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양육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언 172, 6-7, 17, 21, 25]

 

 

자녀 양육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터넷 크리스천투데이를 보니까 “자녀 양육의 방법보다 원칙이 중요하다”라는 제목 아래 글이 있어 좀 읽어 보았습니다. 그 글 내용은 “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정 원칙”이란 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인터넷). 이 책에서 저자(정정숙)는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잘 배워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자녀 양육 방법론이나 스킬보다 먼저 자녀 양육에 대한 원칙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들을 훈계하고 훈련함에 있어서 일관된 태도와 훈련에 대한 원칙을 세워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칙이 한 8가지되는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는 자녀들에게 건강한 신앙을 물려주는 두 가지 방법을 제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모범을 통한 교육과 즐거운 가족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세워서 우리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2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 부모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한 3 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들을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양육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저는 개인적으로 잠언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해 나아가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잠언 말씀을 통하여 지혜의 가치를 더욱더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께 더욱더 지혜를 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제가 하나님의 지혜로 저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내와 자녀들을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잘 양육할지를 고민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잠언 말씀을 묵상하면서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이 전 보다 더 생각하게 되고 붙잡고 기도하게 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늘 본문 잠언 17장 2절에서 솔로몬 왕은 슬기로운 종, 즉 지혜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잘 다스리므로 그 아들의 형제처럼 유업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 왕이 대조하는 것은 지혜로운 종과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입니다. 한 사람은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신분을 가진 자가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 주인에게 유업을 나눠 얻는다는 말을 지금 솔로몬 왕은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에 가능합니까? 어떻게 종의 신분을 가진 자가 그의 주인에게 아들처럼 유업을 나눠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종이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로운 종(또는 슬기로운 종)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잠언 16장 20절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지혜”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지혜란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잠언 19장 20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라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고 하나님의 권고와 훈계를 받을 때에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2). 그 좋은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잠언 17장 2절에서 말하는 그 주인의 아들처럼 자기도 유업을 나눠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은 그의 아비의 근심이요 그 어미의 고통이라고 잠언 17장 2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미련한 아들은 부끄러운 짓을 하므로 그의 아버지의 근심이요 그의 어머니의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잠언 17장 21절을 보면 이러한 미련한 자를 낳는 부모는 근심을 당하고 또한 미려한 자식을 둔 아버지는 낙이 없다(the father of a fool has no joy)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첫 번째 “미련한 자”란 히브리 원어는 ‘이해가 느리고/둔하고’(dull), ‘우둔한/멍청한’(thickheaded)라는 의미며 두 번째 “미련한 자”란 단어는 ‘영적 통찰력과 예민함이 부족함’(one who lacks spiritual perception and sensitivity)을 뜻합니다(Walvoord). 즉, 미련한 자식은 둔하고 멍청할 뿐만 아니라 영적 통찰력과 예민함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므로 부끄러운 짓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근심이요 고통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근심과 고통이 되는 부끄러운 짓을 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삶의 낙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들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는 먼저 우리 부모가 적어도 한 3가지를 충실해가 잘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여 양육할 수 있길 바랍니다: (1) 우리는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16:20).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가운데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야 합니다(10: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훈과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지혜로워질 것입니다(9:9). (2) 우리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잠언 13장 20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잠언 14장 7절은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자의 입술에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7절). 만일 우리가 미련한 자를 떠나지 않고 사귀게 되면 우리는 해(고통)를 당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할 때 우리가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13:20). (3)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함을 말씀 묵상을 통하여 깨달아 갈 때 우리는 더욱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우리 자녀들을 훈계해야 합니다.

 

잠언 17장 6절을 보십시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여기서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말은 좁게 해석한다면 손자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기쁨과 위엄(joy and dignity)을 준다는 말입니다(Walvoord). 그런데 이 말씀을 좀 넓게 해석한다면 후손들은 조상에게 면류관이란 뜻으로 신앙의 유산이 계속해서 전수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신앙과 경건한 영향이 가정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므로 나타나되 그것이 자녀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MacArthur).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자식이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로 살 때에 그 부친에게 영광이 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더 나아가서, 자녀들과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르게 살 때에 그 선조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른 길을 걷다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참고: 16:31)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도 우리가 걸어온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우리의 기쁨이요 영광이겠습니까. 물론 자녀 양육 우리 부모 마음대로 잘 안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면서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양육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하나님과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들이 생산될 수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부모로서 신앙의 본도 제대로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지도 못했는데 우리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할 것은, 부모가 자식들을 잘 가르쳐도 그들이 잘 순종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이다”(박윤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를 본받아 올바르게 살아만 간다면 이 얼마나 우리 부모에게 큰 기쁨이요 영광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만일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르게 살아가시는(가셨던) 이러한 부모님이 계시다면(계셨다면) 오늘 성경 잠언 17장 6절 하반절은 우리 자녀들에게 그 부모님은 영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녀들은 그러한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이렇게 삼 세대가 등장하는데 손자는 할아버지의 기쁨과 영광(“면류관”)이고 아버지는 그 자녀의 자랑스러움(pride)이리는 사실이 흥미롭고 참 귀하다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서로에게 기쁨과 영광이 되고 자랑스러움이 될 수 있는 가정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손자)의 관계, 참 아름답고 귀합니다. 삼 세대가 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모습, 그러므로 서로에게 기쁨과 영광이 되며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니 이러한 가정을 이루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우리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합니다(엡 6:4).

 

셋째로,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친구 사랑과 형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17장 17절을 보십시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부모로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러가지 기도 제목들 중에 하나가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주세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저 같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녀들을 둔 부모님은 좋은 선생님도 만나야겠지만 또한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대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대학교에 가서 좋은 교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했지만 좋은 룸메이트,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길 기도한 기억이 납니다. 그 이유는 신앙 좋은 친구들을 만나므로 우리 교회 대학생들의 신앙에 좋은 영향을 받아 믿음이 더욱더 자라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7장 17절 상반절에서 솔로몬 왕은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편안할 때보다 오히려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를 향한 친구의 사랑이 더욱더 빛을 발함을 말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되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그를 사랑했습니다. 잠언 18장 24절을 보십시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여러분,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 이 얼마나 귀한 친구입니까? 이러한 친구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먼저 이러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친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므로 그 사랑을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러한 친구 사랑 외에도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형제 우애를 가르쳐 줘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한 혈통에 속한 형제들은 환란 때에 자발적으로 서로 도와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박윤선). 힘들고 어려울 때 형제들끼리 자발적으로 서로 도와주는 그러한 우애를 나눌 수 있는 자녀들로 우리 부모가 양육해야 함을 교훈해 주는 말씀입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을 때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돕는 것도 귀하지만 특히 어렵고 힘들 때 형제들끼리 서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돕는다는 것은 참 귀한 형제 우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부부가 위급할 때 서로 돕고 사랑하므로 그들에게 형제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게 넓게 높게 많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잠언 17장 2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 한 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양육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그들을 훈계해야 합니다. (3)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친구 사랑과 형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이 말씀을 순종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입각하여 잘 가르치고 양육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