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꽃이 필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아야 합니다.
(2) 또 다른 자녀 양육 방법은 오늘 본문 잠언 22장 15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들을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양육해야 합니다. 잠언 17장 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여기서 솔로몬 왕이 대조하는 것은 지혜로운 종과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입니다. 한 사람은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신분을 가진 자가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 주인에게 유업을 나눠 얻는다는 말을 지금 솔로몬 왕은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에 가능합니까? 어떻게 종의 신분을 가진 자가 그의 주인에게 아들처럼 유업을 나눠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종이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로운 종(또는 슬기로운 종)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잠언16장 20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지혜”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지혜란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잠언 19장 20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고 하나님의 권고와 훈계를 받을 때에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2). 그 좋은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잠언 17장 2절에서 말하는 그 주인의 아들처럼 자기도 유업을 나눠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은 그의 아비의 근심이요 그 어미의 고통이라고 잠언 17장 2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미련한 아들은 부끄러운 짓을 하므로 그의 아버지의 근심이요 그의 어머니의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잠언 17장 21절을 보면 성경은 이러한 미련한 자를 낳는 부모는 근심을 당하고 또한 미려한 자식을 둔 아버지는 낙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식은 둔하고 멍청할 뿐만 아니라 영적 통찰력과 예민함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므로 부끄러운 짓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근심이요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잠언 10장 22절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부하게 되는 것이지 노력만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하게 된 부자, 즉 지혜로운 부자는 어떻게 하는지 우리는 여섯 가지로 배웠습니다.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른 선택을 하며 올바른 지식이 있고 올바른 자세로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부자는 올바른 입술이 있고 또한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한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지혜로운 부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로 세움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