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가정

 

 

[잠언 171, 9-10, 13-14]

 

 

여러분, 직장인들의 인생 최종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리미엄 취업포털 커리어(www.career.co.kr 대표 강석인)가 직장인 23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88.7%가 ‘인생의 최종목표가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직장인 10명 중 9명은 인생의 최종 목표가 있으며 그 1위는 화목한 가정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최종목표 1위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응답이 28.3%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본인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 27.4%, ‘창업’ 16.0%이었으며 이외에도 ‘세계일주’ 9.0%, ‘내 집 마련’ 8.5%, ‘이직’ 4.2%, ‘종교귀의’ 0.9%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복수응답)으로는 ‘열심히 일을 한다’가 60.4%를 차지했다고 함. 이어 ‘돈을 많이 모은다’ 45.8%, ‘인맥을 늘리기 위한 활동을 한다’ 34.4%,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 31.1%, ‘재테크를 한다’ 26.4% 순이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최종 목표를 설정한 이유는 72.2%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를 들었다고 합니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8.5%, ‘주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7.1%,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6.6%,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2.4%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17장 1절 말씀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가난하게 살아도 가정이 화목한 것이 풍부하면서 가족 식구끼리 서로 다투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가족식구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남은 것을 가족들이 서로 나누어 먹었다고 합니다(레 7:16; 19:6; 삼상9:24). 그런데 제사를 드리고 즐겁게 먹어야 할 그 자리에서까지 서로 다투는 가족은 불만이 심각한 가정입니다(박윤선). 상상이 되십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와 감사헌금 등을 드린 후 남은 돈 때문에 가족 식구들끼리 서로 다툰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정의 화목함은 풍부함과 궁핍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리고 제 개인적 생각은 다툼의 원인이 꼭 풍부해서 만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화목한 가정은 어떠한 가정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할 수 있는지를 한 4가지로 생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화목한 가정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서로의 허물을 거듭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잠언 17장 9절을 보십시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제가 지난주에 제 개인 페이스 북에다가 이러한 토론 주제를 올려놓았습니다: “왜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마음의 기도 제목을 서로 나누기가 두려운(힘든) 것입니까?” 그랬더니 전도사님 한 분이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마음의 기도의 제목은 신뢰가 이루어진 후에야 가능합니다. 잘못하면 큰 상처를 받거든요. 온전히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영성이 있는 사람들과만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분 말처럼 기도제목을 내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닌가 생각도 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거듭 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남의 마음의 기도 제목을 거듭 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의 기도 제목을 거듭 말하게 되면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그 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6장 28절 말씀처럼 “패련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거짓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여 다투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부부 관계를 보면 왜 서로 다툽니까? 거짓말쟁이인 사단이 우리 부부 관계를 이간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단은 우리 부부 관계를 이간합니까? 바로 거짓말로 이간하되 특히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허물을 더욱더 잘 보게 하고 그 허물을 자꾸만 우리의 입술로 서로에게 말하게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게 하므로 부부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또한 다투게 만들고 있습니다. 분명히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데(keeps no record of wrongs) 사단은 상대방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들을 우리 생각에 기록해 놓게 만들어서 그 잘못한 것들을 서로에게 말하게 만들되 거듭 말하게 만들므로 서로의 인간관계 속에서 다툼과 불화의 결과를 가지고 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솔로몬 왕이 잠언 18장 8절에서 한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가리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허물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5절).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편 32편 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큰 축복과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이 무엇입니까? 잠언 10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일 가까운 이웃인 우리 가족 식구들을 사랑하되 서로의 허물을 가려주고 또한 덮어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엡 4:3).

 

둘째로, 화목한 가정은 서로의 충고를 받습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서로의 충고를 겸허히 들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7장 10절을 보십시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서로의 허물을 계속해서 들춰내므로 감정이 상하여 서로 다투고 싸운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계속해서 자녀들이 서로 다투도록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그것은 아니잖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녀들이 싸우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싸운다면 우리는 그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자녀들이 미련하여 책망을 해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로 징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자녀들 중에 우리의 충고를 듣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자녀가 있다면 그 얼마나 지혜로운 자녀입니까? 성경은 그러한 지혜로운 자녀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녀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막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물론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의 엉덩이나 종아리를 매 백대로 때린다면 우리 자녀들의 엉덩이나 종아리에 얼마나 큰 자국들이 배기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자는 거만하여(잠9:7) 자기의 잘못에서 뉘우치고 돌이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혜로운 자녀에게 충고 한 마디 한다면 외적으로는 몸에 배기는 자국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녀의 마음에는 우리 부모의 충고가 깊이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자에 대한 성경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 예는 바로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후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그를 책망했을 때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무엘하 12장 1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자마자 즉각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같은 경우는 닭이 울고(눅 22:60)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을 때 그는 주님의 말씀 곧 “오늘 날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61-62절). 닭이 울고 주님이 쳐다보시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였다니 이 얼마나 총명한 자입니까? 이렇게 총명한 자들은 매 백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과 그의 말씀 충고(책망) 한 마디면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또한 회개합니다. 이러한 총명이 우리와 우리 가족 식구들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총명한 자, 즉 깨닫는 자는 한 마디의 충고에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옳은 길을 걸어갑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대화를 적어 놓은 책인 논어에 보면 “문일지십”이란 사자성어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사자성어의 뜻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으로 보통 영재나 천재들처럼 하나만 알려줘도 열 가지를 깨우치는 사람들에게 쓰는 말입니다(인터넷). 한 마디 충고를 해도 잘 깨달고 그 충고를 마음에 깊이 새길 뿐만 아니라 더욱더 지혜롭고 총명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더 많은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옳은 길)을 걸어갈 때 어찌 우리 가정이, 어찌 우리 교회 공동체가 화목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화목한 가정은 악으로 선을 갚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선으로 선을 갚아야 합니다.

 

잠언 17장 1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않는 가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불의를 행합니다. 그리고 불의를 행하므로 그 가정에는 재앙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성경적인 예가 바로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은 악으로 선을 갚은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그와 그의 나라에 충성하고 있었던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죽이므로 그는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아들인 암논이 자기 아버지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한 것처럼 다말을 강간하였고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던 것처럼 다말의 오라버니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가족적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나중에 자기 아버지인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자기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끔직한 가족적 재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불의를 행한 결과입니다. 지금 많은 가정들이 가족적 재앙을 접하고 있습니다. 가정에 불화가 끝이지 않고 있습니다. 깨짐과 다침과 상처와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현대 가정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우리 가정에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행하기에 지금 많은 가정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는 가정, 그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가정, 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고 거만할 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결국 우리는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베드로전서 3장 9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정에서 다툼이 있을 때 우리의 입술로 서로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힐 때 성경은 복을 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mp3로 성경을 듣다가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셨다는 말씀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잠시나마 묵상할 때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도 동일하게 말하면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롬 12:21). 우리는 악을 행하기보다 선을 행하므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베드로전서 3장 17절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선을 행하나 상대방이 악으로 갚을 때에 우리의 영혼이 외롭지만(시 35:12)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살후 3:13).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가정에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시 34:14).

 

넷째로, 화목한 가정은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칩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선 다투기 시작하기 전에 시비를 그쳐야 합니다.

 

잠언 17장 14절을 보십시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여러분, 가정 안에서 부부나 자녀들이 서로 다툴 때에 주로 무슨 일로 다툽니까? 큰 일 때문에 다툽니까 아니면 지극히 작은 일로 다툽니까? 인터넷에서 찾아본 사자성어 한 3가지를 나눕니다(인터넷): (1) 百年偕老(백년해로) : 부부가 되어 서로 사이좋고 화목하게 함께 늙다, (2) 偕老同穴(해로동혈) : 부부가 화목하여,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힘. 부부사이의 화목함, (3) 蝸角之爭(와각지쟁) : 달팽이의 뿔 위에서 하는 싸움. 매우 사소한 일로 다툼. 작은 나라끼리 싸움. 이 외각지쟁이라는 사자성어의 배경 이야기는 이렇다고 합니다: “위나라 혜왕(재위 기원전 369~기원전 319)이 제나라 위왕(재위 기원전 356~기원전 320)과 사이좋게 지내자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그 뒤 위왕이 약속을 어겨서,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혜왕의 신하 공손연이 이 말을 듣고 당당히 군대를 파견하여 쳐야 한다 하고, 계자는 군대를 보내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혜왕은 머뭇거렸다. 이를 본 대진인이 혜왕에게 “달팽이 왼쪽 뿔에는 촉나라가, 오른쪽 뿔에는 만나라가 있습니다. 언젠가 이 두 나라가 땅을 뺏으려고 싸웠습니다. 죽은 사람이 여러 만 명이었고, 도망치는 적군을 쫓아 보름 만에 되돌아왔습니다”라고 하니까, 혜왕이 “뭐야, 함부로 씨불이(지껄이기) 아니냐”고 하자, 대진인이 말을 이었다. “예, 그 ‘함부로 씨불이’의 알맹이를 보여 드리지요. 끝없는 우주 안의 나라들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 작은 나라 중에 위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서울이 있고, 그 서울 안에 임금님이 계십니다. 임금님과 달팽이 뿔 위의 나라와 얼마나 다를까요”(인터넷). 결국 부부나 자녀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원인이 매우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17장 14절에서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다(Starting a quarrel is like breaching a dam)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혹시 라스베이거스 근처에 있는 후버 댐 가보셨습니까? 만일 가보셨다면 그 후버 댐에 아주 조금씩 물이 새기 시작하다면 여러분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후버 댐 위에서 구경하시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큰 댐에 지극히 작은 구멍이 있어서 물이 아주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은 그 사실을 알고도 그 후버 댐 위에 서서 계속해서 구경을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록 물이 조금씩 흘러나올 정도의 작은 구멍이라 할지라도 아마 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관광객들로 하여금 피신하라고 하고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험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사자성어 “水滴穿石(수적천석)”가 적합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뜻은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결국에는 돌에 구멍을 뚫는다”(인터넷). 비록 큰 댐에 지극히 작은 구멍이라 할지라도 그냥 방관해 놓으면 그 댐이 무너지므로 큰 피해를 도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잠 17:14). 그런데 주로 우리가 서로 다투고 싸울 때에 시비를 그쳐야 하는데 왜 우리는 시비를 그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작은 일로 시작한 싸움이 점점 확대되어 더 큰 싸움이 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야고보서 4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바로 “싸우는 정욕”(your desires that battle within you)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싸우는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정욕대로 행한다면 우리는 잠언 17장 19절 말씀처럼 “다툼을 좋아하는 자”(He who loves a quarrel)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loves sin)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17:19). 결국 우리가 가정 안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는 원인은 우리 가운데 있는 싸우는 정욕 때문이요 그 정욕에는 우리 각자가 “욕심”(You want something)을 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4:2). 예를 들어 부부가 싸울 때 보면 서로가 배우자에게 원하는 욕심이 있는 그 원하는 욕심이 만족되지 못할 때, 즉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싸움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이 원하는 것(욕심)을 우리가 내려놓을 때 우리는 싸움을 방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내려놓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여러분, 몽골 선교사인 이용규 목사님이 쓴 “내려놓음”이란 책을 알고 계시죠? 그 후에 쓴 책 제목이 “더 내려놓음”이라고 합니다. 명문대 하바드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잘 나갈 수 있는데도 오지의 선교사로 나가 주님을 섬기는데 그가 “내려놓음”이란 책에서 강조한 것은 그러한 학벌이나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는 것.’ 이것을 내려놓음의 정신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이용규). 그러면서 그 책 안에 내용 중 이러한 글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인정받고 싶어 울고 있는 아이다. 이 아이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속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 우 리는 우리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지 모른 채 그의 감정에 이끌려 살아간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통해서만 안정을 얻고 쉼을 누릴 수 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우리가 없는 것에 집착하는 한, 우리가 받은 것을 기쁨으로 누릴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인정을 추구하는 만큼 우리가 세상에 붙들리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자유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모습에서 향유 옥합을 본다.’ 바로 그 다음 말씀이 나를 놀라움 가운데로 몰아가며 내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그런데 옥합이 예수의 발 앞에까지는 드려졌지만,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채로 남이 있으려 하는구나.’ 그 말씀에서 깨어지지 않은 내 자아를 보게 되었다. 예수의 발 앞까지는 갔지만 정작 깨어져야 할 때 깨어지지 않으려는 나의 자존심을 본 것이다. 존중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에서 깊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나는 애통해하며 하나님 앞에 다짐했다. ‘하나님, 제 안에서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부분들을 봅니다. 저의 옥합을 깨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발 앞에 드려졌어도 옥합이 깨어지지 않으면 향기를 발할 수 없다. 옥합이 깨어져 안에 있는 향유가 다 흘러나올 때에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이용규).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옛 전래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한 색시가 시집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밥을 짓다 말고 부엌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남편이 이유를 물으니 밥을 태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은 오늘은 바빠서 물을 조금밖에 길어오지 못했더니 물이 부족해서 밥이 탔다며 이것은 자기의 잘못이라 위로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감격하여 더 눈물을 쏟았습니다. 부엌 앞을 지나가던 시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정을 들은 시아버지는 내가 늙어서 근력이 떨어져서 장작을 잘게 패지 못했기 때문에 화력이 너무 세서 밥이 탔다고 아들과 며느리를 위로했습니다. 그 때 이 작은 소동을 들은 시어머니가 와서 이제 내가 늙어서 밥 냄새도 못 맡아서 밥 내려놓을 때를 알려주지 못했으니 자기 잘못이라고 며느리를 감싸주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모두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스스로 반성하고 또 자기가 잘못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남을 위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화목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화목한 가운데 만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동거하고 계십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가족이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감화 감동시켜 주시는 대로 순종하면 서로 이해, 용서, 위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가정천국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