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
[잠언 17장 27-28절]
진정한 1등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과 특성이 필요한 것일까요? LG 경제연구원에서 출저한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리더십 전문가인 Tomas J. Neff와 James M. Citrin이 쓴 책 ‘Lessons from the Top’에서 사업을 1등으로 이끌고 있는 성공 리더 50명의 15가지 공통 자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런데 이 15가지 자질들 중 단지 3가지만 지적 혹은 기술적 능력과 관련되었을 뿐, 대부분이 소프트한 차원의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을 기반으로 한 태도나 의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감성지능이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타인과 좋은 관계(Good Relationship)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감성지능이 점차 기업 경영의 현장에서 특히 향후 리더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경영 환경이 변화하는 속도만큼이나 조직 구성원들의 가치관 또한 너무나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리더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시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구성원들과 밀접한 상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풍부한 감성지능을 바탕으로 한 감성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구성원들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고 만족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구성원들이 열정을 다해 일에 몰입하게 함으로써 높은 성과 창출이 가능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조직 차원에서 보면 리더와 부하직원간의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인간적 유대감은 신바람 나게 일 할 수 있는 직장 내지는 강한 조직문화를 형성하는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에 대해서는 Daniel Goleman이란 심리학자가 성공적인 리더와 그렇지 못한 리더 간의 차이는 기술적 능력이나 지능지수(IQ)보다 감성지능(EI)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고 합니다. 약 80% 정도의 감성지능과 20% 정도의 지적 능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리더는 효과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Daniel Goleman이란 심리학자의 주장과 좀 달리 생각합니다. 만일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선 감성지능 80%가 필요하고 지적 능력이 20%가 필요하다면 제 생각엔 그 20% 지적 능력이 80%의 감성지능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제 생각엔 효과적인 리더십에는 감성보다 지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감성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감성은 지성에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 생각에 근거는 성경 잠언 19장 2절입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저는 오늘 본문 잠언 17장 27-28절 중심으로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한 2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말을 자제(억제)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2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낀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을 아낀다’라는 말의 의미는 ‘입을 자제한다’(restrain mouth)입니다(Brown).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입을 자제합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잠언 10장 19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지식(지혜)있는 그리스도인이 말을 자제하는 이유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이 많으면 허물이(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같은 목사나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그 대답을 야고보서 3장 1-2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들 같은 경우는 많을 말에 해야 하겠지만 실수가 없도록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야 합니다(막 5:48). 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추구하기 위해선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 21절 상반절에서 하고 있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우리들은 남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받은 말씀을 우리가 먼저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함 속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이나 교회 성경공부 선생님들에게 성경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그 대답을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즉, 성경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말하기를 더디 하고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즉, 성경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 듣기(롬 10:17)를 속히 해야 합니다(약 1:19). 그리할 때 우리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고민하는 점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고민은 제 기억으로는 대학교 3학년 때 부터인가 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 동아리에서 섬기면서 여러 지체들을 접했는데 너무나 많은 때에 제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줘서 마음이 괴로워 항상 학교 아파트로 돌아와서는 밤에 잠들기 전에 오늘은 누구누구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잠들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또 제 입을 절제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말을 내 뱉으므로 원치 않게 여러 지체들의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이 기억납니다. 이러한 자를 가리며 잠언 29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그래서 요즘은 그 때 대학생 때 보다 언어에 조급하지 않으려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또한 고민하고 말하려고 노력을 하곤 있지만 잘 안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좀 더 신중하게 입을 열어 말을 하되 될 수 있는 데로 말을 적게(few words)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잠 26:22). 특히 저에게만 나눈 상대방의 기도 제목도 그 사람 허락 없이는 아무리 서로가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아무리 칭찬이래도 진솔하게 하되 과장해서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며 특히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억제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관대하되 내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않게 자아성찰하면서 균형 있게 자아비판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눈다면 잠잠할 때 잠잠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28절을 보십시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할 때 좀 웃음이 나오면서도 이렇게 못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둘째로,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침착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2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이 말씀을 다시 번역한다면 ‘명철한 자는 성품이 냉철합니다’ 입니다. 여기서 ‘성품이 냉철하다’라는 말은 성품이 침착하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여러분, 영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Be cool!.” 이 말의 뜻은 “침착하세요!”입니다. 이 말은 주로 상대방이 흥분해 있을 때 ‘당신 좀 침착하세요’라는 의미해서 사용되는데 오늘 본문 잠언 17장 27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품이 냉철하다/냉정하다/침착하다’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cool of spirit”(영혼의 침착함)이란 뜻입니다(Walvoord). 이 말은 명철한 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의 영혼이 침착하다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을 보면 오늘 본문 잠언 17장 27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품이 ‘냉철하다’는 말은 “even-tempered”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단어의 뜻은 “(성격이) 침착한”이지만 우리가 “temper”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질’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네이버 사전). 즉, 침착한 성품이란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여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14장 29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내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약 1:19) 크게 명철한 사람이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미련함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은 크게 명철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묵상한 잠언 17장 12절에서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즉,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왜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사람이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분노할 때 들 합리적(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미련한 자가 분노할 때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들 합리적(이성적)이라면 만일 이러한 미련한 자를 우리가 만났다면 그 사람 앞에서도 과연 저와 여러분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지식(지혜)있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합니다. 그 영혼이 침착한 그리스도인은 비이성적인 사람 앞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식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기 때문입니다(잠 16:32). 여러분, 성경 잠언 16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이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고 한다고 합니다. 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상대주의”입니다. 즉, 사람들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치 또는 규범)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바로 “감성주의”입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이성보다 감성을 더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영역에서 감정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성경과 교리의 기초 위에서 신앙을 세워가기보다는, 체험이나 신비 또는 느낌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예배와 찬양과 기도에 있어서도 감정적인 부분이 우선시 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17장 27-28절에서 배웠듯이 우리는 감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만 묵상을 하였는데 그 하나는 우리는 말을 자제해야 하며 또 하나는 우리는 침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절제하여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하며 말을 해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감정에 휩쓸려서 입을 열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침착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좀 냉철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여 침착하게 대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