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미련함을 나타내지 마십시다.
[잠언 20장 1절]
여러분, 여러분 생각엔 왜 사람들은 술을 취하도록 마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한 인터넷 한 기사를 보니까 술을 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마시는지 이렇게 적혀있습니다(인터넷): ‘월요일은- 월래가 마시는 날; 화요일은- 화끈하게 마시는 날; 수요일은- 수시로 마시는 날; 목요일은- 목롱해서 마시는 날; 금요일은- 금방 마시고 또 마시는 날; 토요일은- 토하도록 마시는 날; 일요일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시는 날’. 그 인터넷 기사에 또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잔은- 건강을 위하여 마신다고 하나, 얼큰하면 - 쾌락을 위하여 마시게 되고, 취하게 되면 - 방종한 행동을 하게 되고, 만취가 되면- 광기를 부리게 된다.” 술을 마시는 이유 중 하나는 기분이 좋아서 일 것입니다. 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알코올을 조금 마시면 처음에는 중추 및 말초신경이 흥분되고 위산 분비가 촉진되며 또한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 전달물질이 분비되므로 말미암아 기분이 좋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을 과음하거나 장기간 남용 또는 과용하면 술이 불행하게도 뇌세포 파괴를 촉진시켜 우리 뇌의 기능을 억제시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매일 십만 개씩 뇌세포가 자동 사멸하는데, 알코올을 다량으로 마시면 더 많은 뇌세포가 죽습니다. 학업이나 기억 또는 사고능력 모두 저하되는데, 이들의 저하는 알코올의 농도에 정비례하여 나타난다고 합니다. 알코올을 과음하면 취중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소위 ‘필름이 끊기는 현상’이 나타납니다(인터넷). 또 다른 사람은 술을 이럴 때 자기는 마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나쁜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친해지기 위해 술을 마신다. 고백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리운 사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속이 상할 때 술을 마신다. 누군가 보고플 때 술을 마신다. 마음이 울적 할 때 비가 올 때면 술을 마신다. 피로에 지쳤을 때 술을 마신다. 단합을 위해 술을 마신다. 호기심에 술을 마신다. 외로우면 또 술을 마신다”(인터넷).
여러분은 술 마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으로서 술을 마셔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한 안티 기독교 클럽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교회 다니기 싫은 열 가지 이유 …” 중 넷째 이유를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넷째, 목사님께서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하길래 어려운 자리에서 술잔을 받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저에게 손가락질 하더군요.. 술 몇 잔은 괜찮아.. 받아... 참 어안이 벙벙하더군요.. 더구나 집사 장로 아들이라는 작자들이 그러더군요.. 난 완전히 사기 당했습니다. 순진하게 목사님 말 듣다가 망했습니다. 요즘은 술을 먹게 됐습니다. 좋더군요... 요즘은 성경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왜냐구요..기독교인들에게 욕 얻어먹으니까요”(인터넷). 저는 이 넷째 이유를 읽으면서 적어도 이 글을 쓴 사람은 목사님의 말씀대로 술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것은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 쓴 사람의 말처럼 교회 장로님이니 집사님의 아들이라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술을 먹게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제가 듣기론 교회 장로님이나 집사님의 아들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둘째 치고 요즘 목사님들 중에서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제가 듣기론 2세 목사님들 중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데 심지어 미국 보수 신학교를 졸업한 출신들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희 교회 보수 신학교 방문한 형제가 저에게 찾아와 그 신학교 학생들 중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했다고 저에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제가 기독교 책방에 가서 본 책 제목인데 그 제목이 “교회에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입니다. 저자는 이 만재란 사람으로서 40대 후반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기독교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된 “막 쪄낸 찐빵”, “세상 속의 찐빵”이란 책들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방송생활을 통해서 얻은 많은 교계정보 중 특히 19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비롯된 전반적인 교세성장의 둔화 현상의 원인이 초신자 신규 영입 증가율의 감소와 신세대 청년층의 잇단 교회 이탈현상을 보고 기도와 숙고 끝에 “교회에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77가지 이유 중 여섯 번째가 바로 “술 담배도 이해 못 하는 교회, 이해 안 돼!”입니다. “술 담배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물에는 이해의 양면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교회에 나가야 된다면 나중에 술 담배 끊고 나서 한 번 고려해 보겠다”(인터넷). 실제로 이만재씨의 말처럼 술 담배 끊고 나서 교회에 나아가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는 불신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교회를 가려면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술 담배를 하면서도 교회에 열심히 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술 담배 하는 것에 대해 별 자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기독교인도 술 담배 하는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이 술 마시는 것은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마시면 아니 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우리가 논할 때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면서 술 취함은 심각한 죄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술 취함과 술 마심을 구분하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취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포도주를 마신 것은 사실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술 마심은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장의 “아디아포라” 문제,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해당된다고 말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지식의 원리, 즉,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그림자가 실체화되었으므로 구약적인 음식 규정의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원리에 따라 구약에 금지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담배도 피울 수도 있고 피우지 않을 수도 있다. 공식 석상에서 예의상 술 한 잔 한 것을 놓고 술을 마시지 않는 신자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정죄하는 것이나, 다른 나라 신학자나 선교사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지나치게 정죄하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술 취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당하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신자가 그렇지 않는 신자를 보고 믿음이 약한 신자라고 비난하면서 그 앞에서 대범하게 술 담배를 하는 것도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더욱이 술 담배를 못하는 ‘약한 신자’를 교육해서 강하게 하기 위해 도전적으로 술 담배를 하는 것은 바울 사도의 태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바울은 이런 의미의 ‘믿음이 약한 신자’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포도주나 고기가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고기(구약에서 금지된 고기)도 영원히 먹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다”(인터넷). 결론적으로 이 신학자의 결론은 술 담배가 몸에도 해롭고 가정에도 해롭다는 인식에 비추어 사랑과 건덕의 원리[근본적으로 신앙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세워진 관용의 원리(인터넷)]를 적용하면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저는 오늘 술 담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답하기보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인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란 말씀 중심으로 한 3 가지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포도주”나 “독주”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잠언 기자 솔로몬 당시나 구약 당시에 “포도주”와 “독주”를 우리 시대에 “술”과 동일시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구약 당시 “포도주”와 “독주”가 지금 우리 시대의 술과 동일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여러분 생각에도 동일시 할 수가 없다고 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포도주”란 그 옛날 당시에는 최고로 취하게 만드는 술(음료)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모든 포도주는 라이트 와인, 즉 오늘 말로 하면 알코올 도수가 낮은 포도주였다고 합니다. 농도가 강한 알코올은 중세 시대에 아랍인들이 증류(법) (distillation)을 발명한 후부터 알려졌다고 합니다[“증류”란 술을 만들 때 증기를 모으고 액체를 배출하여 원래 술보다 알코올 도수를 더 높게 하는 것임(인터넷)]. 그리고 “알코올”이란 단어도 아랍어라고 합니다. 그 중세 시대 때부터 “리큐어”(liquor) 또는 독한 술(독주)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시대에는 20% 강화된 포도주들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Vine). 그러므로 성경 시대에 술 취함(drunkenness)란 우리 시대에서 말하고 있는 알코올 중독(alcoholism)과 달리 그리 흔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처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Ha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시대 때 사람들에게도 술 취함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에서 “포도주” 외에 “독주”(strong drink)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여기서 “독주”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독주”란 보리나, 대추나 혹은 석류로 만든 술로써 마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취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사 28:7).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제사장들(레 10:9)과 나실인(민 6:1-3 그리고 다른 사람들(사 5:11)도 마시는 것을 금했습니다(Walvoord). 그 한 예로 이사야 28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종들인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포도주와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어 재판할 때에 실수하는 모습이 여러분은 상상이 되십니까? 만일 주일 예배 때 목사님들이 술 취해서 설교를 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0장 9절에서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은 술들이 많고 그 술들을 마시므로 알코올 중독자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폴란드의 스피리타스라는 보드카라고 합니다. 알코올 함량이 무려 96도로 대부분 수순 알코올에 가깝다고 합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온몸이 불이 붙은 듯한 강한 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 롯데칠성의 신제품 ‘하이주(HI-CHU)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하이주에는 알코올 5-6%와 과즙 1%가 함유돼 있다고 합니다. 알코올 도수가 맥주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낮은 4%짜리 맥주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제일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지금 미국만 해도 알코올 중독자들이 천오백만 명(15 million people)이라고 합니다(인터넷). 한국은 성일 알코올 중독자가 220만 명에 이르고, 알코올 중독의 전단계인 알코올 의존성 환자도 성인 5명중 한 명꼴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 사람의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슬로베니아에 이어 세계 2위라고 합니다(인터넷). 그렇다면 성경 시대의 사람들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술 취하지 말라는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포도주”와 “독주”가 우리에게 끼치는 악영향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 이 말씀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싸우게 하는 것이라 …”입니다(박윤선). 여기서 포도주와 독주가 우리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두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포도주와 독주는 우리를 거만케 하며 또한 싸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엔 술이 사람을 거만하게 한다고 보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난 체하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에스더 1장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이 베푼 잔치가 생각났습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제 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3절) 자그마치 180일 동안에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험의 혁혁함을 나타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4절). 결국 아하수에로 왕은 180일 동안이나 잔치를 베풀면서 참석한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들과 지방관들(3절) 앞에서 자기의 영광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왕궁 후원에서 또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는데(5절) 그 때에는 잔치에 참석한 자들로 하여금 금잔으로 마시게 하였는데 어주가 한이 없이 풍부하였고(7절)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들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게했습니다(8절). 그러다가 제 칠일에 아하수에로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자기 내시 일곱 사람에게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자기에게 나아오게 하여 그녀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려다가(10-11절) 왕후가 왕명을 따르지 아니하니까 왕의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붙는 듯하여(12절) 결국에는 왕후를 폐했습니다. 결국 아하수에로 왕은 술잔치 베풀어 자기의 아리따운 아내까지 자랑하려다가 아내가 말 안 들으니까 진노하여 아내와 이혼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사람이 술 취하게 되면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겨(호 4:11) 자신의 교만함과 거만함을 들어내면서 자기 자신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분노함도 들어냅니다(참고: 사 16:6). 그러기에 술좌석에서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잠 20:1). 그 래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잠언 2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실제로 술좌석에서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나 싸움이 그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에서 포도주와 독주가 우리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lead astray)는 것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되 포도주와 독주는 우리로 하여금 미련한 길로 이끕니다. 미련한 길로 이끌되 우리로 하여금 당장 분노를 나타내어(12:16) 다툼을 일으키게 할 뿐만 아니라(20:3) 우리로 하여금 죄를 심상히 여기게 만듭니다(14:9). 결국 포도주와 독주란 우리 자신의 미련함을 나타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은 포도주나 독주가 우리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21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그리고 또 다른 악영향은 우리의 수치를 들어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오는 술 취한 노아입니다. 창세기 9장 21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를 거만하게 하는 포도주와 우리로 하여금 싸우게 하는 독주에 미혹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1)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멀리하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교만과 거만을 우리 또한 미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8장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그리고 우리에게 지혜가 있을 때 우리는 포도주나 독주 같은 것에 미혹되어 미련한 길을 걷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께 그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2)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5:15-16).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러면서 바울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절)고 말하면서 그 다음에 “술 취하지 말라 …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18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 술 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조차도 두지 않을 것입니다(사 5:12).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장 11절에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는 악한 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점점 더 어리석은 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술 취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알코올 중독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십시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악한 때에 지혜롭게 행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오래 전 부흥강사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누가복음 1장 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개역한글).
(3) 우리는 술을 즐거워하는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잠언 23장 20절을 보십시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술을 즐겨하는 것, 즉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전도서 2장을 보면 솔로몬 왕이 “시험적으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여 낙을 누리게 해 보려고 쾌락(pleasure)을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1-2절). 그래서 그가 시험적으로 시도해 본 것이 바로 “술”이였습니다(3절). 그는 술로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술 마심에 있어서도 솔로몬 왕은 자기의 마음의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을 즐겼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키레네 학파의 주장처럼 술을 즐기되 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어 지혜로서 술을 지배하면서 솔로몬 왕은 술을 즐겨 마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키레네 학파의 주장처럼 솔로몬 왕은 술의 쾌락을 자신의 지혜로 지배하는 가운데 술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어리석음을 취하여서”(embracing folly)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술 취함으로 쾌락을 누려보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술을 즐겨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술을 즐거워하는 자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의 어리석음을 본받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면 술을 즐거워하는 자에게 사귀데 그 목적은 그의 영혼은 구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왜 신약 성경에서 모든 신자들이 술에 취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는지 그 이유는 한 세 가지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박윤선): (1) 사람이 취한 정신으로 거룩한 진리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이 취함으로 인하여 많은 다른 죄를 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3) 사람이 술에 인박혔으니만큼 술의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딤후 3:4).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게 마시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술로 인하여 죽은 두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술 집에서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술 집 경비원에서 총 맞아 죽고 또 다른 사람은 술좌석에서 시비가 붙어 상대방에게 총 맞아 죽었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경비원에게 총 맞아 죽은 친구의 장례식 후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그 친구의 어머님이 우리 친구들에게 전도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도 또 하나 잊지 못하는 기억은 또 다른 친구의 장례식 때 그 친구의 삼촌이 우시면서 편지를 읽어 내려가셨을 때 친구 잘 못 사귀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도 전도 대상자 친구들에 술좌석에 함께 할 때 신경을 많이 씁니다. 신경 쓰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그들의 안전입니다. 혹시나 술 취하여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면서 특히 술 취하고 나서 운전대를 잡지는 않을까 신경을 씁니다. 제가 이렇게 제 개인적인 추억을 나누는 이유는 오늘 본문 잠언 20장 1절 말씀을 생각할 때 술이란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술이란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는 술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미련함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미련함이란 바로 우리 자신의 거만함을 나타내며 또한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술을 삼가하고 결코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