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
[잠언 21장 9-20절]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 식구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견고히 서가는 말씀 중심된 그리스도인으로 세움을 받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 기원을 사도행전 17장 11절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이 ‘신사적 그리스도인’으로 세움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개혁한글),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현대인성경). 여기서 “신사적”이란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주로 “신사적”이란 자세와 태도를 말합니다. 남을 존중하고, 온유하게 정직하게 예절을 지키며 대하는 인격의 모습입니다. 그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좋은 가문에서 출생했다는 것입니다(유상섭), 즉 귀족 출신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17장 11절 말씀에서 “신사적”이란 말의 의미는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그러면 ‘고상한 심령’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열심을 다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태도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 이였다는 말씀은 그들은 열심을 다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이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신사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11절). 여기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씀은 “모든 열심으로”(박윤선) 혹은 “모든 자원함으로”(유상섭)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유상섭).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베뢰아 사람들은 전적으로 자원하는 의지를 가지고 복음의 말씀을 수용했습니다(유상섭).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뿌리가 시냇가에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듯이 신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용력이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를 꽉 누른 후 물통에 넣으면 물을 빨아들이듯이 신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수용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마치 스펀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이 쏙쏙 귀에 그리고 마음에 잘 들어오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지혜로운 자는 교훈을 받으므로 지식이 더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란 제목 아래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더하는 지식이 무엇인지 한 5 가지로 생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더하는 지식은 다툼보다 화목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9절과 19절을 보십시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큰 집에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작은 집에서 살고 싶으십니까? 작은 집은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큰 집은 여러모로 편안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아마도 다 큰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큰 집에서 살면서 편안함이 있지만 부부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고 당신의 배우자와 자주 다투는 반면에 작은 집에서 살면서 불편함이 있지만 부부 관계가 화목하다면 여러분은 다툼이 있는 큰 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작은 집에서 살지만 부부관계의 화목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이나 저나 다 “큰 집”보다 “화목”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큰 집보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말씀들 중 “화목한 가정”이란 제목 아래 잠언 17장 1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툼을 멀리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는지 한 4가지로 교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복습을 하면 이렇습니다: (1) 화목한 가정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거듭 말해서는 아니 된다고 배웠습니다(9절). (2) 화목한 가정은 서로의 충고를 받습니다.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의 충고를 겸허히 들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10절). (3) 화목한 가정은 악으로 선을 갚지 않습니다.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우리는 선으로 선을 갚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13절). (4) 화목한 가정은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칩니다.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우리는 다투기 시작하기 전에 시비를 그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14절). 다시 이 4가지 교훈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각자 가정, 특히 부부 관계에 적용해 볼 때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잘 덮어 주고 있습니까? 서로의 충고를 받고 있습니까? 선으로 선을 갚고 있습니까? 다투기 전에 시비를 그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1장 9절을 보면 성경은 “다투는 여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19절에 가서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투는 원인이 분노는 참지 못하고 성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냐면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5장 18절을 보면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but a patient man calms a quarrel)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여러분, 부부 관계에 있어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분노를 쉽게 내면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분노하면 과격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1절). 그래서 “다투는 여인”이나 “다투며 성내는 여인”에 대해서 묵상할 때 잠언 19장 13절을 보면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a quarrelsome wife is like a constant dripping)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 27:15). 무슨 말입니까? 남편과 다투는 습성이 있는 아내는 평안한 날이 별로 없을 만큼 자주 남편과 다투고, 또 다툼이 시작되면 그녀는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말을 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렇게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다투며 성내는 아내가 계속에서 분노 가운데서 말을 쏟아낸다면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여러분,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21장 9절 19절에서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이나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큰 집에 편안하게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 다투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움막이라도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게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받은 교훈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는 다투기보다 화목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고후 5:18). 우리 모두가 가정에서부터 교회나 어디로 가든지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더하는 지식은 악인의 마음은 악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0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악인의 마음은 어떠하다고 말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2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인의 마음은 방탕한 것을 따르기 때문입니다(11절). 여기서 방탕을 따르는 악인의 마음에는 탐심이 있고 그 탐심은 공상과 아무 가치가 없는 헛된 것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불의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남의 것을 약탈합니다. 그의 생각은 비뚤어져 있어서(8절) 자기의 손을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11절) 남의 것을 약탈할 생각만 합니다. 또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3장 2절을 보면 성경은 악인의 마음은 궤사하다(craving for violence)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악인의 마음은 불성실하여 강포를 갈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강포를 갈망하는 악인은 강포한 짓을 할 뿐만 아니라 입술도 궤사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0절을 보면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악인의 마음을 악을 갈망(crave)한다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원어 히브리어를 더 잘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악인의 마음이 악을 갈망한다는 것은 거의 악에 중독되었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Walvoord). 그래서 잠언 4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악인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악에 중독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악인은 이렇게까지 악을 행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전도서 8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악인이 악에 중독되다시피 하여 악을 갈망하고 악을 행하는 이유는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악을 행하는데 담대한가 하면 악인의 마음은 이웃의 재앙을 원하데 결코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고 오늘 본문 잠언 21장 10절 하반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 잠언 21장 12절을 보면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는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을 환난에 던지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시사 그들로 하여금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14:11).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21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악인으로 하여금 의인의 속전이 되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악인이 의인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박윤선). 그 한 예가 바로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이라는 악인이 의인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그 자신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에 6:1-7:10).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죽이려고 각양 모략을 꾸미는 것은 너무 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기에 간섭하셔서 심판하신다”(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마음처럼 악을 갈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된 자들로서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여기서 의를 갈망한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로서(롬4:25)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잠 21:10).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처럼 우리 이웃을 우리 몸 같이 사랑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셋째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더하는 지식은 징벌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1절을 보십시오: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 경계할 것들 중에 오늘 본문 잠언 21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툼’과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을 갈망하는 것’ 외에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만함’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 마음이 거만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거만해지면 하나님을 업신여길 정도로 오만해 지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잠언 29장 1절을 보십시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우리 마음이 거만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우리는 사랑의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책망을 받지 않되 어느 누구의 책망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책망도 우리는 받지 않습니다. 잠언 15장 12절 말씀처럼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9장 8절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8).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는 우리의 죄를 뉘우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거만해지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까지 오게 되면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1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때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the simple)란 마음이 개방된 자로서 진리를 잘 알지 못하여 거만한 자를 따르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바른 지도를 받으면 바로 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박윤선). 문제는 이러한 자들은 진리를 잘 알지 못하기에 지혜로운 판단력이 부족합니다(lack judgment)(7:7; 9:4, 16). 그러므로 그들은 “온갖 말을 믿”음으로 자기의 행동을 삼가하지 못합니다(14:15). 그 결과 어리석은 자들은 “미련한 여인”이 유혹할 때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범죄를 합니다(9:4, 16).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은 재앙을 보면서도 숨어 피하지 않고 오히려 나가다가 해를 받습니다(22:3; 27:12).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자기들이 따르던 거만한 자가 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지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잠언 21장 11절과 비슷한 말씀이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9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이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세 종류의 사람을 오늘 본문 잠언 21장 11절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 종류의 사람들이란 거만한 자와 어리석은 자와 그리고 지혜로운 자입니다. 거만한 자는 매를 맞아도, 즉 벌을 받아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해서 목을 곧게 합니다. 그 이유는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4:6). 그 결과 거만한 자는 결국에 가서는 패망을 당할 것입니다(29:1). 그 거만한 자를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적어도 그 패망 당하는 거만한 자의 모습을 보고 지혜(바른 분별력)를 얻어 더 이상 거만한 자를 따르지 않고 돌이켜 바른 길로 걸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그 거만한 자의 패망을 통하여 교훈을 받을 뿐만 아니라(21:11) 견책도 받으므로(19:25) 지혜를 얻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생각에는 과연 지혜로운 자는 어떠한 지혜를 얻는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엔 지혜로운 자가 얻는 지혜는 바로 죄를 지었을 때, 견책을 받았을 때 회개하는 지혜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죄 때문에 나단 선지자에게 견책을 받았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진심으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이러한 회개할 수 있는 지혜가 바로 지혜로운 자에게 더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여러분, 이러한 지혜를 사모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다윗처럼 회개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여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지혜 외에 또 다른 지혜는 오늘 본문 잠언 21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여기서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는 말씀은 미련한 자는 자기 집에 있는 귀한 보배와 기름과 같은 모든 것들을 낭비한다는 말입니다. 낭비하되 미련한 자는 자기의 사치스러운 삶으로 자기의 모든 것들을 낭비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주님을 위하여 물질을 저축합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는 물질을 아낌없이 바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그것을 낭비하지 않습니다(박윤선). 이러한 지혜로운 자의 모습을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잠언 6장 6-8절에서 “개미”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절)고 말하면서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8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로운 자는 개미처럼 추수 때에 부지런히 일을 하여 예비하고 물질을 저축해 놓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습니다(21:20).
여러분, 성경 잠언 9장 9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는 교훈을 받으면 그는 더욱 지혜로워 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the simple), 즉 마음이 개방된 자로서 진리를 잘 알지 못하여 거만한 자를 따르는 자도 거만한 자가 징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지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21:11). 지혜를 얻되 그는 회개의 지혜를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개미의 지혜도 얻어 죄에서 돌이켜 바른 길로 걸어가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예비하여 물질을 지혜롭게 잘 저축해 놓습니다. 이러한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길 기원합니다.
넷째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더하는 지식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즐거움이다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5절을 보십시오: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1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악인은 정의(공의) 행하기를 거절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악인은 정의 행하기를 거절하며 싫어합니까? 그 이유를 잠언 19장 28절 하반절 말씀은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즉, 악인의 입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로 죄를 추구하기에 악인은 결코 정의를 좋아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악인은 정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를 죄를 추구하는 악인이 과연 정의(justice)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죄를 추구하는 악인의 욕구를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바로 불의(injustice)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잠언 21장 15절 말씀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이렇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패망이니라”(박윤선). 지금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공의를 행하는 자들’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조 가운데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잠언 21장 7절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냐면 불의한 자들은 정의를 행하기를 싫어하기에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불의한 자들이 정의 행하기를 싫어하고 거절하는가 하면 그들은 의를 행하는 것이 마치 멸망(“패망”)으로 빠지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있습니다(박윤선). 일리가 있는 말이 아닙니까? 불의한 자들이 의를 행하는 것이 마치 멸망으로 빠지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있다는 말이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불의한 자들의 괴로움은 정의(공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불의한 자들의 즐거움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잠언 10장 23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그와 반대로 의로운 자들, 즉 의인들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움입니다(21:15). 그리고 의인들에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즐거움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괴로움이 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의 즐거움이 정의(공의)를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정의(공의)를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21: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여기시는 정의 행하기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정의(공의)는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네 번째 복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다시 말하면, 먼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되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즉, 우리는 우리 인간의 노력인 행함으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근거로 한 이 하나님의 의를 사모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인들의 대신하여 자기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는 만족함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의(공의)는 바로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대하 15장에 나오는 유다 왕 아사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14:2-5). 여러분 아사 왕은 누구입니까? 아사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한(6절) 그 환난 때에(15:4) 이사랴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서(8절)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게 하였습니다(14:2-5). 어느 정도로 아사 왕이 유다 백성들로 하나님을 찾게 하였는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15:13) 하나님께 맹세했습니다(14절). 그들이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15절). 결국 유다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14:5). 하나님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었던 것입니다(6절). 이렇게 아사 왕 시대에 그의 땅이 10년 동안 평안했습니다(1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평안하려면, 그리고 이 사회와 교회와 가정이 평안하려면 우리는 아사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간절히 찾되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에 죄악된 것들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이렇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더하는 지식은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과 연락을 좋아하는 자의 결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6-17절을 보십시오: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선택의 결말을 좀 알게 되면 어떠한 선택을 하겠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TV 광고에서 담배를 계속해서 피면 어떻게 되는지 실제로 전에 담배 피던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목 쪽에 구멍이 난 사람도 나오는 등 그러한 광고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그 광고를 여러 번 보면서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광고를 TV에서 내보낼까 라는 생각도 든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 TV광고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즉, 담배 피던 사람들이 그런 광고를 보고 담배 피던 습관을 끊는다고 합니다. 어느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2012년 3월에 그러한 광고를 TV로 낸 후 한 3개월 만에 약 200,000 담배피던 사람들이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이정도로 그 TV 광고들이 효과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3개월 만에 이십만 명이나 담배를 끊은 것을 보면 가치가 있는 광고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6-17절을 보면 성경은 두 종류의 사람들의 결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16절). 이들은 의도적으로 명철의 길, 즉 지혜의 길에 등을 돌려서 떠난 사람들입니다(Walvoord). 박윤선 박사님은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난 배교자”들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그들은 의도적으로 경건한 삶의 길을 떠났으므로 그 결말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의 결말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연락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17절). 이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즉, 이들은 쾌락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게 애착하여 떨어질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박윤선). 쉽게 이해하자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연락을 좋아하는 자들은 세상 쾌락에 중독된 자들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결말은 결코 부하게 되지 못하고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디모데후서 3장 4절을 보면 성경은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lovers of pleasure rather than lovers of God)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그러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궁핍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잠언 28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 경건한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세상 쾌락을 좇으며 방탕을 따를 때에 우리는 궁핍함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경계를 받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훈계를 저버리므로 궁핍(poverty)과 수욕(shame)에 이른다고 성경 잠언 13장 1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열심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행 17:11).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 교훈을 부지런히 받아 지식을 더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잠 21:11). 결코 우리는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19:27). 오늘 우리는 교훈을 받는 지혜로운 자들은 어떠한 지식을 얻는지 한 다섯 가지로 배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더하는 지식은 다툼보다 화목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더하는 지식은 악인의 마음은 악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이 더하는 지식은 징벌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이 더하는 지식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그들이 더하는 지식은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과 연락을 좋아하는 자의 결말은 사망이요 궁핍해 진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교훈을 받은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러한 지식들이 더욱더 충만해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