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자기 목적에 맞도록 만드신 하나님

 

 

[잠언 164-9]

 

 

전도서 3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삶 가운데 역사(일)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아가십니다(Wiersbe).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전도서 3장 2절부터 8절까지 여러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 모든 때를 저는 한 다섯 개로 나눠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우리는 태어날 때도 있지만 분명히 죽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남과 죽음이란 나무로 말한다면,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사람은 태어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사람은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나무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오직 주님의 뜻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오직 주님의 영광이 들어나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인생의 삶과 죽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뤄 나아가시므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자기 목적에 맞도록 만드셨으므로 악인들도 재앙의 날을 위해 존재한다.”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자기 목적에 맞도록 만드신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한 3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16장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지금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목적 있게 지으셨다고 말씀하면서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악도 지으셨다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지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 시편 5편 4절을 보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입니다(박윤선). 그리고 악은 거룩하신 주님과 함께 유할 수(거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도 지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악의 근원”(Origin of Evil)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셨지만 악을 지으신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때 그러면 악이란 누가 지으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 창세기 1장 31절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매우 선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절에 가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피조물이 선한 가운데 갑자기 뱀이라는 악한 피조물이 등장합니다. 그 결과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며 죄를 범케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한 세계에 이렇게 죄악의 세력이 나타나고 심지어 가속화되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 등 이러한 죄악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즉, 의문은 뱀으로 등장하는 악마는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 정체는 무엇인지, 이러한 악의 근원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의 근원이신 데 악이 어떻게 발행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인터넷). 이 대답은 우리의 지식 밖이라 생각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한 천사가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 자리를 넘보다가 추방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되었다는 것(벧후 2:4, 유 1:6)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지만 그 떨어진 천사가 어떻게 교만해 졌는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이 나온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그 악을 영적 세계에서 없애시지 않으셨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왜 하나님께서 영적 세계에서 떨어진 천사인 사단을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천지창조 후 에덴동산에 뱀으로 하여금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도록 놓아두셨을 까라는 의문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는데 왜 그 악과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실까 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잠언 16장 5절을 보면 성경은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악인을 미워하심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시는 것일까요? 분명한 사실은 오늘 본문 잠언 16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목적은 있다고 성경에 써 잇는데 과연 그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지으시지 않는다. 그는 악을 미워하신다(시 5:4). 악인이 악해진 것은 악인 자신이 책임을 질 일이다. 그러나 그건 어떤 사람의 악으로 기울어짐을 방임하신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도 그의 거룩하신 뜻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악인의 회개를 오래 참아 기다리시는 덕과, 및 그가 마침내 악인을 벌하시는 공의의 빛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롬 2:4-5, 9:17).”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에스겔서 33장 11절이 생각납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시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목적은 만일 그 교만한 악인들이 회개하지 않을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냥 남겨주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모세 시대 때 교만한 애굽 왕 바로입니다. 출애굽기 14장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 악인이요 교만한 바로 왕도 사용하시사 홍해 바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 앞에서 교만한 바로 왕과 그의 군대를 다 전멸시키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크신 은혜와 진실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만한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시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 16: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오늘 본문 잠언 16장 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와 서로 단합하는 자도 벌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입니다(박윤선).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시는 이유는 그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욘 4:2)이시기에 그분은 교만한 악인들도 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길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잠언 16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을 속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인자하신 성품으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로 하여금 희생의 피(대속자의 피)로 속죄하는 제도(진리)의 해택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박윤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교만한 악인을 심판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의 구속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의 대속 죽음과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16장 6절 하반절과 7절에서 한 2가지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에서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저와 여러분은 영원히 죽어 마땅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대속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때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8장 13절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 또한 미워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언 16장 7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과연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잠언 16장 5-6절 말씀에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계명(뜻)은 ‘겸손하라’(5절), ‘사랑하라’(6절), ‘진리 가운데 거하라’(6절) 그리고 ‘악에서 떠나라’(6절)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라도 우리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실 것입니다(7절).

 

둘째로, 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적은 소득, 불의한 사람에게는 많은 소득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16장 8절을 보십시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이 두 번째 질문 또한 우리로 하여금 퍼즐(puzzle)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잘 믿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적은 소득을 허락하시고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악을 행하는 불의한 사람에게는 많은 소득이 있도록 그냥 내어 버려두시는지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질문을 던질 때 생각하는 말씀은 시편 73편입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 아삽이란 사람도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여(3절) 자기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했기 때문입니다(2절). 여기서 악인의 형통이란 악인들은 다른 사람과 같이 고난이나 재앙도 없으므로(5절) 교만하고 강포할 뿐만 아니라(6절) 특히 그들은 소득이 마음의 소원보다 많은 것을 가리킵니다(7절). 이렇게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더하는(12절) 악인들의 모습을 볼 때 시편 기자 아삽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도 충분히 질시하여 실족할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잘 믿는 의인들은 소득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다 그렇지 않은 줄은 저나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소득이 많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소득이 그리 많치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의를 소유하려면 물질적으로 풍부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잠 15:16) 자기의 수입에서 남들을 돕는데 많이 사용하고 축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호화롭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활에서 만족과 행복을 누린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박윤선).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16장 8절에서 “적은 소득”과 “많은 소득”만을 대조할 뿐만 아니라 “의”와 “불의” 또한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소득이 적고 많음이 아니라 “의”가 있느냐 아니면 “불의”가 있느냐 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 사람들의 본능과 대조적입니까? 보통 우리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소득이 많고 적음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더 민감하고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은 우리가 물질(돈)이 많으냐 아니면 적으냐를 중요시 여기기보다 우리에게 “의”가 있느냐 아니면 “불의”가 있느냐를 더 중요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적은 소득이 있을지라도 의를 겸하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 불의를 겸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자들이 많은 소득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기 때문입니다(잠 13:22).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쌓아놓는 재물은 결국에 가서는 의인들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불의한 자들로 하여금 탐심으로 물질을 모으도록 내어 버려두시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의 모든 재물을 의인에게 주신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전도서 6장 2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 폐단을 보았는데(6:1) 그 폐단은 사람에게 무거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8:6). 사람에게 무거운 그 폐단이란 하나님께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다 받아 마음의 소원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 모든 것을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누구로 하여금 그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까? 전도서 2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수고케 하시고 저들로 하여금 재물을 모아 쌓게 하신 후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 모든 죄인의 재물을 주시사 누리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은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롬 4:25). 과연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우리는 악인의 많은 소득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의 많은 소득은 고통이 된다고 잠언 15장 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 중에 하나는 그 악인으로 하여금 번뇌케 하는 것입니다(16절). 또한 악인의 그 많은 소득은 오히려 그의 양심에 늘 괴로움이 있을 수 있고(딤전 6:10) 또한 그의 심령은 늘 어두워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마 6:23-24)(박윤선). 악인의 많은 소득은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Who is the LORD?)라고 말하게 만듭니다(잠30:9).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많은 소득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우리는 불의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많은 소득을 가지고 죄를 범하면서 악인의 길을 걸어가기보다 적은 소득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면서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미워하고(13:5) 진리를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19). 또한 우리의 입술은 마치 양약 같아서(12:18) 선한 말로 상대방을 즐겁게 하며(25절) 또한 우리 이웃을 구원하며(6절) 또한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26절). 또한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13:4). 그리고 우리는 정직히 행해야 합니다(6절).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며 존경하므로(13절)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15절).

 

셋째로,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계획을 세우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16장 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지난 주 잠언 16장 1-3절 말씀 중심으로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제목 아래 한 3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는 마음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 (2) 우리는 우리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3) 우리는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 솔로몬 왕이 잠언 16장 1절에서 말한 “마음의 경영”은 우리 사람들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19:21).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아무리 우리 마음에 계획이 많이 있을지라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라는 것입니다(21절).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울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이 완전히 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잠언 16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이 완전히 선다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책임인 마음의 계획들을 세워야 합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 인간의 책임을 생각할 때 에스겔 36장 3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들을 주시고 그 약속들을 그의 주권 속에서 이루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약속들이 이뤄지길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주권적으로 이루어 나아가시니까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길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 인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책임인 마음의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합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는 믿음으로 마음의 계획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계획을 세울 때 우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3:5). 결코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아니 됩니다(5절).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6절). 하나님을 인정하되 우리는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대적하는 악인들도 사용하셔서 그분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나아가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4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사를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16:3).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영하는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3절). 한 마디로, 마음의 경영을 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believing heart or faith)이 있어야 합니다. 즉,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 경영자의 바람직한 마음 상태는 바로 신뢰함(trustfulness)입니다.

 

(2)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야 합니다(16:1).

 

기도로 아뢰되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뤄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마음 상태는 바로 겸손함(humility)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경영을 하는 우리에게는 겸손한 마음(humble heart)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히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16:5). 그러므로 겸손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 의뢰할 뿐만 아니라 많은 “모사”(many counselors)와도 “의논”(consultation)도 합니다(15:22). 다시 말하면,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진정한 모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선배들에게 상담도 받고 그들에게 지도도 구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충고와 견책도 겸손히 듣습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마음 상태는 바로 지혜로움(wisdom)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경영을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운 마음(wise heart)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관점”(2절)이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25절)보다 “하나님의 관점”(God’s perspective)으로 자기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즉,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심령”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2절). 비록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기에 자기의 행위가 모든 깨끗하게 보일지라도(2절)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속하여졌다는 사실(6절)을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납니다(6절). 즉,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람직한 마음 상태인 지혜로움에서 바람직한 행동패턴인 지혜로운 행동을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게 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7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 목적에 맞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시는 목적은 그들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교만한 악인들이 회개하지 않을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냥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적은 소득, 불의한 사람에게는 많은 소득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으로 하여금 적은 소득으로 의인의 삶을 살게 하시는 가운데 결국에 가서는 불의한 사람의 많은 소득을 의로운 사람에게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계획을 세우라고 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책임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하시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겸손히 그리고 지혜롭게 마음의 계획들을 세우므로 온전히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를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1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