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통, 마음의 즐거움

 

 

 

[잠언 1410-35]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고통스러우십니까?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고통스러우시면 왜 고통스러우신 것인지요?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즐거우시면 왜 즐거우신 것인지요?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고 기쁨을 나누면 배로 늘어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와 여러분이 우리 각자가 삶 속에 겪는 슬픔이나 기쁨을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잘 나누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좀 하는지 모를지라도 왠지 우리 각자의 슬픔을 잘 나누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슬픔을 나눠도 상대방이 우리의 슬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 각자가 겪고 있는 슬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마음에 있는 슬픔이나 기쁨은 어느 누구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한 몸인 내 아내나 내 남편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주님 안에서 한 몸이 된 교회의 지체들도 우리 각자 마음의 슬픔이나 기쁨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2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생각할 때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 지체들이 서로를 체휼하길(sympathize) 원하시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로 세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0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마음의 고통, 마음의 즐거움”이란 제목 아래 한 2가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고통입니다. 언제 우리 마음에 고통이 있는지 한 8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집이 무너질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 여기서 “집”이라 함은 한 주석에 의하면 가족 식구들(family members) 이란 뜻도 있지만 또한 소유(물)(possessions)를 뜻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Walvoord). 만일 이 해석이 맞는다면, 이 11절 상반절 말씀은 악한 자의 집, 곧 그의 가족 식구들이나 소유(물)는 다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악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이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이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 시73).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의 집은 일시적으로 흥하게 보일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멸망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악한 자의 죄악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집을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우리 그리스도인(의인들)에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 믿는 자들의 집도 회개치 아니한 죄악들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우리 집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집은 그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 중에 하나는 바로 우리의 생활이 곤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3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욕되게 하다’는 말은 “부족, 혹은 곤고”를 가리킵니다. 즉, 백성이 죄가 많으면 그 생활이 곤고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물론 이 말은 한 나라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생활이 곤고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원리는 우리의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가정도 죄가 많으면 생활이 곤고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 가정이 당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고통은 바로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이 말씀도 한 나라의 욕을 끼치는 신하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우리가 가정에 적용해 볼 때 한 가정에 죄가 많으면 생활만 곤고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이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삐뚤어 나아가면서 많은 죄를 범하므로 부모님에 욕을 끼치고 가정을 부끄럽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모들이 죄를 많이 범하므로 자녀들에게도 욕을 끼치고 가정에 큰 수치를 안겨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안을 가리켜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집이 많은 죄로 인하여 콩가루 집안이 되어가고 있다면 분명히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와 우리 집안의 죄를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우리 집안의 죄를 용서하시사 모든 죄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고통을 돌이켜 우리 마음에 기쁨(즐거움)을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보기엔 바른 길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이 아닌 길을 우리가 걸어갈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2절을 보십시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 말씀은 잠언 16장 25절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어떤 길은 사람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하였는데 왠지 이 말씀을 솔로몬 왕에게 비춰볼 때 그가 보기에 바르게 행한 길은 그가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여(왕상 11:1) 그녀들과 연애한 것이라(2절) 생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 서로 통하면 저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2절)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여 많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여 연해했습니다(2절).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열왕기상 11장 4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결국 그렇게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도 나이 늙어 우상 숭배를 하며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찍이 두 번이나 나타나 “다른 신을 좇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9-10절)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10절). 그는 결국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믿어서 선택한 길이 사망의 길인 것을 늦게나마 깨닫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러분, 잠언 15장 25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므로 죄를 범하였던 교만한 솔로몬에게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 때 이스라엘 나라를 두 개로 찢으셨습니다. 이렇게 한 나라가 두개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3장 24-26절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우리 집안이 스스로 분쟁하면 우리 집은 견고히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안에 분쟁이 있으면 온 가족 식구들은 마음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웠다고 하는 솔로몬 왕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여 선택한 길이 결국에는 사망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 본문 잠언 14장 12절에서 우리에게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 바른 길이라 할지라도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서 과연 우리 보기에 바른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바른 길인지 아닌지 점검하고 또 점검해 봐야합니다. 점검하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우리가 보기에 바른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실 때 우리는 그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고통을 돌이켜 마음에 즐거움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즐거움을 추구할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3절을 보십시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속한 즐거움이 순전하지 못하고 길지 못함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즐거움, 곧, 육체의 기쁨이 있은 뒤에는 슬픔이 뒤따른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솔로몬 왕을 보십시오. 자기가 보기엔 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나 첩으로 두는 것이 바르게 보여서 그녀들을 옆에 두었다가 결국 나중에 늙어서는 그녀들의 우상들을 섬기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그 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나 첩으로 두었을 때 그가 얼마나 웃고 즐거워했겠습니까? 그러나 나중엔 그녀들로 인하여 솔로몬 왕이 얼마나 근심하고 슬퍼했겠는가 생각할 때 이 세상의 육체의 즐거움 뒤에는 분명히 슬픔이 뒤따른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의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아도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과 기쁨 등을 추구했었지만 결국 이 세상이 저에게 준 것은 슬픔과 눈물이었습니다. 특히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중 두 명이 총에 맞아 숨져서 장례를 치루면서 이 세상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슬픔과 눈물이라는 사실을 좀 더 뼈저리게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없기에 스스로 자기 자신 만을 믿고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하면서 방자하게 살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고자 방탕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노하기도 속히 하여 어리석은 일들을 많이 행한다고 오늘 본문 1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어리석은 자는 오늘 본문 29절 하반절을 보면 마음이 조급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어리석음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습니다(18절). 이러한 어리석은 자는 비록 겉으로 웃고 즐거워하지만 결국에 남는 것은 마음에 근심과 슬픔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3절을 보십시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얼굴을 빛나게 하는 마음의 즐거움 보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음에 슬픔이 있는 웃는 얼굴을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겉으로 항상 웃는 사람들을 볼 때 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항상 웃고 있는 얼굴 뒤에는 근심의 빛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웃고 있는 얼굴이 빛나지 않는 지체들을 볼 때 마음에 슬픔이나 근심을 포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우리의 얼굴은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그 뒤에는 결국 슬픔과 근심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우리의 마음이 패려하면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 여기서 ‘마음이 패려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원래의 악습으로) 되돌아가다, 타락하다’[backslider in heart(Walvoord)]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하고 변화하면 좋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신앙성장이 멈춘 것 같고 오히려 퇴보해 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싸인 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에 종종 나타나는 안 좋은 현상 중에 하나가 우리가 진리를 떠나서 살면서 거짓을 좇고 실제로 우리가 또한 거짓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 마음이 패려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을 믿고 거짓을 추구하며 거짓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5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a false witness is deceitful)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이되 만일 우리 마음이 패려하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악한 계교를 꾀합니다(6:18).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남을 해할 계교를 꾸미게 됩니다(박윤선). 그리고 우리는 악을 도모하게 됩니다(14:22). 만일 우리가 이렇게 악을 도모하고 악한 계교를 꾸미고 있다면 우리의 패려한 마음에는 기쁨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오히려 패려한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4절).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 후 그것을 회개치는 않고 얼마 동안 덮어 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소리치며 그 사람을 잡는 날이 온다(약 5:4; 창 4:10). 다시 말하면, 범죄자는 자기가 친히 솔선해서 자기 죄를 잡아내어 그것을 회개하므로 해결해야 된다. 그가 그리하지 않고 넘겨 버리면 그 죄가 그를 따라잡아 그에게 보복을 하고야 만다”(박윤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가 우리를 따라잡아 우리에게 보복을 하고야 만다는 말이 한쪽으로는 동의하면서 또 다른 한쪽으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회개치 않은 죄에는 분명히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속이고 속임을 당했던 야곱이 애굽에 내려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 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이 야곱의 고백을 생각할 때 저는 창세기 37장 34-3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수염소의 피가 묻은 채색 옷을 보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였을 때 자신의 모든 자녀들의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하고 요셉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패려하여 하나님을 떠나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고 할 때 그러한 우리의 거짓 행동에는 분명히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란 자기 자신도 속임을 당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고통과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고통과 슬픔에 잠기지 않기 위해선 우리 마음이 패려해 지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신실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가 타락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고통을 돌이키시사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가 온갖 말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경험, 지식 부족 등으로) 순진해 빠진”, “(모자랄 정도로) 순진한”(naïve) 또는 “남을 잘 믿는, 잘 속아 넘어가는”(gullible)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쉽게 다른 이에게 영향을 받습니다(Walvoord).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4장 8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but the folly of fools is deception)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남을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남을 잘 믿고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의 온갖 말을 믿습니다(14:15). 그 한 예가 바로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7장 7절부터 나오는 말로 호리는 간교한 계집에게 빠진 (5절) 한 지혜 없는 어리석은 소년입니다(7절). 그 소년은 그 간교한 계집의 떠드는 소리와(11절)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의 꾀임(21절)에 넘어가 그녀를 따르되 마치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이,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이 했습니다(22절).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과는 바로 그는 상하여 엎드러짐과 심지어 사망하기까지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6-27절). 우리가 너무 순진해 빠져서 남의 말을 잘 믿고 잘 속아 넘어간다면 우리는 마음에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남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남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마음이 고통을 겪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20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편애(favoritism)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편애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습니다(약2:1; 참고: 요7:24). 그래서 교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2절)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말하면서(3절)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2절)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3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우리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이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요(4절) 우리는 가난한 자를 괄시하는 것입니다(6절).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기를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9절).

 

오늘 본문 잠언 14장 21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이웃”이란 특히 20절 상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한 자”(the poor) 또는 2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빈곤한 자”(the needy)를 가리킵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은 사회로부터 미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20절)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21절). 그리고 심지어 그들은 학대를 당하기도 합니다(31절). 그러다 보니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은 부자들을 시기하는 현상이 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 30절 하반절에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but envy rots the bones)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 이 사회에서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은 부자들을 시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국 이렇게 서로 시기하고 서로 미워하며 업신여기며 학대하는 사회에서는 평화가 있기보다 고통과 슬픔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그리할지라도 교회란 공동체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을 구별(차별)하여 편애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도 차별과 편애가 있다면 가난하고 빈곤한 형제들은 미움을 받으므로 마음에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편애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우리가 말만하고 행함이 없을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여기서 “입술의 말”이란 실행 없이 말만 하는 것(욥 11:2; 사 36:5)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렇게 입술로 말만하고 행동이 없는 자는 궁핍을 이룰 뿐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14:23). 과연 말만하고 실행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궁핍을 이룹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한두 가지로 말하였습니다(박윤선): (1) 그는 육신 생활에 궁핍해집니다. 그 이유는 그는 말만 하고 돌아다니는 게으른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게으른 자는 수고롭게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창3:19)을 어기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벌로 궁핍해집니다. (2) 말만 하고 실행이 없는 게으른 자는 영적 생활에도 궁핍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령한 것에 대하여 말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데 어떻게 영적 생활이 풍부해 질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면서도 우리를 육신 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풍부함을 추구하기보다 자꾸만 궁핍함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입술로 말만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사실조차도 말만할 때가 많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만큼 우리 연약한 인간은 말하기는 속히 하는데 행동이 느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본문 잠언 14장 24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but the folly of fools yields folly). 무슨 뜻입니까? 미련한 자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미련하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미련한 자는 마음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말을 하고 실행으로 즉시 옮기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갈 때 마음에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덟째로, 우리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3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 여기서 “악인”이란 말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그 악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엎드러진다’는 말은 몰리워 간다(driven away)는 뜻으로, 강제로 끌리움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즉,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악인은 환난으로 몰리워 간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악인을 심판하시되 환난으로 그를 삼키게 하시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고도 그 범한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결국 우리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회개치 않은 죄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도 기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더욱더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음에 고통이 더욱더 심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환난을 당할 때 혹여나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 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춰내시사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고 회개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즐거움”입니다. 언제 우리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지 한 7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장막이 흥할 때에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악한 자의 집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가정은 생활의 곤욕을 당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그러나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한다고 오늘 본문 11절 하반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직한 자, 곧 진실하게 죄를 자복하고 주님을 믿어 그분의 의를 받은 자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에 그는 장막에 거한다는 말입니다(박윤선). 물론 이 말은 우리가 다 집을 팔고 장막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솔로몬 왕은 “악한 자의 집은…”이라고 말한 후 정직한 자의 “집”이라고 말하지 않고 “장막”이라고 말한 이유는 정직한 자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에 것을 생각하며 살지 않고 오히려 위에 것을 생각하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장막은 흥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참고: 히 11).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집은 천국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 소망을 두고 내세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흥하게 하실 것입니다. 흥하게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집과 교회를 번영케 하실 것이며 또한 안정케 하실 것입니다(Walvoord). 한 나라도 마찬 가지라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위정자들이 정직하여 나라를 공의로 잘 다스릴 때 그 나라는 “의의 나라”로 세워질 것입니다(34절). 그리할 때 그 의의 나라에는 백성이 많아질 것이요(28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높여주신다(“영화롭게 하고”)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영과 안정이 있는 나라나 교회나 집에 거하는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며 하루하루 살아갈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진실하게 살아갈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만일 우리 마음이 패려하면(14절)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을 믿고 거짓을 추구하며 거짓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을 뱉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속일 것입니다. 속이되 만일 우리 마음이 패려하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악한 계교를 꾀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남을 해할 계교를 꾸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을 도모하게 됩니다(22절). 이렇게 패려한 마음에는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면(14절), 즉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아 영혼이 만족하여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마음이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33절 상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명철한 자”처럼 우리가 깨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 심령 가운데 간직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 나아갈 때(박윤선) 우리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되 진실한 성도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 사람의 생명을 구원함으로(25절) 구원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만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여기서 “슬기로은 자”란 참으로 주님만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박윤선). 그리고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습니다(18절하).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기 자신의 행동을 삼가하여 어리석은 자처럼 순진하여 무조건 남의 말을 믿고 그 말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남의 말을 바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가운데 오직 주님의 뜻만을 찾아 그 주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4장 8절을 보면 성경은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시하기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걷지 않고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자기 뜻대로 자기가 걷기를 원하는 길을 걷지만(8절상)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갈 길을 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슬기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향하신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기가 할 일을 바로 알고 그 일을 행합니다(고전 7:17).

 

여러분, 오늘 본문 잠언 14장 35절 상반절을 보면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슬기롭게(지혜롭게) 행할 때에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은총을 우리가 입을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게 주님 보시기에 슬기롭게 행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에 우리 또한 마음에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서 살아갈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없기에 스스로 자기 자신만을 믿고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하면서 방자하게 살아갑니다(16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에 이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이 세상에서 슬픔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악을 떠나 살아가므로 그의 삶에는 안전감이 있습니다(26절). 오늘 본문 잠언 14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사망의 그물에서도 벗어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7절).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 갈 때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2절). 즉, 우리는 죽음에도 피난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32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들로서 악을 떠나 살면서 어떠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의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26절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며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겨 나아갈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19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악인과 불의자들이 선인과 의인 앞에 엎드러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선인과 의인이 악인과 불의자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왠지 우리가 이 악한 세상을 바라보면 악인과 불의자가 선인과 의인을 이기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보다 더 힘이 좋아서 선인들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악인들이 선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지금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인과 의인이 악인과 불의한 자를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선인들이 악인들을 이긴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굴복한 일(창 42:6)이나 애굽 왕 바로와 그 백성이 모세 앞에 굴복한 일(출 8:28, 9:27, 12:31-33),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고한 악인들이 도리어 사자 굴에 던짐이 된 것(단 7:27), 그리고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교수대에서 하만 자신이 죽임을 당한 것(에 7:9-10) 등 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박윤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악에게 지면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겨 나아간다면 우리 마음에는 승리의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14장 22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많은 준비를 가지고 중단됨 없이 힘써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사랑)를 베풀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아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도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힘써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실 것입니다.

 

여섯째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21절을 보십시오: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업신여길 때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414장 “주의 사랑 비췰 때에”란 노래 1절 가사를 보십시오: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췰때 기쁨 오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4장 21절 하반절을 보면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존경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31절). 그 말은 우리가 입술로 주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만 아니라 행동으로는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겨 사랑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29절 상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크게 명철함(great understanding)입니다. 우리가 크게 명철할 때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노하기를 더디 할 것입니다(29절). 또한 우리는 마음이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겸손히 우리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웃들과 관계에서 마음에 화평을 누길 것입니다(30절).

 

일곱째로, 우리가 열심히 수고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2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 우리가 잠언을 묵상하면서 솔로몬 왕은 게으름과 부지런함에 대해서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 말들의 요점은 우리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4장 23절 상반절에서도 솔로몬 왕은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만하고 아무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궁핍을 이루는 반면에(23절)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부지런한 사람은 이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에게 어떠한 이익이 있을까요?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부지런한 사람은 부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0장 4절을 보십시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고 말씀은 부지런한 자는 부지런히 일을 하되 특히 추수 때인 여름에 자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수확한다는 말입니다(5절). (2) 부지런한 사람은 먹을 것이 많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2장11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부지런히 일을 하여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게 되면 당연히 그 이익은 먹을 것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3) 부지런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다스리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2장 24절을 보십시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부지런한 자는 다른 이를 다스리게 되기에 그것 또한 부지런함의 이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익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부지런하여 열심히 수고하면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종종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찬송가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라는 노래를 찬송하곤 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그 “회개의 사죄”의 노래를 하나님께 부르다 보면 참으로 이 세상에는 고통이 많고 우리가 낭패와 실망을 당할 때도 참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들이 많겠지만 오늘 본문 말씀의 비춰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가 교만한 마음으로 보기엔 바른 길인 줄 알고 그 길을 걸을 때와 이 세상에 속한 즐거움을 추구할 때, 말만하고 행함이 없을 때 그리고 회개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330장을 부르면서 저는 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복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어서 그 찬양을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슬프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또한 실망한 이 몸 힘을 주심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으로 주님만 믿고 주님의 뜻대로 살길 원합니다. 진실하게 살길 원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열심히 주님의 일에 수고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가정을 흥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