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와 명철한 자

 

 

[잠언 203-7]

 

 

여러분, 여러분 생각에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미 말한 것처럼 때가 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가끔 뉴스에서 범죄 사건들을 들을 때에 사람의 악이 어디까지인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죄악 된 일이 쌓인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경은 에베소서 5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지혜 없는 자이고 누가 지혜 있는 자입니까? 지혜 없는 자, 즉 어리석은 자(17절)는 세월을 허송합니다(16절). 그리고 그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17절). 그러기에 그는 술 취하며 방탕합니다(18절).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성령 충만합니다(18절). 그리고 그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합니다(17절). 그러므로 그는 세월을 아껴(16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3-7절을 보면 성경은 미련한 자와 명철한 자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교훈을 받아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명철한 자로 세움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미련한 자입니다. 한 2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미련한 자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3절을 보십시오: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우리는 이미 잠언 20장 1절에서 술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미련함을 나타내지 말자고 권면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술로 인하여 나타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미련함이란 우리 자신의 거만함과 또한 싸우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7장 14절에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는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노하기를 더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 15장 18절을 보십시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그러면 왜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여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영광임을 모르기 (또는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9장 11절을 보십시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오늘 본문 잠언 20장 3절에서 성경은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잠언 19장 11절에서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고 말씀한 후 이렇게 20장 3절에 와서 성경은 “다툼을 멀리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 두 구절을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다툼을 일으키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다툼을 일으키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0:3).

 

여러분,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다툼을 일으켜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툼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우리에게 영광이기 때문입니다(20:3). 우리가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당장 분노를 내지 말고 수욕을 참아야 합니다(12:16).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19:11). 우리가 노하기를 더디 할 때 우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수 있습니다(15:18, 17:14, 29:22). 또한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영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9:11).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할 때 다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미련한 자는 게으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4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미 잠언 책을 묵상해 오면서 게으름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 교훈의 요점은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0:4). 그 이유는 게으른 자는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손을 게으르게 놀리고 있기 때문에(10:4)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게으른 자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지만 그는 자기의 머리를 부지런히 돌립니다. 특히 악하고 게으른 종은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가 이미 잠언 15장 19절에서 묵상했듯이 악인은 꾀를 많이 부립니다. 그러므로 그는 게을러서 땀을 흘리면서 일하며 수고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악하고 게으른 종의 삶에는 동서남북으로 가시와 같은 어려움들로 둘러싸이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우리는 이미 잠언 18장 9절에서 배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게으른 자와 패가하는 자가 형제라는 말은 게으른 자는 큰 낭비자(a great waster)란 말입니다. 그 말은 게으른 자는 마치 방탕 하는 자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게으른 자의 제일 심각한 문제는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잠언 26장 16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웃기지 않습니까? 게으른 자가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이 말입니다. 실제로 게으른 자는 미련한 자인데(1:32)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기 여기니 결국 게으른 자는 교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4절에서 성경은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을 갈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 히브리어를 보면 “가을”이 아니라 “겨울”(winter)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겨울”이란 달력으로 말하자면 11월이나 12월을 가리킵니다(Swanson).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게으른 자는 추위 때문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박윤선). 여러분, 11월이나 12월이 따뜻합니까 아니면 춥습니까? 당연히 춥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에 11월이나 12월이 되면 북쪽으로부터 주로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MacDonald). 이렇게 바람 불고 추운 겨울 날씨에 게으른 자는 밭을 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게으른 자가 추운 날씨에 밭에 나아가서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까? 그러니 결국 추수 때에 게으른 자는 거둘 것을 아무리 찾아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갈지 않았으니(plowing) 아무 것도 심을 수 없었을 것이요 아무 것도 심지 못하였으니(planting) 당연히 아무 추수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MacDonald)

 

여러분, 우리는 게으른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런합니다(잠 12:27, 15:19). 우리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되 우리는 개미처럼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서로 협력하며 일을 해야 합니다(6:7). 그리고 우리는 개미처럼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되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8절). 마치 개미가 추수하는 여름 때에 겨울철 먹을 것을 미리 모아들이므로 겨울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미리 준비할 것들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명철한 자입니다.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명철한 자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도 표면으로 들어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5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마다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명철을 주셔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깊은 모략을 길어 내는 위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물 안 깊은 곳에서부터 물을 길러 내듯이 하나님께서 상담케 하시는 지체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밖으로 끌어내는 지혜를 저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5절을 보면 명철한 자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도 표면으로 들어낸다고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명철한 자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의 생각이나 의도(목적)를 표면으로 끌어낸다는 말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열왕기상 3장에 나와 있는 솔로몬 왕이 판결내린 재판입니다. 그 재판은 “창기 두 계집”이 그에게 와서(16절) 살아 있는 한 아이가 누구의 것인지 쟁론할 때(22절) 내린 판결입니다. 그 때 지혜로운 솔로몬 왕은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24절)하여 “산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25절)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아기의 진정한 엄마나 누구인지 분간하여 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진짜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솔로몬 왕에게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26절). 그러나 가짜 어머니는 진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26절). 그 말들을 들은 솔로몬 왕은 산 아이를 진짜 어머니에게 주고 결코 아기를 죽이지 말라고 명했습니다(27절). 즉, 그는 누가 진짜 아기의 어머니 인줄을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28절).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 왕의 판결함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음을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28절).

 

여러분, 어떻게 명철한 자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의 생각이나 의도(목적)를 표면으로 끌어낼 수가 있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잠언 18장 4절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즉, 명철한 자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를 표면으로 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의 충만한 지혜의 입으로 인하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은 지혜의 충만함 속에서 말을 하는 명철한 사람은 상대방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이나 의도 등을 표면으로 끌어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충만한 지혜를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위로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명철한 자는 충성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6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여러분,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 말을 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충성되이 여겨 자기에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했습니다. 동일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충성되이 여겨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셨고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감사함으로(12절)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20장 6절 하반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왠지 이 말씀을 솔로몬 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할 때 저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6장 1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이미 받은 교훈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왕은 충신의 충고를 잘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왕은 악을 행하는 간신들을 제하여 버리는 가운데서도 충신들을 자기 옆에 두고 그들의 충고를 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충신들의 입술은 “의로운 입술”이요 그들의 입술에서는 정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16:13). 왠지 저는 지혜로운 솔로몬 왕을 생각할 때 이러한 충성된 신하들이 그리 많이 있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그에게 충신들이 많이 있었더라면 그가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이방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을 때(왕상 11:4) 그 충신들이 솔로몬 왕에게 정직을 말하였을 것이며 그로 하여금 우상 숭배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20장 6절에서 솔로몬 왕이 말한 것처럼 왠지 그에겐 자기의 인자함(unfailing love)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결코 충성된 신하들이 아니요 말로만 솔로몬 왕을 사랑한다는 간신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에서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고 탄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충성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충성된 일꾼들로서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을 보십시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언제가 이 말씀 중심으로 충성된 증인이었던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에 대해서 3가지로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3가지를 우리 각자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기회가 되길 원합니다:

 

(1) 충성된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였습니다(2절). 즉, 충성된 증인인 사도 요한이 증언한 것은 바로 그가 본 천국의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1절).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가리킵니다(1절).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중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들로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합니다.

 

(2) 충성된 증인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또한 지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은 장차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즉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또한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증언하는 저와 여러분은 장차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충성된 증인은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환난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하였습니다. 여러분, 환난은 천국(나라)에 이르는 길이요, 참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입니다(박윤선). 성경 사도행전 14장 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 .” 그리고 야고보서 5장 10절을 보면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들로서 예수님의 환난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명철한 자는 온전하게 행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7절을 보십시오: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이 말씀의 원어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순전히 행하나니 그의 후에 그의 자손들이 매우 복되도다”(박윤선). 즉, “온전하게 행하는 자”란 “순전히 행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순전히 행하는 자”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욥이란 인물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욥기 1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욥이란 사람은 “순전(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개혁한글). 이 사실은 하나님도 사단 앞에서 인정한 사실입니다. 욥기 1장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의 순전함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절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만을 믿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욥의 결심이요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27:5). 오늘 본문 잠언 20장 7절에서 “완전히 행하는 자” 곧 “순전히 행하는 자”란 말씀에서 ‘완전하다’ 또는 ‘순전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단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내부적으로 온전함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리고 “완전히”(순전히)란 말은, 신앙생활(혹은 경건)에 있어서 그 내부적 동기가 온전하여 순수 무잡함을 의미합니다(박윤선).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외식하지 않으며 변절하지도 않는다. 그는, 순전하여 단순히 하나님만 섬기고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자이며(마 6:24), 쟁기를 잡고 뒤를 돌보지 않는 자이다(눅 9:62)”(박윤선).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순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단순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마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종들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살전 2:13). 왜 우리가 그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기 때문입니다(잠 30:5).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길로 행해야 합니다. 잠언 10장 9절을 보십시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의로운(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행24:16).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때가 악한 이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련한 자가 되기보다 명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 미련한 자이며 누가 명철한 자인지를 배웠습니다. 미련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며 또한 게으릅니다. 그러나 명철한 자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도 표면으로 들어냅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됩니다. 또한 명철한 자는 온전히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명철한 자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