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

 

 

[잠언 1715절과 26]

 

 

지난 주 뉴스를 통해서 이미 소식을 접하셨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진행된 삼성전자와 애플 간의 특허 침해사건 1심 재판의 배심원 평결이 애플의 완승으로 끝났다는 소식 말입니다. 그 결과 이 사건 배심원단은 삼성이 애플 회사의 특허를 침해한 것으로 보고 10억 4,934만 3,540 달러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런데 이 판결로 인하여 월요일 하루만 해도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13조 9935억 원이 증발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왠지 모르게 저도 이 재판에 대해서 자꾸만 관심이 가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이러한 판결이 나온 것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이 사건이 전개될지 솔직히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국 계 미국인 판사가 배심원단의 평결을 어떻게 판결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만일 그 판사가 애플의 손을 들어준다면 앞으로 삼성에서 항소에서 어떻게 판결이 날지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변치 않는 생각은 판사가 재판을 법대로 바르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법원에서는 삼성의 승리로 끝났는데 미국 법원에서는 애플의 승리로 끝난 것을 보면 어떻게 같은 사건을 판결함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의 사법부의 판결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인터넷 기사를 읽어보니까 이렇게 한국과 미국의 판단이 달랐던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정서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국민정서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을 보호하려는 심리가 강했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인터넷). 미국 같은 경우도 어느 인터넷 기사에 “삼성, 애플이 아닌 미국 애국심에 졌다”라는 제목 아래 글을 쓴 것을 보니까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배심원 제도의 한계가 낳은 결론이라는 분석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이렇게 세상의 사법부 시스템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람들이 한계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세상 재판에서는 불공평한 판결이 나올 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계속해서 부당행위가 합리화 될 수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불공평함과 부당행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재판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잠언 17장 15절과 26절에서 자신이 미워하시는 것과 자신이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2가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길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7장 15절을 보십시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하면 우리는 잠언 15장 8-33절에서 이미 묵상한 말씀을 다시금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3가지로 우리가 배웠는데 그것은 “악인의 제사”(8절), “악인의 길”(9절) 그리고 “악한 꾀”(26절)이었습니다. 여기서 “악인의 제사”란 제사 드리는 자가 겉으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그의 마음으로는 악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였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입니다. “악인의 길”이란 입술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불순종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마음에 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27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한 꾀”란 악한 계교(6:18)로서 이익을 탐하므로 상대방의 물질을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15절에서 솔로몬 왕이 또 말하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이란 바로 악인을 의롭다 하던지 또는 의인을 악하다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한 판사(The unjust judge)가 불공평하게 판결하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제일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의 재판이라 생각합니다. 살인강도인 바라바는 놓아주고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그 판결, 그 판결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불공평한 판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살인강도를 아무 죄가 없다고 풀어주고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사형선고의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까? 이러한 불공평한 판결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판결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우리는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온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는 그 판사를 좋아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성경 잠언 17장 15절은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은 왜 그 사람은 불공평하게 재판을 내리는가 라는 것입니다. 왜 불공평한 판사는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까? 그 이유 중 하나를 잠언 17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불공평한 판사는 뇌물을 받으므로 재판을 굽게 하여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 5장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 도다.”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고 악인의 의롭다 한 이유가 뇌물 때문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구약 시대나 지금이나 뇌물로 인하여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져서 재판을 굽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악인에게는 죄가 없다(You are innocent)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범죄하고도 감옥에 가지 않고 오히려 풀려나며 의인이 오히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이러한 불공평한 일들이 우리나라 사법 재판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미국 교육자 찰스 시키즈(Charles J. Sykes)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Some rules kids won’t learn in school)이라는 10가지 조언에서 첫 번째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인터넷): “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인생이란 공평하지 않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라). 이 말처럼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비롯해 외모, 건강, 재능, 행운과 불운 등 모든 면에서 인생은 불공평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가장 불공평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불평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개선 의지나 노력보다는 그저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자포자기 하는 태도가 더욱 큰 불공평을 초래합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만들고 싶다면 먼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합니다. 그리고 그 불공평한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선 먼저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그 원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먼저 잠언 24장 2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먼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크리스천 판사들은 재판할 때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은 그가 재판할 때 낯을 보아 줘서 악인에게 “네가 옳다”(또는 ‘너는 죄가 없다’)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백성에게 저주를 받으며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4절). 오히려 성경은 악인을 죄 없다 그러지 말고 그 악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5절). 즉, 우리 크리스천 판사는 공의롭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5절).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7장 26절을 보십시오: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여기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부당행위(injustice)입니다. 그리고 그 부당행위를 당하는 사람들은 바로 의인이요 또한 귀인이라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종종 뉴스를 통해서 듣는 것은 부당노동행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부당노동행위의 유형 중 하나는 바로 불이익 취급입니다. 여기서 불이익 취급이란 예를 들어 해고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휴직, 출근정지, 감봉 등이 있으며 또한 수당을 받지 못하는 보직으로 전근도치하거나 대기 발령시키는 행위가 있습니다(인터넷). 어디 부당행위가 노동에만 제한돼 있겠습니까? 사회 전반적으로 부당행위가 만용 되고 있는 이 시대에 특히 정직하고 진실 되게 살고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피해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잠언에 ‘선하지 못하다’(It is not good)이란 문구가 오늘 본문 잠언 17장 26절 외에도 한 세 번 더 잠언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잠언 18장 5절인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가 오늘 본문 잠언 17장 26절 말씀과 좀 유사합니다(다른 두 구절은 19장 2절과 25장 27절임). 이 두 구절을 요약해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은 의인을 벌하여 억울하게 하는 것이요 또한 악인을 두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판장이 재판에서 악인은 정죄하고 의인은 의롭다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5장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이것은 재판장이 재판할 때에 시비를 밝히고 잘못된 자를 태형으로 벌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도 재판장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때리게 하되 40번 이상은 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권을 존중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박윤선). 신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고후 11:24). 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매를 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그에게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선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 곧 부당한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도둑질 하는 것은 십계명 중에 제 8계명을 어기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윤리인 우리가 소유해서는 안 될 것을 가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막 10:19; 롬 1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부당한 착복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서 이러한 부정행위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제반 활동에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지 말아야 합니다. 새 사람은 부당한 돈의 제공자도 되지 말고, 받는 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 또한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의롭다 하던지 또는 의인을 악하다 하는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한 판사가 불공평한(unjust) 판결을 내리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불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는 불공평한 판사를 미워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불공평함을 우리 또한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것인 부당행위(injustice)를 멀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정당함(justice)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로서 공평함과 정당함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