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언 161-3]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기 경영과 남은 인생의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계십니까? 몇 년 전 우리 교회에도 오셔서 가정 세미나를 인도해 주신 박수웅 장로님은 그의 책 “박수웅의 자기 경영”에서 자기 경영과 남은 인생의 계획을 이렇게 세우셨습니다(박수웅): 먼저 “2002년 자기 경영표”를 보면 자기 경영의 주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자(마6:35)”입니다. 그리고 자기 경영의 “목표”는 “인격과 삶과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건강하고 균형 있게 자라 성령 충만의 열매를 주 하나님 안에서 이루자(살전 5:23-24, 갈 4:19, 수 14:6-15)”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경영에 있어서 “삶의 영역”과 “사역”, 이렇게 두개로 구분하였는데 삶의 영역을 보면 “영적생활”, “지적 생활”, “정서적 생활”, “건강생활”, “가정생활”, “직업”, “교회 생활” 그리고 “재정”으로 나누었고 사역의 영역을 보면 그분이 섬기고 있는 “JAMA(전 세계 예수 대각성 운동)”, “KOSTA(전 세계 유학생 수련회)”, “CCC(대학생 선교회)”, “가정 사역(Family ministry)”, “그리스도의 대사(Christ’s ambassador)”로 나누었습니다. 특히 그의 삶의 영역에서의 영적생활을 보면 그는 말씀으로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QT(말씀묵상)의 생활화, 인격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무릎으로 하나님께(Knee-mail) 나가는 것과 시편 119편 9-11절대로 내 사고를 하나님 말씀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건강 생활”에는 “살찌지 않도록 절제된 식생활을 지키자, 일주일에 한 번 골프로 운동하자, 규칙적인 생활로 규모 있게 살자”라고 목표를 세우셨고 “직업”에는 “병원 일은 파트타임과 시간제 근무로 바꾸자, 병원 동료들에게 양보하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자, 찬송하는 의사로 복음을 증거 하자, 직장이 하나님 나라 되록 Peacemaker(화평케 하는 자)가 되자”라고 목표를 세우셨습니다. 또 하나 그의 “미래 이력서”를 보면 그는 1998년(그의 나이 54세)부터 2023년(79세)까지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론 그분의 연세가 지금 거의 칠순이 다 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분의 60세(2004년)부터의 계획을 보면 “병원에서 은퇴하다”, “집 구매를 위한 은행 융자 완전 청산하다”, “막내아들 … 결혼으로 2남 1녀 자립시키다”, “전 세계로 사역 범위 넓히다”라고 시작해서 2006-2010년(62-66세)을 보면 “후배들 사역 현장에 동참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비전에 충성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60대 초반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비전에 충성한다는 것, 우리에게 도전이 되지 않습니까? 그의 2011-2020(67-76세) 계획을 보면 “멘토로서 후배 양성하고 동역하다”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주님 형상 닮는 데 주력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 계획은 “생을 마무리하는 네 번째 책 발간하다”, “미래 이력서에 쓴 대로 비전 완성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다” 그리고 “천국 입성 준비하다”라고 그는 적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미래 계획서 입니까? 우리도 도전을 받아서 오늘 이후로 우리 각자의 “자기 경영표”와 “미래 이력서”를 한번 써보면 어떨런지요?

 

오늘 본문 잠언 16장 3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제목 아래 오늘 본문을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마음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1절을 보십시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경영”(the plans)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서 그 의미는 “계획들”(plans) 또는 ‘고려하는 것들’(considerations)란 의미로서 정돈되고 목적이 있으며 정리된 아이디어들로서 미래의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plans, considerations, i.e., an orderly, purposed, arrangement of ideas with regard to future actions(Swanson)].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마음에 미래의 행동에 관한 정돈되고 목적이 있으며 정리된 아이디어들, 즉 미래의 계획들이 있습니까? 오늘 이 본문 1절 말씀은 좀 오해 요지가 있는 성경구절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다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라고 하니까 ‘아, 우리가 마음으로 미래에 관한 계획들을 세워보았자 결국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이 이뤄지니까 우리는 인생의 계획들을 세울 필요가 없어’라고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과 우리 인간의 책임(our responsibility) 사이의 긴장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겸손히 그리고 신실하게 감당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래 전 어느 형제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주권 속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이 있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책임인 전도(복음전파)와의 긴장 상태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복음 전파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영혼들이고 누가 아닌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은 참 위험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1절에서 성경은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 로서 나”니까 여러분은 마음의 경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의 계획들을 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사람들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계획을 세우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잠언 19장 21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우리가 마음에 많은 계획들을 세울 때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지길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미래 계획들을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박수웅 장로님처럼 자기 경영에 있어서 주제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자”인 것처럼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계획들을 세울 때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면서 계획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지만 그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의 계획들을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계획들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지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2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우리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대방의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좋은 예가 바로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므로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셨는데(1절)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인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라고 했습니다(6절). 그 때 하나님께서 7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조차도 엘리압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때 틀릴 확률이 참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람들은 마음의 동기가 불순하면서도 겉으로는 옳게(바르게) 행동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깨끗하다’라는 말은 ‘흠 하나 없는’(flawless)라는 말입니다(Swanson). 즉, 우리 사람의 본능은 자기 보기에 자기 행위가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우리의 잘못(결점)을 보고 지적해도 우리는 부인할 뿐만 아니라 기분이 상하여 역정을 낼 정도로 자기가 잘못이 결코 없다는 것을 변호하기까지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셔도 우리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식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우리는 구약 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들 수가 있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말 1:6-7).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제사장들에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제사장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6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드렸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7절). 결국,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자기들 보기에 자기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았고 주님을 더럽게 하지 않았다고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생각할 때 저는 그 원인인 말라기 1장 2절 상반절에 적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경험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자기들 스스로 보기에 아무 잘못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보기에 자기의 행위가 옳다고 생가하든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 참 위험합니다. 그 위험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 범죄를 죄를 여기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기에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어떠한가?’라는 식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삼상 16:7).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잠 16:2).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계획하고 있는 것들, 과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동기는 불순하면서 겉으로 사람들 보기에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 21장 2절 말씀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6장 3절을 보십시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여기서 “맡기라”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굴려 버리라”(roll)는 뜻입니다. 즉, 마치 돌을 굴려 버리듯이 진심 어린 마음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행사를 맡겨 버리라는 말입니다(Swanson).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께 행사를 다 맡겨 버린다고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다시금 염려하고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돌을 굴려 버린 후 다시금 그 돌을 찾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돌을 굴려 버렸다는 것은 우리의 손에 이미 그 돌이 떠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우리의 행사를 다 맡겨 버렸다는 것은 이젠 우리가 돌에서 손을 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맡겨 버렸다고 한 기도 제목으로 인하여 다시 걱정하고 염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다 맡겨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 “굴려 버리다”라는 단어가 시편22편 8절과 37편 5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시 22:8),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37:5). 시편 기자는 ‘맡기라’라는 단어와 함께 ‘의지하라’와 ‘의탁하라’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길을 의탁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잠언 16장 9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가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이유는 잠언 19장 21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우리가 마음에 많은 계획을 세울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설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책임인 마음의 계획을 세울지라도 온전히 그 계획들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맡기되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계획들을 다 맡겨 버려야 합니다(마26:39).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계획하는 것들을 이루실 것입니다(시 37:5).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남은 인생을 계획 세워야 합니다. 계획을 세우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마음 자세로 우리 삶을 계획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의 계획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뤄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