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부와 시련
[잠언 18장 23절; 19장 1, 4, 7, 17절]
여러분, 가난한 게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이런 말이 생각났습니다: “가난한 게 죄입니까?” 어느 누구도 가난한 게 죄라고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왠지 가난한 자들은 죄인 취급을 받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말은 가난이 죄는 아닐 진데 빈부차가 점점 심해지는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는 죄인인 모양 세상의 손가락질과 멸시와 조롱 등을 받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잠언 18장 23절과 19장 1, 4, 7, 17절 말씀을 묵상할 때 “가난한 자의 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가 경제적으로 가난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 부자인 가난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오늘 본문 잠언 19장 4절과 7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19장 17절을 보면 우리가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한 3가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그 3가지란 첫째로, 가난한 자의 부, 둘째로, 가난한 자의 시련,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인가 입니다.
첫째로, 가난한 자의 부는 무엇입니까?
한 2 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가난한 자의 부는 간절함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8장 23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 히스패닉 사역이 다가가며 전도하고자 애쓰는 우리 교회 주위 히스패닉 커뮤니티 사람들과 티화나 멕시코에 있는 히스패닉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이 미국에 있는 히스패닉 사람들보다 티화나 멕시코에 있는 사람들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통계를 해보아도 지난 번 티화나 멕시코 선교 사역을 통해서 10명이나 되는 히스패닉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고 들었는데 여기 우리 교회 주위에 있는 히스패닉 사람들은 지금 히스패닉 사역 약 7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리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여기 미국에 사는 히스패닉 사람들보다 티화나 멕시코에 살고 있는 히스패닉 사람들이 더 가난함 가운데서 복음을 듣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티화나 멕시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심령이 더 가난해서(마 5:3)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 에서 생각할 때 저는 가난한 게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8장 23절 상반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난하면 겸손해지고, 또 필요한 것을 구함에 있어서 간절하여진다”(박윤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 경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그들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신 8:9) 풍족하고 아름다운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 것(14절)을 경고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그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그들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12-13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질 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우리도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 뉴스를 들다 보니까 미국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조짐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 뉴스를 들었을 때 누구나 다 참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뉴스를 들은 후 오늘 본문 잠언 18장 23절을 묵상하면서 왠지 그 소식이 꼭 좋은 소식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결핍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다시 경제가 좋아진다는 뉴스는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위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은 경제적으로 풍부해 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입니까? 지금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3가지가 두드러지게 부족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그 3가지란 바로 헌신도(commitment)와 간절함(earnestness or desperateness)과 긴박감(sense of urgency)입니다. 왜 헌신도와 간절함과 긴급함이 부족할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원인을 이기주의와 안락주의와 게으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점점 더 세상이 종말을 향해서 흘러가면서 우리 사람들은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점점 더 교회를 봉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 가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다들 먹고 사는데 힘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교회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더 성도들이 교회에 헌신하지 못하(않)고 있는 것입니다. 헌신도 뿐만 아니라 간절함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안락(comfort)을 추구하지 뭐 하러 주님을 위해서 고생하며 고통을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쾌락주의도 위험하지만 안락주의도 참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긴급함은 어떻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긴박감(sense of urgency)가 있습니까? 왠지 우리에게는 사명감(sense of duty)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긴박감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면서 안락을 추구하기에 게을러져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설 때에 회계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긴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잠언 18장 23절에 나오는 “가난한 자”처럼 간절한 말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8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또한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간구하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2) 가난한 자의 부는 진실함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절을 보십시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중요시하는 기독교 덕목 중에 하나는 바로 진실함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가 대학생 때인지 신학생 때인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제가 저의 할머님을 모시고 어느 노인 아파트에 제 할머님의 아시는 권사님을 뵈러 갔다가 그 권사님에게 저에게 하신 한 마디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저의 할머님이 그 권사님을 부축하시고 모시고 아파트로 들어가시다가 그 권사님에게 저를 가리키시면서 앞으로 목사가 될 손자’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으신 그 권사님이 뒤를 돌아보시면서 저에게 ‘진실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 권사님의 한 마디가 이렇게 계속 제 마음에 메아리를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진실한 목회자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또한 여러분이 진실한 성도, 우리 모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9장 1절과 비슷한 말씀이 잠언 28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두 말씀 상반절에 나오는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란 바로 진실되이 행하는 가난한 자를 말하는데 여기서 진실한 자란 사람의 겉과 속이 일치한 자를 말합니다(박윤선). 지금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19장 1절에서 이러한 진실한 자와 미련한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부함과 가난함을 대조하고 있다기보다 진실함과 거짓됨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난하여도 진실한 자가 부유하지만 거짓된 자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잠언 28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는 부자이지만 마음이 구부러져 있기에(crooked) 그의 언사에 있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왜곡시키는 자를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러한 자는 잠언 2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부유하면서도 굽게 행하는 자는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에 그러한 삐뚤어진 마음에서는 삐뚤어진 말과 삐뚤어진 행동 밖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가리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는 진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힘쓰고 애쓰기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겉과 속이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말씀 인격화 되어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가난한 자의 시련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9장 4절과 7절을 보십시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이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가난한 자의 시련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친구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14장 20절을 보면 성경은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한 자는 고립된다는 말이요 외로운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들은 미움을 받고 외로운 상태에 놓일 뿐만 아니라 악한 관원에게 학대와 압제도 당한다고 잠언 28장 3절과 1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 22:16).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시련을 겪도록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자는 부자로 또한 어떠한 자는 가난한 자로 지으셨을까요? 잠언 22장 2절과 29장 13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22:2),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29:13).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포학한 자”, 즉 불의한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를 지으셨고 그들로 하여금 섞여 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빈부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눈에 빛을 준다"는 말은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45절에서도 주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인터넷). 우리가 왜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부자로 또한 누구는 가난한 자로 지으셨는지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부자가 가난한 자나 모두다 주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 중 가난한 형제, 자매들이 겪는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야고보서 1장 3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가난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신 8:3) 인내하며 시련을 견디어 내므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9장 17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므로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준 것을 하나님께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잠언 14장 31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줘야 합니다(29:7).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합니다(28:27). 우리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줘야 합니다(22:9). 우리는 결코 그들을 못 본 체해서는 아니 됩니다(28:27). 그러나 불의한 부자는 교만하여 가난한 자가 애걸할 때 냉혹하게 대합니다(18:23하). 이것은 성경 누가복음 16장 19-21절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요구에 대하여 눈떠보지 않은 교만한 부자의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박윤선). 더 나아가서, 불의한 부자는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까지 합니다(잠 22:16). 그러나 성경 잠언 14장 31절 상반절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은 풍부한 땅입니다. 동시에 이 미국 땅은 점점 더 영적으로 가난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마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그 땅의 풍부함 속에서 배가 불러 교만해졌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풍요로워서 교만해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겸손히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의 부인 간절함과 진실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부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가난한 자가 겪는 시련을 우리 또한 겪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이웃에게 미움을 받아 고립되어 외로운 상태에 놓여 있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