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 받을 만한 사람들
[잠언 16장 31-33절]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시사저널”에서 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총 30개 분야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한 글과 사진들이 있어 좀 읽어보았습니다(인터넷). 정치에는 박근혜 의원, 기업에서는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던 고 정주영 회장, IT에서는 안철수 연구소 이사회 의장인 안철수씨, 그리고 금융에서는 버크셔헤더웨이의 회장인 워렌 버핏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개신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누구인가 보았더니 제 1위는 순복음 교회 원로 목사인 조용기 목사님, 2위로는 사랑의 교회 고 옥한음 목사님, 3위에는 명성 교회 담임 목사인 김삼환 목사님, 4위로는 고 한경직 목사님, 5위로는 고 하용조 목사님이라고 하네요. 이 설문조사 결과를 읽으면서 한 2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는 개신교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분들 성함을 보니 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이신데 소형교회나 중형교회나 잘 알려지지 않은 목사님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존경 대상에 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문조사는 그저 설문조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한가지 든 생각은 가장 존경받는다고 조사된 순복음 교회 원로 목사님은 지금 인터넷 기독교 뉴스에 이런 저런 문제로 계속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볼 때 한 때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분이 지금은 가장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을 볼 때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회의가 듭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성경에서 유다 백성들에게 존경 받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왜 존경을 받았을까 하고 인터넷 성경책을 찾아보았을 때 두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란 바로 에스더 10장 3절에 나오는 에스더의 사촌인 모르드개란 인물과 사무엘상 9장 6절에 나오는 사무엘 선지자였습니다. 먼저 유대인 중에 크게 존경을 받은 모르드개란 인물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에스더 10장 3절을 보십시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성경은 모르드개가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크게 존경을 받았을까요? 그는 유다인들에게 크게 존경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허다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유다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르드게는 유다 백성들을 안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모르드개가 유다 백성들 중에 크게 존경을 받은 이유는 그가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였기에 모르드개는 유다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였고 그들을 안위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무엘 선지자를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사무엘상 9장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성경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또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 이였습니다. 왜 그가 존경을 받았습니까? 이 질문을 대답을 사무엘상 12장 2-4절을 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 나는 늙어 머리가 희었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같은 12장 23절 상반절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 그는 기도의 사람 이였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존경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오늘 본문 잠언 16장 31-33절을 보면 존경 받을 만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한 3 부류로 나눠서 생각해 보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길 원합니다.
첫째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은 평생 의로운 길을 걸어온 노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31절을 보십시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저는 개인적으로 머리카락 염색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만일 나이가 더 들면서 하얀 머리카락이 더 많아지되 머리 한 부분에만 하얀 머리카락이 많고 다른 부분은 지금처럼 시커멓게 되면 염색을 부분적으로 하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머리카락이 백발이 된다고 해도 저는 염색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잠언 20장 29절 말씀 때문입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이 백발이라고 말씀하고 있기에 저는 제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어도 염색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솔로몬 왕이 말하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인 “백발”이란 단순히 외부적인 하얀 머리카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저는 노인들의 백발을 보면 그 모습 그대로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쩌면 어느 어르신들은 ‘목사님도 늙어보세요’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늙으면 주로 어르신들이 늙는다는 그 자체를 싫어하고 오히려 젊음을 더 좋아하기에 젊은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 젊음도 다 한 때이기에 어느 누구다 다 빼놓을 수 없이 우리 모두는 다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늙어가고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31절에서 솔로몬 왕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지 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 귀한 교훈이란 우리는 의로운 삶(a righteous life)을 살면서 늙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의로운 삶을 살면서 늙어가므로 노인이 되었다면 우리의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화의 면류관”이란 말은 사람의 장수한 것이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나이가 늙어서 백발이 된 어르신들 중 특히 우리가 볼 때에도 장수하시는 분들을 보면 ‘야, 참 저분은 존경스러운 어르신이야’라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되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어르신들이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참 존경이 안가는 백발의 노인들이 있는데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의 삶 속에서 작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보다 아직도 죄악 된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존경심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세도 참 많으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시고자 신실하게 그리고 겸손히 주님을 섬기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저절로 그 분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특히 그 분들의 성품이 성화된 모습을 볼 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31절에서 솔로몬 왕은 평생 나이가 늙어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도 의로운 길을 신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걸어가는 노인들은 마땅히 존경 받을 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노인들은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장수의 축복을 받습니다(10:27). 장수의 축복을 받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니(고전 13:6), 그 심신이 평안합니다(잠 3:2). 따라서 그들은 육신 생명에 있어서도 건강하게 되어 장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이러한 노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바로 “영화의 면류관”입니다. 그는 나이가 늙어 백발이 되어서 오히려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존경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존경 받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32절을 보십시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어느 한 인터넷 웹사이트를 보니까 현대인을 괴롭히는 두 가지 대표적인 감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우울과 분노라고 합니다(인터넷). 우울증이 불행의 내적 표현이라면 분노는 불행의 외적 표현으로서 우울증은 자신을 파괴한다면 분노는 다른 사람을 파괴합니다. “우울증” 하면 우리는 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우울증의 위험을 인식하는 반면에 분노에 대해선 우리는 그리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한국 문화는 분노에 대해선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뒤끝만 없다면” 화를 가끔 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뒤끝 있는 사람은 화를 가끔 내는 것조차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미국에서는 분노를 중요한 감정적 문제로 보는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분노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분노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노력들 중에 하나가 바로 “anger management”(분노 다스리기) 프로그램”입니다. 그 분노 다스리기 프로그램 테크닉을 좀 보니까 그 중에 제일 처음이 분노가 무엇인가를 정의하여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노”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과연 “분노”가 무엇입니까? “분노”란 한자로 ‘분할 분’ 자에 ‘성낼 노’자를 쓰는데 “분할 분”자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혹은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거나 뭉쳐 있는 것이 일시에 솟아오른다’는 뜻이고 “성낼 노”자는 음을 나타내는 노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이라는 뜻이 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자의 따른 “분노”의 정의는 “자신의 욕구, 요구 혹 뜻하는 바가 막히거나 거부당했을 경우 마음과 생각에 있던 것들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입니다(인터넷). 흥미로운 정의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구나 요구나 뜻하는 바가 막히거나 거부당했을 때 울컥 치솟아 오르는 분노의 감정, 참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정의라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욕구나 요구나 뜻하는 바가 거부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 때 마음에 뭉쳐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분노가운데 윽박을 지르고 물건들을 내어 던지고 폭행까지 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이 분노의 감정,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노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1) 첫째는 가벼운 ‘짜증(irritation)’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불쾌감’ 정도로서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단계입니다. (2) 두 번째는 ‘분개(indignation)’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해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고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단계입니다만, 대개의 경우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잘 극복해냅니다. ( 3) 세 번째는 ‘격분(wrath)’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격분의 단계에 이르면 보복하려는 강한 욕구가 생깁니다. 이 단계에 있을 때는 당한 대로 갚지 않으면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분을 풀어야 편안해 지는 단계입니다. (4) 네 번째는 ‘격노(fury)’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격노(激怒)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급기야 그것이 폭발하게 됩니다. (5) 다섯 번째는 ‘광분(rage)’의 단계입니다. 이 광분(狂奔)의 단계는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스런 분노로서 아주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키는 단계입니다. 이 다섯 단계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느 단계의 분노까지 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짜증은 다 내보았을 것입니다. 분개와 격분, 아마 격노까지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경 잠언 14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 그리고 야고보서 1장 19-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성내는 것,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노하기를 속히 하는 것,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25장 28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면 마치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이 되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잠 16:32).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그 분노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님의 열매 중 “절제”(self-control)입니다(갈 5:23).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주실 때에 우리는 이 분노의 문제를 극복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 책임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사 분노의 감정(feeling)에 이끌림을 받기보다 사실(fact)인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 받도록 역사,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분노를 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분노를 억제하는 자를 가리켜 성경은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9:11).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잘 정복하는 지혜로운 자가 한 성을 정복하는 용사보다 더 낫다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16:32).
마지막 셋째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옛날 성경 시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인도하심)을 찾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제비 뽑기였습니다. 그 좋은 예가 구약에 나와 있는 요나 1장 7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불순종하는 요나 선지가가 타고 있던 배가 하나님이 내리신 대풍으로 말미암아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을 때에 이방인 사공들이 각자의 우상 신에게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니까 결국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그들에게 임하였는지 책임을 묻고자 제비를 뽑게 되었습니다(욘1:1-7). 제비를 뽑는 행동은 그 옛 시대 때에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누구의 잘못인지 죄를 발견하는 것이요(삼상 14:41-42), 둘째는 신적 인도(에 3:7; 잠16:33)입니다. 여기서 이방인 사공들이 제비를 뽑은 이유는 첫 번째 의미였습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죄를 발견하는 것. 또 다른 좋은 예는 신약 사도행전 1장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죽고 나서 또 다른 제자를 세워 나머지 열 한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함에 있어서(행1:22) 두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 두 사람은 바로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23절). 그 때 열 한 제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24-25절)라고 한 후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혔습니다(26절). 그래서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되었습니다(26절). 이렇게 제비 뽑아 하나님의 뜻(인도하심)을 알던 그 시대에는 제비는 사람들이 뽑아도 그 참된 결정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박윤선).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후 교회 시대에는 제비뽑기란 제도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지 못합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성경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됩니다(시 119:105)(박윤선). 다시 말하면, 오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 말씀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MacDonald).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그 최고의 예(supreme example)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신 예수님이십니다(마 26:39).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하면 저는 특히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가 생각납니다. 이 찬송가의 해설을 보면 작사 작곡한 루터교 목사인 Benjamin Schmolck(1672-1737)은 참으로 작은 예수의 삶, 참 제자의 삶을 산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교의 반개혁파 세력으로 인하여 루터교회들은 카톡릭에 다 흡수되고, 시내에는 금지되어 성 밖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종탑도 없고 통나무 움막에 흙벽의 초라한 교회 한 곳, 그것도 로마 가톨릭 신부의 허가를 받아야 환자 방문도 장례도 치를 수 있는 그런 루터 교회에 시무하던 중이었습니다. 3명의 동역자가 36개 마을이나 되는 광활한 지역을 목회해야 했습니다. B. Schmolck는 과로로 쓰러졌고 중풍으로 와병 신세가 되었고 회복된 후에도 오른손이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었으며, 백내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난관 속에서도 목양에 힘을 쏟았습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심방을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완전히 소실된 집과 화마에 아들 형제까지 잃어버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새까맣게 타버린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 때 부르짖은 기도의 내용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에서 이 유명한 찬송시를 낳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고통에서 탈출하고 싶은 심정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런 인간의 본능적인 고뇌의 일단을 피력하셨습니다.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에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복종하는 실천적인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B. Schmolck는 작은 예수의 삶, 제자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인간이 극복하기 힘든 난관에 봉착할 때에도 철저히 순종하는 신앙의 결정이 바로 이 찬송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에서 투영됩니다(인터넷). 우리 이 시간 다 같이 “내 주여 뜻대로”를 하나님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존경의 대상이 결핍된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점점 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심지어 교회에서 존경의 대상을 찾아 볼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도 부모님이나 목사님을 존경하지 않는 그 원인이 뭘까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춰 생각해 볼 때 그 이유는 주님가신 길, 그 한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지 않기 때문에, 노하기를 속히 하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존경 받을 만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