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김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잠언 21장 21-31절]
2013년 12월을 맞이해서 이 한 해를 뒤돌아보는 가운데 얼마 전 새벽기도회 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절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 나름대로 이 한해를 이렇게 결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한해를 헛되게 하였다(실패하였다).’ 한국어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와 동역자가 그 교회에 방문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실패하지 않았다’(was not a failure)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한 해를 뒤돌아 볼 때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 수 없이 패배한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이 한 해를 실패했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나는 영적 싸움에서 이렇게 패배한 것인가 생각해 보는 가운데 오늘 본문 잠언 21장 31절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3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이김은 여호와께 있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무엇이고,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고 계시는지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무엇인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한 4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교만함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4절을 보십시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노라 하는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넘치는 교만으로” 행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이러한 자를 가리켜 오늘 본문 잠언 21장 24절에서 성경은 “망령된 자”(Mocker)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망령된 자는 “무례하고 교만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례하고 교만한 자는 우리가 이미 21장 11절에서 묵상한 “거만한 자”로서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15:12)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입니다(29:1).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책망하는 자를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9:8). 이렇게 거만한 자, 망령된 자는 책망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넘치는 교만으로 행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 마음에 교만함이 있어서 계속해서 넘치는 교만으로 주님을 일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범하고 있는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요 심지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마음에 넘치는 교만함으로 그 일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가 주님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겠습니까? 물론 입술로는 우리는 주님을 자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하고 우리 자신을 내세우며 사람들의 모든 칭찬과 인정과 존중을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처럼 될 가망이 많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념비를 세우고(삼상 15:12)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도 죄를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사무엘 선지자에게 자기를 자기의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높여달라고 청했습니다(30절). 만일 우리 마음이 사울처럼 교만하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행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기념비를 세울 뿐만 아니라 교회 식구들 앞에서도 자기 자신이 높임 받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여러분, 계속해서 넘치는 교만으로 주님의 일을 행하는 무례하고 교만한 자, 즉 망령된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한 자의 특징은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Walvoord). 다시 말하면, 무례하고 교만한 망령된 자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형제, 자매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그래도 낫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심하게 얘기한다면, 만일 우리 마음에 교만함이 있다면 우리는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바리새인처럼 하나님께 ‘저는 저 사람과 같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18:10-11).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한 교회 안에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그래도 나는 비교적으로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을 가지고 성도들을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면서 심지어 마음으로 비판하고 정죄까지 한다면 그 교회의 공동체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또한 계속해서 넘치는 교만으로 주님을 행하는 무례하고 교만한 자의 특징은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훈계나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않고(잠 13:1)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합니다(13절). 그리고 교만한 자는 스스로 높은체하고(12:9) 또한 스스로 부한 체 합니다(13:7). 이러한 자가 교회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 잠언 22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교회 안에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거만한 자, 교만한 자를 쫓아내면 교회 안에서 다툼과 싸움과 수욕이 그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왜 교회 안에서 다투고 싸우며 수욕이 있습니까? 교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영적 우월감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다툼과 싸움과 수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영적 우월감이 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교만함이 들지 않도록 교만함과 싸워야 합니다. 싸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만함과 싸워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는 바로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이 말씀으로 교만함과 싸울 때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수 없이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1) 지금 나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나는 내 입술로는 주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말하면서 내 마음으로는 내 야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지금 나는 내 입술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으로는 내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지금 나는 주님의 일을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지금 나는 나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입술로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혹시 마음으로는 그 형제, 자매를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 우리는 교만함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 16:5).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교만함의 결과는 패망이요 멸망입니다(18절; 18:12).
둘째로, 우리는 게으름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5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이미 잠언을 묵상해 오면서 게으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만 재물을 원합니다(13:4). (2) 게으른 자는 불의의 이를 탐합니다(12:12). (3) 게으른 자는 불의의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남은 것을 약탈합니다(12절). (4) 게으른 자는 아무 가치도 없고 헛된 방탕한 것을 좇습니다(13:11). (5) 게으른 자는 큰 낭비자(a great waster)입니다(18:9). (6) 그 결과 성경은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4). 오늘 본문 잠언 21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게으른 자의 간절한 소망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여러분, 게으른 자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놀고먹는 것이 아닌가요? 오늘 본문 잠언 21장 25절 하반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게으른 자는 놀고먹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가운데서도 종일토록 탐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26절). 즉, 게으른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하긴 싫어하면서 마음으로는 재물을 원하고(13:4) 불의의 이를 탐하기만 한다(12:12)는 것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는 싫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는 것이 좀 웃기지 않습니까? 빈둥거리면서 일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으로는 재물을 원하고 불의의 이를 탐하기만 하니 이 얼마나 웃깁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귀는 게으른 자의 마음속에 깃든다. 탐식과 정욕은 게으른 자의 마음속에서 더 강하게 움직인다. 그 이유는, 그는 그의 정신과 정력을 노동에 기울여 붓지 않고 쾌락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박윤선). 여러분, 탐심과 정욕이 게으른 자의 마음속에서 더 강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게으른 자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면서도 자기의 머리는 부지런히 돌립니다.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은 꾀를 많이 부린다는 말입니다(15:19). 그러면서 그는 게을러서 땀을 흘리면서 일하며 수고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쾌락에만 집중하면서 자기의 정신과 정력을 노동에 기울여 붓지 않습니다. 그 결말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 결말이 자기를 죽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25).
여러분, 우리가 게으름과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1) 게으름과 싸우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마음에 탐심과 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게으름의 근본 문제는 자기 손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마음의 탐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에 탐심과 어떻게 싸워 이겨 나아가야 합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빌 4:11-12). 우리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한분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스며드는 탐심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탐심과 싸워 이기기 위해선 오늘 본문 잠언 21장 26절 하반절 말씀에 나오는 의인처럼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의 탐심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가 게으름과 싸우기 위해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3장 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정에서 우리 자녀가 일하기 싫어하면서 집 안에서 빈둥거리면서 게으른 삶을 사는 것을 볼 때 밥 먹지 말게 합니까? 사도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는 “게으르게 행하며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1절). 그러한 자들에게 바울은 뭐라고 명하고 권했나하면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절)고 하였습니다.
(3) 우리는 게으름과 싸우기 위해선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잠 6:6).
개미는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여 일합니다(7절). 또한 개미는 서로 사려가 깊고, 상부상조하며 크기에 따라 전문 직종을 나눕니다. 그리고 개미는 추수하는 계절인 무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을 위하여 먹을 것은 예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미에게로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8절).
셋째로, 우리는 악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7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여러분, 이번에 북한 장성택씨 숙청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새로운 사자성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자성어는 바로 그의 숙청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고 하여 주목하여 들어보았습니다. 그 사자성어는 바로 “양봉음위”(陽奉陰違) 입니다. 여기서 양봉음위란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마음속으로 배반함'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1장 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인이 어느 면으로 보면 양봉음위를 일삼는 자입니다. 그 악인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악을 마음속에 그래도 품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자입니다. 즉, 양봉음위를 일삼는 악인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속으로는 악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를 가리켜 박윤선 박사님은 “겉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이니, 일종 아첨이다”라고 말했습니다(박윤선). 이렇게 아첨하는 식으로 겉과 속이 다르게 하나님께 받쳐지는 악인의 제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1:27). 그런데 “하물며 악한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겠습니까? 계획적으로 자기의 악을 성취하기 위하여 제사 행위를 취하는 악인의 제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고 가증한 것입니다(박윤선).
여러분, 바로 이사야 선지자 시대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리했습니다. 그들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을 받치면서(사 1:11)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11절), “…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절), “…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2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3절),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13절),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내 마음이 …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4절).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가증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했습니다(렘 6:10). 분명히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욕이 아니었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귀가 이 세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종의 깨우치는 말씀을 듣지 않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17절). 그리고 그들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7:13). 아예 그들은 하나님께서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13절).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탐욕을 부리며 거짓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들은(6:13) 평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평강하다 평강하다”라는 말(14절) 듣기를 속히 하고 또한 즐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한 것입니다(7:8). 그리고 그들은 거짓 신들을 좇았습니다(9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6:19) 하나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7:28).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가라”(6:16)고 명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16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15절).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습니다(15절).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7:2) 하나님의 집(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We are safe)라고 말하였습니다(10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까지 많은 죄를 범하다가 몇 가지 의식을 거행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은 것으로 스스로 간주하고 위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세상으로 나가서 다시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한 것입니다(10절).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계속해서 행하고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외식적인 종교 예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19절) 악한 행동입니까?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6:15). 이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악을 마음속에 그래도 품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히 여기시는 아첨하는 식으로 겉과 속이 다르게 하나님께 제물을 받쳤습니다. 그들은 계획적으로 자기의 악을 성취하기 위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러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아니 됩니다. 매 주일 주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으로는 죄악을 품으면서 겉으로는 예배를 그저 일주일 동안 범한 죄를 위안 삼고자 예배를 드려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고 정직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8절을 보십시오: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6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일곱 가지 죄악 중에 하나가 바로 “거짓된 혀”임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워하는 상대방을 해하려고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내 뱉는 망령된 증인, 그 거짓된 증인의 거짓된 입술을 미워하십니다(12:22). 이러한 거짓 증인은 궤휼한 입을 벌립니다(6:12). 즉, 그는 자기의 구부러진 입으로 거짓과 속이는 말을 합니다(12:17). 그는 진실 된 말도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거짓을 그의 입에서 내뱉습니다(참고: 19:28). 특히 사업에 있어서 구부러진 입으로 거짓과 속이는 말을 하는 자는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읍니다(21:6). 그래서 처음엔 재물을 많이 모아 형통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입니다(6절). 그리고 거짓된 혀는 인간관계에서도 “미움”이 개입 되어 있습니다. 잠언 26장 28절을 보십시오: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거짓된 혀로 상처 입힌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을 미워하기에 거짓말 하는 자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며 해하려고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꾸며서 증거 하는 것이 자기의 영업이다. 그는 이렇게 양심에 화인 맞은 것 같이(딤전 4:2) 자기의 거짓말에 대하여 가책을 못 느낀다. 그는 거짓말 하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셈이다”(박윤선). 우리가 거짓말을 하면서 양심이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 하는데 결코 즐거움을 느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거짓 증인은 패망한다는 사실입니다(잠 21:28). 잠언 19장 5절을 보십시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참고:9절).
여러분, 우리는 진리를 듣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8절 하반절을 보면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남의 말을 유심히 듣데 증거가 확실한 진리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박윤선).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유심히 듣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할 때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유심히 들을 때 진리의 말씀에 견고히 서서 거짓을 분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짓의 아버지인 사단의 유혹에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된(진실 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잠 14:25).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주님의 참된 신실한 증인이 돼야 합니다(12:17, 14:5). 잠언 12장 19절을 보십시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참된 지혜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더욱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지혜로워 지면 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더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는 말씀 인격화 되어가는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이 헛된 세상에 들어내는 살아갈 것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참된 증인입니다. 그리고 참된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이러한 참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고 계시는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공의와 인자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1절을 보십시오: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여기서 “공의”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올바로 행함을 가리키고, “인자”는 사람을 사랑함입니다(박윤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올바로 행하며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올바로 행하는 이웃 사랑하는 모습 중 하나는 바로 오늘 본문 잠언 21장 26절 하반절의 말씀인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올바로 행하지 않는 모습은 이웃의 것을 탐하는 것입니다(26절). 바로 방탕한 것을 따르는(12:11) 악인의 마음에는 이러한 탐심이 있어(12절) 종일토록 탐하기만 합니다(21:26). 우리는 이러한 죄악 된 옛 본능과 싸워 이기기 위해선 주님의 명령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올바로 행하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되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올바로 행하시되 이웃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도 십자가에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1:21).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2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여러분 생각엔 전쟁에 있어서 “지혜”가 낫습니까 아니면 “힘”이 더 낫습니까? 전도서 9장 1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 전도서 7장 19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지혜가 힘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지혜는 지혜로운 자에게 10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 있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2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 전쟁을 하여 적군 용사들이 의지하고 믿는 견고한 성의 방벽을 허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힘보다 지혜에 있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무엘하 20장에 나오는 한 지혜로운 여인이 생각났습니다. 사무엘하 20장 16절을 보십시오: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이 말씀의 배경 이야기는 요압 장군이 다윗 왕을 대적하고 있었던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인 세바라 하는 자를(21절) 치러 벧아마가 아벨에(14절) 있는 성읍에 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 요압은 모든 백성과 함께 그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였을 때(15절) 그 성읍에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성벽에서 요압에게 내어던지므로(21-22절) 결국 그 성읍을 요압의 손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지혜롭게 행하므로 성읍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힘으로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주님께서 우리는 이 세상에 파송하셨는데 이 세상에는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거짓 선지자들이 많습니다(7: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이 세상이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16).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명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기 위해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여기서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한 2가지 흥미로운 해석이 있어 나눔니다:
(1) 첫째 해석:
“뱀이라는 내용은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어감이 매우 부정적입니다. 느낌도 좋지 않고 창세기 3장 1절을 보면 뱀은 교활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뱀은 교활할 뿐 아니라 또한 지혜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들은 뱀을 그들의 상용 문자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주님께서 뱀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은 무엇보다 뱀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조심성 있게 대처하여서 그 어려움을 모면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동물 중에서도 자기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가장 잘 파악하고 신속하게 기술적으로 회피하는 동물이 뱀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빨리 예견하여 회피하는 능력을 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제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의 이와 같은 위협과 그리고 협박에 대하여서 지혜와 분별력과 경계심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누가 해코지를 하거나 해를 끼칠 것을 미리 알아차려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 그리고 교회를 해하려는 무리로 말미암아 결코 해를 당하지 않는 지혜로움의 힘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신중한 분별력을 말씀합니다. 뱀의 지혜로움은 모든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뱀과 같은 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닥칠 것을 생각하여 화를 자처하지 않고 지혜를 발휘하여 갈 곳까지 가고 행할 것을 행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인터넷).
(2) 둘째 해석: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여러 고을로 보낼 때 하신 말씀이 바로“뱀같이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 말씀은 한마디로‘지혜롭게 말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볼 때 뱀은‘지혜’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갈라진 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짐승들은 혀가 하나인데 뱀은 두 개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혀’라는 신체 기관은 말을 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으므로 혀가 하나보다는 둘인 것이 훨씬 더 말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롭다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토라를 인용해서 지혜롭게 말을 잘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죽이는 독과 같은 말이었던 것과 비교해서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말은 생명을 담은 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로 말하는 뱀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살리는 뱀으로서 말을 지혜롭게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복음이었습니다(인터넷).
두 해석이 다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왠지 저는 두 번째 해석이 좀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영적 전쟁을 승리해야 합니다. 이김은 주님께 있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3절을 보십시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이미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잠언 13장 3절에서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을 지키되 우리 입술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되 우리는 습관적으로 거짓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의 입술이 궤사하여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궤사한 입술로 말미암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5절).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길도 험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3절). 여러분, 우리가 조금 전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을 생각해 보았는데 그 두 번째 해석 중 우리 입술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좀 더 추가 설명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인터넷).
(1) 첫째 추가 설명은 바로 창세기 3장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
여기서 ‘간교’하다라는 히브리어적인 표현[아루브(arub)]은 사울이 다윗을 쫓을 때 교묘하게 잘 숨는다는 표현에서도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3장 2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arub)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하는 행동이나 말 또는 생각하는 모든 면에 있어서 지혜로운 것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것이 하와를 설득하는 뱀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결국 뱀이라는 이미지는 다른 사람을 말로써 꼬이고 현혹하는 이미지로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이 뱀은 다시 요한계시록에서도 나타나는데 역시‘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을 보십시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개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들짐승들 가운데 뱀이 가장 말 잘하는 지혜로운 짐승이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추가 설명은 바로 마태복음 3장 7절과 23장 33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7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절).
세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 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근본적인 성격이 들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또 토라를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진정한 율법을 따라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사람을 멸망과 파멸에 이르러 죽게 만드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잘해서 지혜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그런 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간교한 말로 꼬여 결국은 죽게 만든 뱀이 했던 것과 같은 간교한 말이며, 그 간교함을 통해 결국 아담과 하와가 사망에 이른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 잘하는 것이 에덴동산의 뱀과 동일하다는 표현입니다.
이 두 가지 추가 설명을 나누는 이유는 오늘 본문 잠언 21장 23절에서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처럼 말로서 다른 사람을 현혹하고 꼬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과 또한 마태복음 3장 7절과 23장 33절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말만 잘하면서 그 말 안에 죽이는 독이 가득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잠언 12장 13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성경은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이렇게 그물에 걸리는 입술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또한 잠언 14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미련한 자”처럼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은 진리를 말해야 하며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하고 신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제가 서론에서 잠시 나눴지만 금년 2013년 한 해를 뒤돌아 볼 때 ‘나는 이 한해를 실패하였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날 새벽기도회 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절 말씀을 묵상하는데 이러한 생각 속에서 오히려 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록 나는 이 한 해를 실패하고 헛되게 하였지만 나의 언약의 하나님,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금년 한해도 나의 실패를 통해서 성공케 하셨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록 저는 제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싸워 번번이 지고 또 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림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쁘신 하나님은 온전하고 기쁘고 선한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 잠언 21장 21-31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제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영적 전쟁 4가지와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고 계시는지 3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만, 게으름, 악 그리고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싸우되 우리는 공의와 인자를 행하며, 지혜롭게 행하며 또한 입을 지키라는 주님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 교훈을 받아 영적 싸움을 하되 이김은 주님께 있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영적 싸움에 임하므로 승리케 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