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잠언 1919, 25, 28, 29]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보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회원자격”이란 교제를 보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영적 자세들(spiritual attitudes)란을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보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The kind of person you are is far more important than the kind of work you do).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순선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우선순위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우순선위는 존재(being)이지 행함(doing)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존재에서 행함이 나와야지 거꾸로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의 변화 속에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해인 수녀님 쓴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란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를 읽다보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면 좋을지 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범하지만 가슴엔 볕을 지닌 따뜻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 둥근 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너무 튀지 않는 빛깔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서는 이웃 그러면서도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랜 기다림과 아픔의 열매인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인터넷). 여러분, 우리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과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해인 수녀님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주 수요기도회 때마다 묵상하고 있는 잠언을 보면 성경은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성경 잠언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잠언은 우리에게 미련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9절, 25절 28-29절을 보면 한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이 세 종류의 사람을 생각할 때 나는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란 제목 아래 이 세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9절을 보십시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여러분은 맹렬히 분노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면 혹시 그런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 생각에 저 사람은 진짜 very furious (몹시 화가 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19장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영어 성경 NIV에서는 “A hot-tempered man”, 즉 “욱하는 성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욱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욱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은 쉽게 분노를 폭발합니다. 이 욱하는 성질이나 분노는 여섯 가지라고 합니다(인터넷): (1) 발성 분노(Sudden Rage)입니다. 이 분노는 갑자기 예기치 않게, 성격이 돌변할 정도로 화가 치미는 걸 말합니다. 감정이나 생각, 행동을 전혀 못하거나 일부만 통제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2) 잠재적 분노(Seething Rage)입니다. 이 분노는 반응이 누적된 것입니다. 이성의 장막 아래서 용암처럼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것으로 자신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상황에 병적으로 집착합니다. (3) 생존성 분노(Survival Rage)입니다. 이 분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결정짓는 특정부분에 위협이 가해졌을 때 폭발하는 것입니다. (4) 체념성 분노(Impotent Rage)입니다. 이 분노는 무력감입니다. (5)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Shame-based Rage)입니다. 이 분노는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닌 데 민감한 반응입니다. (6) 버림받음에서 비롯된 분노(Abandonment Rage)입니다. 이 분노는 외로움, 초조감, 불안감 등을 잘 견디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욱하는 분노는 총체적 분노(Total Rage)로서 강력하고 극단적입니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듭니다. 흥미로운 점은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이란 단어를 원어 히브리어 사전적 의미를 보니까 “furious”(매우 화내다)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런데 이 “furious”란 단어를 보니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복수의 세 여신의 이름이 “Furies”라고 합니다(인터넷). 로마인들은 복수의 여신들을 푸리아(Furia:영어로는 Furies)라고 했는데 이것은 fury(분노, 격심함, 격정)이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본래 이 말은 격렬하게 요동치는 일종의 광기를 뜻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미국에서는 특별히 이와 같이 행동하는 여자를 일컬어 퓨리(Fury)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이런 의미가 약화되었고 furious에는 ‘매우 화내다’라는 뜻만 담겨있습니다(인터넷).

 

이미 우리가 잠언 15장 18절에서 배운 것처럼 이렇게 매우 화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잠언 29장 22절을 보면 성경은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6-2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가 분을 낼 때 죄를 짓지 않도록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 잠언 19장 19절에 나오는 사람처럼 우리가 노하기를 맹렬히 하면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될 확률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잠언 19장 19절에서 성경은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한 말씀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죄를 범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범함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들 어도 맹렬한 분노 가운데 하나님의 책망을 왜곡하여 듣기에 맹렬히 분노하는 자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 외에 또 다른 죄를 범함은 오늘 본문 잠언 19장 19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건져 줘도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고 나서도 또 다시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죄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죄로 인하여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노하 기를 더디 하는 자(He who is slow to anger)가 되어야 합니다(11절; 14:29; 15:18; 16:32).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6, 민 14:18, 시 86:15, 145:8, 나훔 1:3, 요엘 2:13, 요나 4:2). 만일 우리가 노하기를 속히 하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입니다(잠 14:17). 그러나 만일 우리가 노하기를 더디 하면 성경은 우리를 슬기로운 자라고 말씀합니다(19:11).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슬기로운 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망령된 증인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28절을 보십시오: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여기서 “망령된 증인”이란 누구입니까? 망령된 증인이란 의도적으로 정의를 왜곡시키며 또한 무시하는 쓸모없고 사악한(worthless and wicked) 증인을 말합니다. 이러한 망령된 증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망령된 증인은 입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로 죄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Walvoord). 여기서 망령된 증인이 추구하는 죄는 바로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6:19). 즉, 망령된 증인은 거짓 증인입니다(19:5, 9). 저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드라마를 보면 왜 이리 거짓말들을 많이들 하는지 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것이 문화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거짓말들을 한 것이 다 들통 났을 때에서야 진실을 말하는 모습을 볼 때 왜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처음부터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할 때에는 거짓말(선한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19장 28절을 묵상하다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6장 19절을 보게 되었는데 저는 이 두 말씀을 함께 연관해서 묵상할 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망령된 증인은 거짓을 말하되 진실 된 말도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충분히 형제 사이를 이간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망령된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하며 망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19:5, 9; 21:28).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 왜 망령된 증인은 의도적으로 정의를 왜곡시키되 그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이유를 시편 59편 12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무슨 말씀입니까? 망령된 증인이 의도적으로 정의를 왜곡시키며 그의 입에서 거짓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기에 망령된 증인은 진실을 왜곡시키며 입술로 계속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14장 5절과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 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14:5, 25). 우리 입에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아야 합니다(신 5:20). 우리는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해서는 아니 됩니다(잠 25:18). 우리는 거짓말을 미워해야 합니다(13:5).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12:22).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습니다(요일 2:21).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말하지 말고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잠12:17).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거만한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29절을 보십시오: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 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여러분, “거만한 자”는 누구입니까? 주로 우리가 ‘저 사람 거만하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저 사람 잘난 체하며 남을 업신여긴다’라고 생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는 ‘저 사람 거만하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런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우리 자신이 이렇게 거만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어느 한 히브리어-영어 사전을 보니까 “거만한 자”를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것을 봅니다: ‘거만한 자란 교만하고 오만한 자로서 경멸(멸시)하기를 기뻐하면서 훈계나 책망을 할 수 없는 자이다. 이러한 자에게는 아무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Whitaker). 즉, 거만한 자는 교만한 자요, 오만한 자로서 자기 주제를 모르기에 자기 자신이 남보다 잘난 줄 알고 남을 경멸(멸시)하는 것은 기뻐하면서 자기 자신은 훈계나 책망 받기를 매우 싫어하는 미련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경 잠언 3장 34절을 보면 진실로 하나님께서 거만한 자를 비웃으신다(God mocks proud mockers)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9장 12절에서는 우리가 거만하면 우리 홀로 해를 당할 것이다(you alone will suffer)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거만하면 홀로 해를 당한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 자녀안에 거만함을 우리 부모가 보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 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을 해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19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잠언 10장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4장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 잠언 26장 3절을 보십시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결국 성경은 거만한 자녀에게 매를 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언 22장 15절을 보십시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9장 15절을 보십시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23장 14절을 보십시오: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여러분, 우리는 결코 거만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며(26:12) 또한 스스로 높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12:9, 25:6). 우리는 마음을 높은데 두지 말아야 합니다(롬 12:16). 한 마디로, 우리는 스스로 교만하여지면 아니 됩니다(고전 4:18).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대하 12:6).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합니다(참고: 빌 2:6-8).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야 합니다(고전 9:19).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19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까? 우리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망령된 증인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거만한 자가 되면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진실 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욱더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