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아들

 

 

[잠언 1910, 13-14, 18, 26-27]

 

 

여러분, 혹시 한국의 전래동화 중 “미련한 소금 장수 아들”이란 글을 읽어 보셨나요? 그 동화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인터넷): 옛날 어느 마음에 소금장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미련하고 둔해서 늘 걱정거리인 아들 … 다 자랐음에도 셈도 못하고, 쌀과 보리도 구분을 못했습니다. 걱정이 되는 게 당연시자 … 소금 장수는 언제나 미련한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런 아들이 소금장수가 되겠다고 하기에 소금장수는 그의 아들에게 소금 지게를 지워 내보내면서 나가서 소금을 팔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미련한 아들은 광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소금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일하는 광부들에게 오히려 그는 욕만 실컷 얻어먹고 소금 한 바가지도 팔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들은 소금장수는 그런 곳에서는 같이 땅을 파주고 일을 도와주면서 사람들이 쉴 때 소금을 팔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길을 나선 아들은 이번엔 혼인 잔치를 벌이는 곳을 기웃기웃 거리다가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며 신랑신부 옆으로 가서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경사스러운 날 무슨 짓이냐며 몽둥이를 들고 혼내주려 했고 아들은 깜짝 놀라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런 데 가서는 경사로다 경사로다 말하면서 춤을 추어주고 소금을 팔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아들은 소금을 팔러 나가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대로 경사로다 경사로다 말하면서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쳤는데 그 곳은 다름 아니 불난 집의 마당이었습니다. 매만 맞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런데 가서는 물을 끼얹고 불을 끈 다음 소금을 팔아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련한 아들은 그 다음 날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물을 홱 끼얹고 소금을 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들에게 우르르 몰려들어 화를 냈습니다. 결국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을 뿐인데 소금도 못 팔고 매번 사람들에게 맞기만 했기에 다시는 소금을 팔러 안다닐 거라며 죄 없는 아버지만 원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동화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시 미련한 아들은 부모에게 걱정거리란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아버지의 말만을 기억해 행동을 옮겼지만 상황에 맞추어 생각해 보는 지혜가 없는 미련한 아들이란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19장 13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여기서 “미련한 아들”이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모를 순종하지 않을 뿐더러 늘 악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박윤선).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미련한 아들”이란 제목아래 한 2가지를 중심적으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미련한 아들은 어떠한 자이며 그리고 둘째로 부모가 그 미련한 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미련한 아들은 어떠한 자입니까?

 

한 3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미련한 아들은 사치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0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언젠가 한국 뉴스를 통해서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인 박근혜 씨가 무슨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가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이 들고 다니는 가방이 명품이라고 하면서 타조가죽으로 만든 100만대 국내 명품 가방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국내 영세업체가 수작업으로 만든 가방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제가 그 때 그 뉴스를 접하면서 스쳐간 생각은 ‘저 가방 불티나게 팔리겠다’였습니다. ㅎㅎ 그 이유는 대통령이 그러한 가방을 들고 다니니 나도 그 가방을 사서 들고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제 개인적인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명품을 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서는 값 비싼 명품을 구입하는 계층이 넓어지면서 인기 있는 일부 품목의 경우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사치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한 웹사이트를 보니까 “사치스러운 여자란?” 제목의 글이 있어 좀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남자들은 사치스러운 여자를 싫어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치’의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밑에 다섯 가지 목록 중에 어느 것이 맞는 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200만 원짜리 루이뷔통 백이 2개쯤 있다. (b) 루이뷔통은 사치가 아니고, 사넬 쯤은 되어야 사치다. (c) 점심은 대충 먹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사치다. (d) 자기가 벌어서 쓰면 괜찮고, 부모 돈으로 쓰면 사치다. (e) 일 년에 한 번 해외로 여행을 다닌다면 사치다. 답은 위에 다섯 보기 중 없습니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의 주장은 남자에게 사치스러운 여자의 기준이란 ‘내가 현재 벌고 있는 또는 앞으로 가능한 소득수준에서 그녀의 현재 소비패턴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대답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남자가 보기에 사치스러운 여자에 대한 기준이지만 일리가 있는 사치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정서적으로 사치스러운 시대 … 그래서 고독. 절망 더 깊어져”란 제목아래 글이 있어 좀 읽어 보았습니다. 한 문학평론가와의 인터뷰 한 내용이었는데 그 문학평론가는 “젊은 세대의 좌절감이 큰 문제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 부분이 공감이 되어 좀 나눕니다: “지금은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사치스러운 시대입니다. 경제적으로 옛날보다 풍요롭고 편리하고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청년들은 고독감과 절망, 좌절감을 더 심하게 느끼지요”(인터넷).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치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 47장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이 말씀을 보면 사치하는 자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주위에 어려움을 당한 이웃이 있는데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웃의 어려움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는 과부가 아니라 하여 과부의 심정을 외면하고 과부 앞에서 남편 자랑하는 것이나,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앞에서 아이 자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어려움,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사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얼마를 쓰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사정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니까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모든 기회를 놓쳐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책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는 삶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인터넷). 즉,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란 가난한 자들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무시하면서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19장 10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미련한 자가 향락을 누리며 기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인터넷). 그런데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을 뿐만 아니라(10:23) 이 세상의 향락으로 낙을 누리면서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19:10). 특히 가정에 있어서 미련한 아들은 집과 재물을 그의 부모님에게서 상속 받아서(14절) 허랑방탕 생활을 하면서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하여(12절) 그 재물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한 것(13절)처럼 미련한 아들은 그의 부모에게 재물을 상속 받아 사치스럽게 삽니다. 이렇게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오늘 성경 잠언 19장 10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히브리서 2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기 때문입니다(히 5: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받는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2)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재앙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3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이니라.” 이 말씀을 언어 히브리어로 개역하면 다름과 같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 재앙이요 아내의 다툼들은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박윤선).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말씀들을 보면 미련한 아들은 부모에게 근심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0:1, 17:21, 25). 그리고 성경은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에게 고통이 되며(17:25) 또한 미련한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는 낙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절). 그러다가 오늘 본문 잠언 19장 13절에 와서 성경은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재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미련한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 재앙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한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a) 미련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앙이 되는 이유는 부모 된 자가 그 아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을 인력으로는 면할 길이 없고 별 수 없이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자녀로 인하여 부모가 고통당하는 것을 인력으로 면할 수 없음을 이미 경험하지 않으셨나요?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들의 자녀(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미련한 자녀는 부모에게 고통이요 재앙입니다.

 

(b) 미련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앙이 되는 이유는 명예 상으로든지 재산상으로든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미련한 자녀로 인하여 부모가 명예 상으로든지 재산상으로 손해 보는 모습을 우리 주위에서도 봅니다. 왠지 “손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는 미려한 자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탕자처럼 방탕 생활하는 자녀로 인하여 부모의 재산을 다 갈아 먹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련한 자녀는 부모에게 손해요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c) 미련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앙이 되는 이유는 이런 괴로운 일은 선한 사람들도 만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아무리 선한 사람이요 신앙이 좋다 할지라도 자녀 농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습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참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과나무 씨앗을 심고 정성들여 물과 거름을 주면서 돌보았는데 사과나무 열매가 맺히지 않고 다른 열매가 맺힌다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정성을 들여 최선을 다하는데 그러한 가정에 어떻게 삐뚤어진 미련한 자녀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3절에서 성경은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재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 나오는 가정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보면 우리는 인류의 첫 인간인 아담의 가정에서 맏아들 가인이 자기의 동생인 아벨을 죽인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야곱의 가정에는 10명의 자녀들이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팔아 버리는 이야기도 성경에 나옵니다. 그 뿐입니까? 다윗의 가정에서는 암논이 자기 형제인 다말을 강간하고 다말의 오라버니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보면 미련한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근심과 슬픔과 불행을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오늘 본문 잠언 19장 13절 말씀대로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재앙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 딸들이 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실제로 스뱌냐 3장 1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이러한 큰 기쁨이 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사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다 받으셨기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3) 미련한 아들은 그의 부모님에게 부끄러움과 능욕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26절을 보십시오: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미련한 아들은 아버지를 구박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구박한다’는 말은 ‘도둑질한다’는 뜻입니다(Swanson). 다시 말하면, 미련한 아들은 아버지의 물건을 도둑질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미련한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물건을 어떻게 도둑질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해 볼 때 물론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서 낭비하는 것이 생각은 나지만 말라기 3장 8절 말씀인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부모님에게 드려야 할 공경과 더불어 물질(용돈)을 드리지 않는 것도 아버지의 물건을 도둑질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 잠언 28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 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 하는 것은 죄입니다. 미련한 아들은 이 죄를 하나님과 자기의 부모님에게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련한 아들은 그의 어머니를 좇아냅니다. 다시 말하면, 미련한 아들은 자기의 어머니를 집에서 몰아냅니다. 어머니를 모시기보다 오히려 집에서 좇아내는 미련한 아들은 그의 어머니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어서도 어머니로 하여금 집에서 나가 노인 아파트 등 다른 곳에서 살게 만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국 미련한 아들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그 분들을 돌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미련한 아들은 그의 부모님을 구박하고 좇아내므로 부모님에게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줍니다. 성경에 미련한 아들이 그의 부모님에게 부끄러움과 능욕을 끼치는 것 외에 부끄러움과 욕을 당하는 자는 바로 “우상을 만드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16-17절을 보십시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으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미련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인 부모님을 공경하며(눅 18:20) 부모에게 효를 행합니다(딤전 5:4).

 

마지막 셋째로, 부모가 그 미련한 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부모는 그 미련한 아들에게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 여러분, 왜 우리 부모가 미련한 아들에게 희망을 가져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부모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미련한 아들에게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2) 부모는 그 미련한 아들을 징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미련한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그를 징계해야 합니다. 잠언 13장 24절을 보십시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미련한 아들을 징계해야 합니까? 잠언 22장 15절을 보십시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우리가 미련한 아들을 징계해야 하는 이유는 징계하는 채찍이 우리 아들의 미련한 것을 멀리 쫓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부모는 그 미련한 아들로 하여금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27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우리 부모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 미련한 아들에게 희망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에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에서 끝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련한 아들을 징계할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지식의 말씀을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제일 좋은 방법은 마땅히 행할 길을 우리 자녀에게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잠언 22장 6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마땅히 행할 길을 우리 자녀에게 가르칠 때 그는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녀로 하여금 지식을 말씀을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자녀가 잘 못되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다 우리 자녀가 잘 되길 바라므로 나름대로 부모의 책임을 다하여 양육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좋아 보이는 부모님에게 삐뚤어 나아가는 자녀를 볼 때 우리는 자녀 농사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녀 양육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부모로서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해 나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 중에 하나는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의 미련함을 보이기보다 지혜로움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 지혜로움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 본문 잠언 19장 10, 13, 14, 26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사치하는 삶을 살지 말고 검소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만일 우리에게 미련한 자녀가 있어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능욕을 가져오며 우리에게 재앙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그 자녀를 사랑으로 징계하며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게 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겸손히 받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