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자리에 앉은 왕

 

 

[잠언 208-12]

 

 

여러분, 우리는 이미 몇 주 전 주일에 마태복음 7장 1-6절 말씀 중심으로 “비판하지 마십시다”란 제목 아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 교훈은 바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심판과 정죄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8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이란 제목아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8절을 보십시오: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여기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흩어지게 하느니라”는 동사는 영어로는 “winnows out”이라고 번역돼 있는데 이 번역이 원래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입니다(Gesenius). 그 문자적 의미는 “(곡식에서 쭉정이 등을 가려내려고) 까부르다 또는 키질하다”라는 뜻입니다(네이버 사전). 또 다른 문자적 의미는 “(원치 않는) 무엇인가를 체로 걸러내다”란 뜻입니다(네이버 사전)[영어로는 “sifts”(MacArthur)]. 여러분, 키질하다(winnow)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키로 곡식 등을 까불러서 알곡과 쭉정이로 분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인터넷). 그래서 솔로몬 왕은 잠언 20장 2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결국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요점은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지혜로워서 마치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듯이 선과 악을 분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후 그 왕은 원치 않는 악을 걸러낸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성경 구절 한두 군데가 생각났습니다:

 

(1) 첫 번째 생각난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312절 말씀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말은 세례 요한이 한 말로서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행하실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심판의 결과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곡은 예수님을 믿는 의인들을 가리키고 쭉정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악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곳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천국이고 쭉정이인 악인들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은 바로 지옥을 가리킵니다.

 

(2) 두 번째로 생각난 말씀은 마태복음 2531-46절에 나오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예언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33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결국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 심판 자리에 앉은 왕으로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시되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심판 자리에 앉으신 왕 중의 왕이신 주님께서 염소와 같은 악인들은 영벌(eternal punishment)에, 그리고 양과 같은 의인들은 영생(eternal life)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 마태복음 25장 4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심판 자리에 앉으시사 의인들과 악인들을 구별하실 주님을 믿으십니까? 장차 주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주님께서는 악인들을 의인들 가운데서 걸러내서 영원히 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의인들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 앞에서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여러분, 어느 누가 ‘내 마음을 내가 정하게 잘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가 ‘나는 깨끗하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로마서 3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요한일서 1장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 33장 9-11절을 보면 욥의 친구가 욥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만일 욥의 친구의 말대로 욥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과연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새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 4절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못된 행실 다 고치고 악한 생각 다 버려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는 못하리라.” 과연 어느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꽃같은 눈으로(계 2:18) 우리를 살피시되(창 16:13) 우리의 깊은 속까지도 살피시는(잠 20:27)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가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분,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정결하시사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입니다(고후 5:21).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우리의 죄를 깨끗이 제하기 위해서입니다(시 51:2).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주시사(blot out all my iniquity) 우리 속에 정한 마음(pure heart)을 창조하시기 위해서(9-10절) 죄도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이 의롭다하셨습니다(롬 4:25). 즉,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였다는 말입니다(고후 5:21).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5-2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목적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교회란 깨끗하고 거룩하여 아무 흠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교회를 요한계시록 21장 9절에서는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the bride, the wife of the Lamb)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아내 또는 신부가 바로 교회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교회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복된 자들입니다(19:9).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장차 오실 심판 자리에 앉으신 왕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실 때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자리에 앉으신 왕 중의 왕이신 주님 앞에서 ‘내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I am clean and without sin)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 앞에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0절을 보십시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이 말씀과 비슷한 말씀인 잠언 책에 한 두 군데 더 나옵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23절);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 이 석절 말씀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직하지 못한 것(부정직)(dishonesty)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엔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세 번이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부정직에 대해서 말하였을까요? 아마도 솔로몬 왕 당시에 상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저울추를 사용함에 있어서 고객들의 눈을 속여 물건의 품질이나 중량이나 분량을 속여서(박윤선)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서 갈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상인들이 고객들을 속인 방법은 '이중 저울'과 '이중 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부정직한 상인들은 곡식을 팔 때에 가벼운 저울추와 작은되를 사용하여 곡식을 적게 주었고, 곡식을 살 때에는 무거운 저울추와 큰되를 사용하여 곡식을 많이 받았습니다(인터넷). 그래서 성경 신명기 25장 13-16절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상상이 좀 되십니까? 부정직한 상인이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어서 이중 저울을 사용하여 고객을 속이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래서 성경 레위기 19장 35-3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한국 뉴스를 보다면서 상인들이 원산지를 속여서 팔다가 경찰에 걸린 뉴스를 접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산인데 한국산이라고 속여서 팔면서 불의한 이익을 남기다가 경찰에 걸린 상인들도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외에도 어떤 부정직한 상인들은 원산지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의 중량도 속이고, 심지어 미터기를 개조하여 불의한 이익을 고객들에게서 갈취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한결같이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이 않은 되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왜 상인들은 한결같이 않은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여 고객들로 부터 불의한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부정직한 상인들은 불의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언 20장 11절을 보십시오: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바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품행을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품행이 청결(pure)하고 정직(right)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를 미워해야 합니다(10절). 즉, 우리는 부정직을 미워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크리스천 상인들이 상업 행위에 있어서 부정직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업 행위를 다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불의한 이익을 얻고자 부정직하게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상업 행위에 있어서 정직해야 합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시 51:10).

 

마지막 넷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2절을 보십시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귀와 눈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듣고 또한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MacArthur).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을 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또한 우리 하나님은 온 천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28장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까지도 감찰하십니다(시 7:9). 하나님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잠 15:3). 그러나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합니다(시 10:4, 13). 그러므로 심판 자리에 앉으신 왕이신 주님께서는 마음에 미워하시는 악인을(11:5) 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시편 34편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또한 베드로전서 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저항하신다(against)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묵상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 심판 자리에 앉은 왕으로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시되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사 악인들은 영벌에, 그리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마 25:46).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최후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에 있을 그 최후의 심판(마 25:31-46, 계 20:11-15)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그 날에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한 몸을 입고 심판 주 되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딤후 4:1, 벧전 4:5, 눅 14:10, 요 5:26~27, 행 10:42, 고전 3:12~15, 고후 5:10).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모든 신자들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롬 8:1) 때문에,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신자들(요 5:24)에 대한 심판이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신자들의 은밀한 죄도 마지막 날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4:5, 고후 5:9~10). 따라서 우리는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인터넷).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경건히 사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 잠언 20장 8-12절 말씀 중심으로 심판 자리에 앉으신 왕에 대하여 네 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악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심판 자리에 앉은 왕 앞에서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깨끗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3) 심판 자리에 앉은 왕 앞에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이 부정직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4)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양심까지도 다 감찰하시며 우리의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