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바른 삶 (2)

 

 

 

[잠언 2019-25]

 

 

우리는 지난 이 주 동안 잠언 20장 13-18절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이란 제목 아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한 4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 네 가지란 바른 생활 방식, 바른 말, 바른 사랑 그리고 바른 경영에 대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생활 방식이란 부지런히 일을 하라는 교훈이었고(13절), 바른 말이란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는 교훈(14절)과 속이는 말(거짓)을 하지 말라는 교훈(17절), 그 대신 지혜로운 말을 하라는 교훈(15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바른 사랑이란 타인을 위하여 보증서는 것을 조심하되 이웃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교훈(16절)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바른 경영에 있어서는 의논함(advice)과 지략(guidance)가 필요하다는 교훈(18절)을 받되 특히 우리의 경영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오직 하나님의 경영이 우리의 경영을 통하여 이루어 져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잠언 20장 19-25절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바른 삶(2)”라는 제목 아래 우리가 그리그도인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5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바른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른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도 사람 사귐이 버거운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참 용납하기 힘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며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간관계란 참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직장 생활 하는 분들은 인간관계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어느 조사 결과에 의하면 직장의 어려움이 크게 2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일이 주는 어려움이고 또 하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일이 주는 어려움보다 두 배에 달한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 하면 저는 우리가 이미 잠언 3장 27-25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한 “지혜로운 자의 인관관계”를 다시금 복습하는 게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 때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한 3 가지 원리들을 배웠습니다:

 

(1)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첫 번째 원리는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3장 27-28절을 보십시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우리에게 베풀 힘이 있을 때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2)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두 번째 원리는 우리는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3장 29-30 절을 보십시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까닭 없이 시비 걸로,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면 아니 됩니다.

 

(3)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세 번째 원리는 우리는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3장 31절을 보십시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패역한 자를 미워하시고(32절), 저주하시며(33절), 비웃으시며(34절) 또한 부끄럽게 하실 것(35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9-22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에 대한 교훈은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9절을 보십시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여기서 ‘말을 많이 사람’이란 바로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인데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사람은 바로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되 특히 남의 비밀(confidential information)을 누설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영어 성경에는 “두루 한담하는 자”를 “gossiper” 즉 수다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수다쟁이와 어울리지 말고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쟁이와 어울리지 말고 피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그러한 사람은 남의 비밀을 누설하기 때문입니다(19절, 11:13). 다시 말하면, 우리가 수다쟁이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사람은 신뢰를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외에도 잠언을 읽다 보면 수다쟁이를 왜 피해야 하는지 또 다른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수다쟁이는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잠언 26장 20절을 보십시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또 다른 이유는 수다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28절을 보십시오: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여러분, 여러분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수다쟁이는 다툼을 일으키고 친한 친구를 이간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 어디 친한 친구만 이간시키겠습니까? 형제도, 자매도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부관계도 다투게 만들고 이간시킵니다. 어떻게 수다쟁이는 이렇게 사람들을 이간시킵니까? 바로 거짓 증언하므로 수다쟁이는 사람들을 이간시킬 수가 있습니다. 잠언 6장 19절을 보십시오: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을 저주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0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이 말씀을 들을 혹이 여러분 마음에 아니 어느 자식이 부모님을 저주할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 “저주”란 단어를 원어 히브리어로 보면 “저주”라는 의미 외에도 ‘하잖게 만드는’(경시하는, 과소평가하는)(belittle)이란 의미도 있습니다(Vine). 그 말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란 말씀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잖게 만드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번역하면 이젠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부모님을 저주하는 자식은 좀 없을 수 있을지라도 부모님을 하잖게 만드는 자식들은 있지 않습니까? 부모님을 경시하는 자식들, 부모님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업신여기는 자식들, 부모님을 얕보고 과소평가하는 자녀들이 많지 않습니까? 신약 성경 마태복음 15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영어 성경에는 부모님을 ‘curses’(저주)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한국어 성경에는 부모님을 “비방”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부모님을 저주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비방하는 것, 부모님을 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부모님을 저주하던지 하잖게 만드는 자는 십계명 중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출 20:12). 그 위반에 대한 형벌을 출애굽기 21장 17절에서 이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참고: 레20:9). 어느 주석에서는 이 말씀을 부모님을 “저주”(cursing)하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부모님에게 ‘반항하는(rebelling against) 자도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Walvoord). 오늘 본문 잠언 20장 20절 하반절에서도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는 말씀도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Walvoord).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그 분들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는 그분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을 하잖게 여기지 말고 그 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부모님을 경시하며 과소평가하지 말고 그 분들을 공경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2절을 보십시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누군가 나에게 고통을 입혔으면 우리 사람의 심리는 내가 당한 고통에 대해 그 사람에게 갚아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pay back).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3)는 말씀보다 실제로 우리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43절)을 더 좋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수를 미워하데 우리는 구약 성경 신명기 19장 21절 말씀처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상대방에게 갚아주고 심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잠언 24장 29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또한 오늘 본문 잠언 20장 22절에서도 성경은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상대방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줬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그 상대방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뭔가 좀 달라야 하지 않나요? 그 달라야 할 점 중에 하나가 바로 악을 갚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잠 20:22). 여기서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로마서 12장 19절을 봐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즉, 우리가 친히 악을 갚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원수 갚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갚아 주실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신명기 32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입니다. 나훔 1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복 때에(렘 51:6) 우리를 위해 보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복수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바른 상속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상속”이란 무엇입니까? 인터넷 위키 백과를 보니까 “상속이란 사람의 사망에 의한 재산 및 신분상의 지위의 포괄적인 승계를 말한다”라고 말하면서 “상속의 중심은 재산상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0장 21절을 보십시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한국 성경에는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이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산업”이란 영어로 “inheritance”, 즉 “상속”(또는 유산)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상속을 “처음에 속히 잡”았다는 말은 아마도 자식이 자기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Walvoord). 그 좋은 예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 11-20절에 나와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절). 그래서 아버지가 자신의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12절). 그 나눠준 재산을 받았을 때 그 둘째 아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같으면 부모님의 재산 중 여러분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물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13절). 결국 그 둘째 아들은 오늘 본문 잠언 20장 21절 하반절 말씀처럼 결국에는 그 상속(유산) 그에게는 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을 보면 그는 오늘 본문 21절을 20절과 연관을 시켜서 해석을 하셨는데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를 가리켜 “불량자”라고 말하면서 20절과 21절은 그 불량자가 재산 문제로 그 부모를 거스려 거역함에 대하여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불량자들은 주로 금전 문제로 가정에서 분쟁을 일으키되 자기들 책임 이행은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권리만 강요하여 부모님과 충돌하며 심지어 악담과 저주도 사용한다고 말했습니다(박윤선).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자녀들이 부모님의 유산 분배로 인하여 분쟁하는 모습이 참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 마 전 한국 뉴스에 한국에 큰 기업들 회장들이 그리 재산이 많으면서도 부모님에게 받은 상속(유산) 문제로 분쟁하는 모습을 보고 참 본이 못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0장 21절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한국어 성경에는 “처음에”란 단어만 나오지만 영어 성경으로 보면 “at the beginning”(“처음에”)라는 단어와 더불어 “at the end”(나중에)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결국 부모님에게 재산을 미리 물려받을 때 처음에는 물질의 복을 받은 것 같아 행복해 할 수 있겠지만 나중엔 그 유산이 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제 생각을 말한다면 나중엔 그 물려받은 재산으로 인하여 형제들끼리 분쟁하므로 형제 관계도 단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22일) 인터넷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중 미국 경제전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가 20일 자신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한 거부 15명을 소개한 내용이 나와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이들을 가리켜 “상속을 거부한 거부”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 15명 중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이름들이 있는데 그 중 몇 사라만 언급한다면 워런 버핏,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아르,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그리고 홍콩 액션 배우 재키 찬 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좌우명은 ‘물려받은 재산이 인간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석유 거물 피켄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돈을 벌고 기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 하지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이 보통 이롭기보다는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홍콩 액션 배우 재키 찬은 “아들에게 능력이 있다면 스스로 돈을 벌 것이고, 능력이 없다면 그저 내 돈을 낭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워런 버핏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자식들에게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길 만큼 재산을 주고 싶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녀에게 있는 유산(재산) 물려주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상속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때야 합니까? 사람들 보기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상속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상속관이란 무엇입니까? 과연 성경에서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상속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여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러분, “상속자”란 누구입니까? 유업을 이어 받는 자가 아닙니까? 그 뜻은 “하나님 나라의 재산상속권자”라는 뜻입니다(인터넷).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엡 3:6).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재산상속권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영생을 상속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19장 29절을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소망을 지닌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늘에 예비된 상속인 영광스러운 새 몸과 하늘의 처소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 빌립보서 3장 20-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장차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는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처소에 들어가(요 14:1-3)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생을 얻은 자들로서 장차 우리에게 상속될 영광의 몸과 영원한 하늘나라 처소를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4) 우리는 육신의 부모님에게 받은 상속보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지혜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잠언 19장 14절을 보십시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에게 받는 상속(집이나 재물)도 귀하지만 그 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께로 부터 말미암은 지혜로운 아내가 더 귀한 상속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아내라기보다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상속은 지혜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부모님에게 받는 집이나 재물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바른 사업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3절을 보십시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우리가 “저울”하면 이미 묵상한 잠언 16장 11절을 다시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여기서 “간칭”, “명칭”, “추돌들”은 다 “저울”(measures)을 가리킵니다. 저울을 가리키되 정확히 측량하는 저울을 가리킵니다. 즉, 이 저울은 “공평한” 저울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한결 같은 저울”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3절 외에도 10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한결 같지 않은 저울을 자기도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즉,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인 속이는 것을 자기도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정직하지 못한 것(부정직)(dishonesty)을 우리도 미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평한 추를 기뻐하시는 것처럼(11:1) 우리 또한 공평한 추를 기뻐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잠언 11장 1절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지만 아마도 솔로몬 왕 당시에 상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저울추를 사용함에 있어서 고객들의 눈을 속여 물건의 품질이나 중량이나 분량을 속여서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서 갈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상인들이 고객들을 속인 방법은 '이중 저울'과 '이중 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부정직한 상인들은 곡식을 팔 때에 가벼운 저울추와 작은되를 사용하여 곡식을 적게 주었고, 곡식을 살 때에는 무거운 저울추와 큰되를 사용하여 곡식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적용한다면 사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사업을 해야 하는지 귀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바른 사업관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바른 사업관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을 추구하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부정직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크리스천 상인들이 상업 행위에 있어서 부정직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업 행위를 다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불의한 이익을 얻고자 부정직하게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상업 행위에 있어서 정직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바른 사업관에 대해서 성경은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야고보서 4장 13-17절에 나와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 한 3가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선한 사업을 많이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을 보십시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예배)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만일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선을 행하면 언젠가는 낙심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을 보십시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시편 49편 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성경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자기들의 강한 것들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랑하되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자랑하되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3)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사업하여 이익을 남기고자 함에 있어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겠지만 항상 자신의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인 줄을 알고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는 마음 자세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15절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 마음 자세와 습관을 갖는다는 것 참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의도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노력 중에 하나는 저는 안개 낀 날 운전하면서 안개를 볼 때 나의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는 이 야고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러다 보면 저는 더욱더 죽음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리할 때 그리스도인 사업가들도 죽음의 관점을 가질 때 무슨 이익을 남겨야 하는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꼭 돈의 이익 외에도 좀 더 가치가 있고 영원한 것, 하나님께서 나의 사업을 통해서 어떠한 이익을 원하시는지를 기도하면서 고민해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4장 13-17절 외에도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꼭 알아야 할 성경구절은 신명기 8장 17-18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 .”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우리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재물을 얻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믿는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헛되이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롭게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바른 사업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바른 사업관이란 정직하게 사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선을 행해야 하며,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고 항상 자신의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인 줄을 알고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는 마음 자세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재물을 얻었을 때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이 재물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바른 미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4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계획을 세워서 목적을 향하여 추진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여러분 계획대로 안 된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그럴 때마다 주로 무슨 생각을 합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참 사람 일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내 마음도 내가 원하는 데로 잘 되지 않는데 우리가 미래를 계획하고 계획 한대로 이루고자 열심히 그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그게 어찌 우리 계획한(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어쩔 때는 내 계획대로 잘 될 때도 있겠지만 오히려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더 많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현대인 성경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일이 잘되어 갈 때는 기뻐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생각하라. 하나님은 행복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므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람은 할 수가 없다”란 부분을 공동번역 성경에는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이 잘되어 갈 때 기뻐하는 것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형통할 때 행복감을 누리므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실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선택하여 걸어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시 23:2, 4) 성경은 “생각하라” 혹은 “되돌아보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전 7:14).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곤고한 일, 어려움을 당할 때 과거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데 우리는 과거에 겪었던 어려운 일들을 생각하며 그 어려움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건져주셨는지 그 구원의 하나님의 은총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과거관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현재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도 동일하신 구원의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임을 믿게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고 건짐의 확신을 가지고 현재의 어려운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비록 아직 어려운 환경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 자신이 변하였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히 그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형통의 복(행복)만 주시지 않으시고 곤고한 일 또는 어려움도 당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전 7:14). 비록 우리가 볼 때에는 우리가 앞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알면 더 좋을 것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람은 우리의 장래를 알면 분명히 하나님께 더욱더 죄를 범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래를 알면 분명히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자기가 주인인양 마음대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게을러 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포기하면 될 때로 되라고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장래는 모르는 게 더 좋습니다. 축구 게임도 이미 다 끝나 점수를 알고 보면 재미가 없습니다. 아예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좀 모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장래를 몰라야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장래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사야 44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나와 같으냐? 나서서 말해 보아라. 누 가 처음에 장래의 일을 미리 들려주었느냐? 앞으로 될 일을 우리에게 말해 보아라”(공동번역). 여러분, 어느 누구 앞으로 될 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장래의 일을 미리 들려 줄 수 있겠습니까?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장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장래의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장래의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묵상한 잠언 16장 1절과 9절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는 이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이 하나님의 생각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주님 안에서 미래와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곤고할 때에도 우리는 미래와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미래와 희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음으로 소망하며 확신하면서 장차 그 주님 앞에 서서 회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 땅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히 13:8).

 

다섯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바른 헌신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5절을 보십시오: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 여러분, 서원 기도 하면 성경에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한나”하면 임신하지 못했던 여인으로서(5-6절)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11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린 한나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19절) 한나를 잉태케 하시사 사무엘이란 아들을 주셨습니다(20절). 그리고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아기 사무엘을 젖을 뗀 후에 그를 실로 여호와의 집에 데리고 가서(24절) 하나님께 그 아이를 평생 드렸습니다. 그녀가 엘리 제사장에게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26-28절). 한나란 여인은 자기의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받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헌신입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또 다른 헌신의 좋은 예는 신약 성경 예수님의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마리아라는 여인이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이야기입니다(요 12:3). 여기서 “마리아”란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림을 받은 나사로의 동생이요 또한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은 여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2장 4절부터 보면 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리했을 때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합니다(4-5절).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절). 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 마리아와 같은 헌신자가 있는가 하면 가룟 유다와 같은 도둑도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생각할 때 바른 헌신관을 가진 사람과 잘못된 헌신관을 가진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잘못된 헌신관을 가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 3가지로만 생각해 봅니다:

 

(1) 잘못된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입술로만 헌신자입니다.

 

솔직히 교회 안에서 말로만 주님께 헌신하고 말로만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만 많고 행동이 없는 섬김, 이러한 입술만의 헌신자는 결코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회에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많습니다.

 

(2) 잘못된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탐심을 품은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볼 때에는 참 말로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데 그 섬기는 마음의 동기가 불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마음에 탐심을 품고 교회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헌신자들은 교회에 해를 끼칠 위험한 많은 사람들입니다.

 

(3) 잘못된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경솔하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경솔하게 헌신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하여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받치겠다고 말은 해 놓고 다시금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전도서 5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My vow was a mistake). 예를 들자면 부흥집회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아서 부흥사 목사님이 헌신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하여 나아가서 헌신했다가 부흥 집회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서 다시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헌신할 것 같이 못할 것 같아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지키지 않는 것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23장 21-2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민수기 30장 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그러면 바른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1) 바른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켜 행하되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신실하게 이행하는 자입니다.

 

(2) 바른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는 자입니다.

 

시편 110편 3절을 보십시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이 헌신하되 바른 헌신관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정직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주님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29장 17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3) 바른 헌신관을 가진 사람은 겸손히 주님께 받치는 자입니다.

 

역대상 29장 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솔히 헌신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불순한 동기로 하나님께 헌신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로만 하나님께 헌신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신중하게 서원한 것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이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해서 한 5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 바른 상속관, 바른 사업관, 바른 미래관 그리고 바른 헌신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실천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바른 삶을 살아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