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독촉하는 것들
[잠언 16장 25-30절]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음 3가지 가정을 세우고 동기부여론(Motivation Theory)을 개발하였습니다. 첫째 가정은,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정은, 인간의 행동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정은, 인간의 욕구는 기본 욕구(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에서부터 상위욕구(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욕구, 자아실현욕구)까지 5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 메스로우의 욕구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는 일종의 동기이론인데 밑에와 같습니다: (1) 생리적 욕구: 기아를 면하고 생명 유지를 위한 욕구로서,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에 관한 욕구에서 성적 욕구까지를 포함합니다. (2) 안전 욕구: 생리적 욕구가 충족된 후에 나타나는 욕구로서 위험,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3) 애정/소속 욕구: 가족, 친구, 친척 등과 친교를 맺고, 원하는 집단에 소속되어 귀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4) 존경 욕구: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5) 자아실현 욕구: 계속적인 자기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 초점을 둔 욕구입니다. 다른 욕구와는 달리 욕구가 충족될수록 더욱 증대되는 경향을 보여 ‘성장욕구’라고 하기도합니다. 알고 이해하려는 인지적 욕구, 심미적 욕구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인터넷). 저는 이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들을 생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2가지 욕구들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그 2가지 욕구들이란 육체적 욕구와 영적 욕구입니다. 여기서 육체적 욕구란 메스로의 첫 번째 욕구인 생리적 욕구에 가까울 수 있는데 그 한 예로 우리의 기본적인 육체적 욕구는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식욕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와 달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욕구를 바로 영적 욕구입니다. 이 영적 욕구를 2가지로 간략하게 구분을 한다면 의를 행하고자 하는 욕구와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라 말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16장 26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 욕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독촉하는 것은 배고픔(hunger)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은 노동의 대가로 먹습니다(시128:2).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창 3:19). 그러므로 성경은 노동하지 않는 자를 규모 없는 자(불법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살후 3:11). 그리고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을 보면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먹고 놀기만 하면 우리 마음속에 악한 생각들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창 6:5). 그 결과 우리는 범죄 할 위험이 많습니다. “마귀는 게으른 자의 마음속의 둥지를 튼다”라는 격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땅에서는 부지런히 노동해야 됩니다(박윤선). 여러분, 노동자는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죄악시 하면서 부지런함을 권장하고 있습니다(10:4-5; 12:24; 14:23, 28:19). 부지런히 일하되 노력하는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식욕을 인하여”) 애를 쓴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을 한다는 말은 자기의 식생활을 위하여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식생활을 위하여 일을 열심히 한다는 말은 자신의 배고픔이 자기를 독촉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람의 본능은 배가 고프면 당연히 식욕을 만족시키고자 음식을 찾습니다. 그런데 음식이 없다면 음식을 사고자 돈을 벌고자 애씁니다. 주로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음식을 사겠지만 어떤 이들은 돈을 구걸해서라도 음식을 사 먹습니다.
가끔 운전하다가 보면 신호등 앞에서 플랫 카드를 들고 서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플랫 카드에 쓰여 있는 글이 바로 ‘I am hungry’(나는 배가 고픔니다)입니다. 심지어 잠언 6잗 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도둑질을 해서라도 자기의 굶주리는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이렇게 배고픔은 우리를 독촉하여 우리로 하여금 노동을 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 기본적인 우리 사람들의 육체적 욕구인 식욕을 생각할 때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주리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로 하여금 배가 고프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이신(요 6:33)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35절)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고자 우리로 하여금 주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27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육신의 배고픔이 우리를 독촉하여 일을 하게 만들지만 우리의 영적 배고픔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먹여서 만족하여 믿음이 자라나 보는데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고후 5:7). 믿음으로 살아가되 우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마 6:25, 31)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33절).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영적인 욕구를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우리 안에 또 다른 욕구인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를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한 2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 안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란 바로 자기기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분명히 우리 주위 사람들이(특히 신앙의 선배님들이) 보기엔 우리가 지금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는데 왜 우리는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믿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자기기만으로 인하여 지금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으면서도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기만에 빠지기 쉬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박윤선): (1)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자기 행동이 옳은 줄 압니다. (2)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종교의식을 철저히 행하므로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자기 공로에 의지하여 자기 영광을 나타내며 자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보기에 자기 행위가 옳은 줄 믿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말은 바르게 한다 할지라도 행동은 바르게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 2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 말은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서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 분별력과 판단력은 이미 흐려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능력을 상실한 가운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기기만 가운데 선택한 그 길을 걸으면서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대가는 “사망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한국 속담인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잘 아는 일이라도 조심하여 실수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인터넷). 이 속담을 오늘 본문 25절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보기엔 우리가 지금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또 점검해 보는 조심하여 실수 없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너무나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서 우리가 선택한 길이 정말 옳다고 믿을지라도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그 길을 선택한 우리 자신이 혹여나 하나님의 말씀에 지금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율법주의자처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아닌지 자아성찰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져 지금 우리가 보기엔 그 길이 바르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한번 쯤 다시 생각해 보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안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란 바로 악함입니다.
여기서 “악함”이란 한 3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고자 하는 악한 욕구란 불량함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27절을 보십시오: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여기서 “불량한 자”(a scoundrel)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악마의 사람”(a man of belial)입니다(6:12). 사람이 불량하다는 말은 곧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요 사악한 사람(worthless and wicked)을 가리킵니다(Walvoord). 이 불량한 자가 하는 일은 악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사냥꾼이 웅덩이를 파서 먹이를 잡듯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 속에 “웅덩이”(pit)를 파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함정에 빠져 넘어트리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케 합니다. 특히 이 불량한 사람은 맹렬한 불같은 입술로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노력한다고 오늘 본문 잠언 16장 27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단은 자꾸만 우리의 입술로 죄를 범하게 합니다. 쓸모없는 말, 사악한 말을 하게 하므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케 하고 우리 이웃에게 죄를 범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처럼 입술로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욥 2:10). 어떠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욥처럼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해서는 아니 됩니다(1:22).
(2)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고자 하는 악한욕구란 패려함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28절과 30절을 보십시오: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패려한 자”란 “거짓말쟁이”라는 뜻입니다(박윤선). 이러한 자는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므로 다툼을 일으킵니다(6:14). 그러한 패련한 자는 오늘 본문 30절을 보면 “패역한 일을 도모”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악한 계획을 강구하기 위하여 눈을 감을 뿐만 아니라 입술을 닫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눈을 감는 이유는 악한 계획을 강구하기 위해서요 그가 입술을 닫는 이유는 악한 계획을 결단성 있게 또는 힘 있게 행하기 위해서입니다(박윤선). 이러한 패련한 자는 잠언 6장 19절을 보면 거짓을 말하여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16장 28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패련한 자는 거짓말과 수군수군하므로 형제 사이나 친한 친구 사이를 이간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단은 자꾸만 우리 형제, 자매의 관계를 이간질 시킵니다. 사단은 우리가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기에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이간질 시켜 다투게 만들고 결국에서 멀리하게 만들어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사단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마음에 패역을 품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악한 계획을 세우고나 악을 꾀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실 된 마음을 품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웃 사랑하는 선한 계획을 세우고 도모해야 합니다.
(3)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고자 하는 악한 욕구란 강포함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29절을 보십시오: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여기서 “강포한 사람”이란 남을 해롭게 하는 악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불선한 길” 곧, 멸망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 갑니다(박윤선). 우리가 잠언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강포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7장에서 우리는 말로 호리는 음녀(5절), 간교한 계집(10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소년(7절)을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어서(21절) 결국에는 그 소년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한다(23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고자 사단은 오늘도 자꾸만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해롭게 하여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배반케 하려고 사단은 부지런히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 영적 싸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시편 119편 11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주님께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으로 사단의 유혹을 싸워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육체적 욕구와 영적 욕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를 독촉하는 육체적 욕구인 배고픔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욕구를 영적 화하여 우리의 영적 식욕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계속해서 자라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케 만들고자 독촉하는 자기기만과 악함과 싸워 승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