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

 

 

[잠언 211-4]

 

 

여러분, 잠언 15장 1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비춰볼 때 여러분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즐거움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마음의 근심이 있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즐거움이 있으면 그 즐거움은 여러분에게 “양약”(good medicine)일 것입니다(17:22). 그러나 만일 여러분 마음에 근심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의 “뼈를 마르게” 할 것입니다(22절). 만일 우리 마음에 근심이 있다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15:13).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1장 1-4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대하여 한 4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1절을 보십시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여러분 생각하기엔 우리나라 대통령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은 비록 우리나라 대통령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21장 1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의 마음”이란 꼭 솔로몬 왕 자신 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서 “왕의 마음”이란 이스라엘 왕이 아닌 이방인 왕들의 마음도 가리킵니다. 그 말은 “왕의 마음”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왕들의 마음도 포함돼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왕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왕들의 마음을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한 예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솔로몬 왕의 마음만을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애굽 왕 바로의 마음도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0장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의 마음도 인도하시되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표징들을 그와 그의 신하들 중에 보이기 위해서였고 둘째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한 표징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손들의 귀에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다른 예는 에스라 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도 인도하시사 그로 하여금 모든 창고지에게 조소를 내려 에스라가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게 하였습니다(에 7:21).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이유를 에스라 7장 27-2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로 하여금 은혜를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으므로 그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하시사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인도하시되 오늘 본문 잠언 21장 1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로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방향을 트시듯이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33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19:21),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 이 말씀들을 보면 요점은 우리 사람들이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계획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선다는 것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왕이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부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한 경우는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왕상 11:4). 열왕기상 11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인도하신다고 오늘 본문 잠언 21장 1절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 말한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자기의 마음을 돌려 자기 부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것이었습니다(왕상 11:6). 이러한 솔로몬 왕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온전하지 못한 마음은 굽은 마음(perverse heart)입니다(잠 11:20).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는 솔로몬 왕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우리 마음대로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양보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여러분이 보기에 여러분의 행위가 모두 정직합니까? 여러분 보시기에 여러분의 행위가 모두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무엘의 이야기 중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가서(삼상 16:4) 하나님의 기름 부으실 자(6절)를 알아보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 중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하였을 때(6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절). 사무엘조차도 엘리압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사람의 외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무엘은 자기의 행위가 옮은 줄 알았지만 그 조차도 사람의 중심을 볼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실 자를 잘못 분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2절 하반절에서 성경은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6장 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 24장 12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무슨 뜻입니까?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통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동기 등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139편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아시되 성경은 주님께서는 우리를 밝히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도 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 인간은 미련하여 자기 행위를 바른 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2장 15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인간은 미련하여 어디까지나 자기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는 원인을 박윤선 목사님은 한 5가지로 말하였습니다(박윤선): (1) 자기의 과거의 죄악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며, (2) 장차 지을 죄를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 사람에게 대하여 잘못한 것은 막연하게라도 느끼지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4)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제일 큰 원인 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5) 그 마음이 거짓되어 자기의 잘못을 변호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우리 사람들의 죄는 우리가 사람을 속임 같이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욥 13:9). 그리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들의 생각엔 주님이 감찰치 아니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시 10:13). 그 이유는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4절).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창 16:13).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십니다(시 33:13). 하나님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십니다(욥 28:24). 하나님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잠 15:3).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감찰하십니다(시 130: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난을 감찰하십니다(애 1:9).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십니다(욥 34:21).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십니다(시 7: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살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까지도 드려다 보시고 다 아십니다(박윤선).

 

셋째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마음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3절을 보십시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여러분,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말 중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 기억나시죠? 분명히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라고 말하였습니다(22절).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때 드는 생각은 우리 또한 사울 왕처럼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좋아하시겠지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일 하나님께 정성껏 준비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 후 한 6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그러한 예배를 수 없이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더 기쁘시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3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쁘시게 여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그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솔로몬 왕은 기브온에 가서 큰 산당 그 제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었지만(왕상 3:4) 그가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일천 명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므로(11:3-4)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할 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1,000번의 예배를 드릴 때에 사단은 그의 1,000명의 종들로 하여금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1,000번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1번째 명령을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제사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중심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제물 그것이 아니고 그들의 종교 윤리적 순종입니다. 그 종교 윤리적 순종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 시대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을 받치면서(사 1:11)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11절), “…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절), “…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2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3절),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13절),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내 마음이 …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4절).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을 등한히 여기면서 제사하는 것은 범죄 생활에 안심을 주려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렘 7:8-10)(박윤선). 예레미야 7장 8-10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 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말하며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안전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10절).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한번 구원 받은 것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세상에 나가서 죄를 범하면서 매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와서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우리는 죄를 범해도 이미 구원 받았기에 안전하다 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바른 예배, 바른 삶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예배와 더불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본문 잠언 21장 3절에서 바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공의와 정의를 행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시 99:4). 그리고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106:3).

 

마지막 넷째로,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1장 4절을 보십시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여기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3가지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그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눈이 높은 것”(haughty eyes)입니다.

 

여기서 “눈이 높은 것”이란 “사람이 자기 정도보다 지나치는 것을 얻으려고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는 마음이 부허하여 자기가 벌써 그런 높은 존재인 듯이 자처하기까지 합니다(박윤선).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개역한글)(시131:1). 다윗은 자기 마음에 교만치 아니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는 자기의 눈이 높지 아니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일과 자기가 미치지 못한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믿음으로 행한답시고 모험 아닌 모험을 하는 것은 겉으로는 주님이 주신 비전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에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 표출 밖에 되지 않습니다.

 

(2) 마음이 교만한 것”(a proud heart)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교만한 것이란 참으로 더 무섭고 위험한 죄인 것은 마음속에 있는 교만은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잠재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은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박윤선). 여러분, 우리는 분수에 넘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분수에 넘치는 큰일에 힘쓰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너무 분수에 지나친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민 16:7).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0장 13, 15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분수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롬 12:6). 우리가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은 앞잡이”기 때문입니다(잠 16:18).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18:12).

 

(3) 악인의 형통한 것”(the lamp of the wicked)입니다.

 

악인들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가운데서 형통하게 되는 것만큼 위험한 죄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그리도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다면(시 73:5) 그들은 얼마나 더 눈이 높아지고 교만해 지겠습니까? 또한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고(7절)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고(12절) 힘이 강건하다면(4절) 그 악인들은 얼마나 더욱더 교만해지겠습니까? 그 악인들의 종말은(17절) 파멸(18절)이요 황폐와 전멸입니다(19절). 이렇게 악인의 형통함과 눈이 높은 것과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십니다(잠21:4).

 

여러분, 우리는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16:19).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우리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빌 2:3).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기 때문입니다(잠 15:33; 18:12).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3:34, 약 4:6, 벧전 5:5).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욥 22:29). 바라기는 우리 모두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빌 2:5).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