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
[잠언 11장 1-31절]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기쁨이 되는 자녀이십니까? 혹시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여러분은 그 부모님에게 큰 기쁨을 주는 자녀이셨습니까? 어제 화요일 오후에 저희 집 막둥이 예은이는 방과 후로 보내고 첫째 딸 예리는 제가 데리고 학교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예리가 학교에서 Spelling Test가 있어 좀 늦게 끝났기 때문입니다. “Spelling Test”란 아마 4학년에서 6학년까지 각반 대표 학생들을 뽑아서(?) 수많은 영어 단어들을 외우게 한 후 시험을 치르는 것인가 본데 이번에 12명이 대표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방과 후 선생님에게 예은이만 좀 데려가 달라고 전화로 부탁한 후 예리는 제가 데리러 가는데 이 아이가 좀 일찍 끝났는지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앞에 차를 세우고 태운 후 오늘 시험 어떠했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이겼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잘했다고 칭찬한 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하이파이브(high five)를 했습니다(동시에 한 손을 들어 서로 상대방의 손바닥을 마주쳤음). ㅎㅎ 그리고 나서 엄마와 전화 통화하겠냐고 물었더니 예리가 하고 싶다하여 전화기를 주었더니 엄마하고 예기하는데 speaker phone으로 해 놓아서 저도 들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하나는 제 아내라 예리에게 “I am proud of you”(나는 네가 자랑스럽다)라고 말하더군요. 나중에 딜런과 예은이를 pick up 한 후 제가 차 안에서 예리가 1등을 했다고 말하니까 이 아이들도 기뻐하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세 자녀들을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저는 아이들을 통해서 은혜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 리 부모가 아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양육을 제대로 못함을 느낄 때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주님 안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나면서 각자 맡은 책임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는 모습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가끔 아이들을 보면서 저희 부부가 대화할 때 이 아이들이 저희 부부를 닮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도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아이가 나에게 이런 면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말입니다. 하하. 저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친히 양육하고 계시다는 것을 엿볼 때에 참 마음이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 부부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 자녀들을 더 사랑하시며 제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마음에 안심과 더불어 감사와 기쁨이 저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수요 기도회 때 잠언 10장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자녀와 미련한 자녀”란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먼저 우리 부모님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녀가 되게 해주시길 기도한 후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잠언 11장 말씀 전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인지를 좀 생각하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20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이란 제목 아래 과연 누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인지 한 5 가지로 생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성경의 교훈들을 받아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은 겸손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2절을 보십시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벧전 5:5) 또한 물리치시는 모습(약 4:6)을 참 많이 봅니다.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48장 29절을 보면 “교만”은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그 마음의 거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다 보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이다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 중에 저는 사울 왕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는 처음에 왕이 되기 전에는 스스로 작게 여겼는데(삼상 15:17)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20절) 교만해진 모습을 보고 저 또한 사울처럼 그렇게 변질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 그가 변질된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도(9, 19절)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기보다 변명하면서(20-21절) 끝까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 앞에서 자기를 높여 달라(30절)는 요청을 하는 모습을 볼 때 교만이란 이렇게 한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성경에서는 보는 또 다른 모습은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는 분명히 은혜를 푸신다는 사실입니다(잠 3:34, 약 4:6; 벧전 5:5). 저는 “겸손한 자” 하면 구약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가 생각납니다. 특히 저는 성경 민수기 12장 3절에서 모세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겸손했던 모세, 그러나 모세는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겸손한 모세는 겸손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을 보면 겸손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6-7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이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우리가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5절).
오늘 본문 잠언 11장 2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는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의 뜻은 “교만한 자는 실패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은 교만한 자들은 목을 곧게 하여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느 9:16).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에(29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 사람의 눈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해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실패케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잠 11:2).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실패케 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성공케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겸손한 자들을 성공케 하실까요? 다시 질문하면, 왜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할까요? 그 원인은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2절). 다시 말하면, 겸손한 자들에게는 성공의 비결인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겸손한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잠언 11장에서 지혜로운 자들은 어떻게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한 4 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지혜로운 자들은 침묵할 줄을 압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12절을 보십시오: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지혜로운 자들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겸손하여 그 마음이 신실하기 때문입니다(13절).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신실하기에 두루 다니며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비밀을 잘 숨깁니다. 신뢰를 주는 사람들은 미련하여 상대방 앞에서 이웃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혜로워서 침묵을 해야 할 때 침묵을 합니다.
(2)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모사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14절을 보십시오: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어 자신에게 모사들을 둡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들은 지혜로운 모사들과 의논하여(15:22; 20:18) 지혜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성경을 보면 특히 전쟁에 있어서 다윗 왕은 모사를 등용하여 승리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지혜로운 솔로몬 왕도 모사들을 등용한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삼하 8:15-18; 왕상 12:6)(박윤선). 그리고 그 솔로몬 왕은 잠언 24장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지혜로운 솔로몬 왕도 모사들을 등용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로운 신앙의 선배님들을 모사들로 모시고 의논하며 조언을 구하면서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승리하여 삶에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11:14).
(3) 지혜로운 자들은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15절을 보십시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우리는 이미 잠언 6장 1-5절에서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에 대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 상태를 알면서도 채무 불이행(defaults)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 그 빚을 갚는 책임을 약속하는 것(보증을 서는 것)을 솔로몬 왕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가 만일 보증을 선 것이 사고가 생길 때에 실제로 책임질 것을 각오하지 못한 보증인이나 혹은 남에게 속아서 보증인이 된 사람 또는 책임을 이행할 경제적 실력이 없는 보증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11장 15절에서 다시금 보증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의 핵심은 지혜로운 자는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지혜로운 자는 안전하다(secure)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30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이 성경 구절은 저희 교회 2006년도 주제 구절이였습니다. 그 해 저희 교회 주제는 “사람을 얻는 자가 되라”(Be a Soul Winner!)였습니다. 그 때 오늘 본문 잠언 11장 30절 하반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사람을 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때야 하는지 스펄전 목사님의 책 “The Soul Winner”에서 7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그 7가지를 지혜로운 자와 전복시켜 보았습니다: (a)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거룩한 성품이 있습니다, (b)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높은 수준의 영적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c)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겸손합니다, (d)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살아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e)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진정한 열심이 있습니다, (f)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마음에 큰 단순함이 있습니다, (g) 사람을 얻는 지혜로운 자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들로 하여금 지혜의 길을 걷도록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은 정직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3절을 보십시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여기서 정직한 자의 “성실”이란 그의 중심에서부터 추구하는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직한 자는 의를 사모하며 의의 길로 걷기에 그는 생명에 이른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사악한 자는 그의 패역으로 인하여 자기를 망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하). 그러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망하게 하는 사악한 자의 패역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즉, 사악한 자의 패역은 바로 속이는 저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악한 자의 패역은 바로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사악한 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떠나 거짓을 추구하기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사모하여 의의 길로 걸어가는 정직한 자는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따라 삽니다. 그러기에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오늘 본문 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한 도시가 정직한 자의 축원, 즉 축복 기도로 인하여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한 도시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한 정직한 의인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면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그 한 의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축복들을 보므로 그 도시를 칭찬하고 높이기 때문입니다(Walvoord).
우리가 이러한 정직한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우리 정직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므로 이 도시의 시민들이 우리를 칭찬하고 높일 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높이는 역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지금 여기 저기 도시에서 행하고 있는 성시화 운동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성시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1972년 춘천에서 성시화 운동 총재였던 고 김준곤 목사님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서 그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되 한 도시 내의 전 교회(Whole Church)가 전 도시(Whole City)에 전 복음(Whole Gospel)을 전하는 3전 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시화 운동의 내용은 복음화, 성결화 그리고 복지 화라고 합니다. 즉, 사람마다 복음을 듣게 하여 정의롭고 성스럽고 복스러운 도시를 만드는 운동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이 운동의 목적과 내용을 생각할 때 참 귀한 목적과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과 내용이 실제로 한 도시에서 이뤄지기 위하여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책임은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먼저 정의롭고 성스러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춰 생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의를 사모하며 의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바로 지혜로운 자들이 정직하여 의를 사모하며 의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갑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들은 완전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5절을 보십시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과연 우리 가운데 “완전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완전한 자”란 바로 “행위가 온전한 자”를 가리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다시 말하면, 완전한 자는 행위가 온전한 자요, 행위가 온전한 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란 말입니다. 과연 행위가 온전한 자는 어떻게 행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바로 “공의”(righteousness)를 행하기 때문입니다(5절). 다시 말하면, 행위가 온전한 완전한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속이는 저울”(false balance)을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평한 추”(just weight)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십니다(1절).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시고 공의는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를 행하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곧게” 하신다(God will smooth our way)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의를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는 길에는 거침이 없고 마침내 형통케 하신다는 말입니다(박윤선). 물론 우리가 가는 그 길에는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는 완전한 자들을 그 고난과 역경의 통로의 과정을 통하여 연단시키사 마침내 그 고난과 역경에서 건져주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형통케 하십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자기 자신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다시 말하면, 악인은 자신의 악에 잡혀(6절하) 패망한다(10절)는 말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은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16-17절을 보십시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여기서 ‘유덕하다’는 말은 영어로 “gracious”, 즉 ‘은혜스럽다’ 또는 “kindhearted”, 즉 ‘마음씨가 곱다, 인정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유덕한 (여)자들은 인정이 많아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인자한 자”란 ‘자비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은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자들이란 말입니다.
(1)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자들은 삼갑니다.
잠언 11장 22절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구약 당시 여자는 자가 자신을 아름답게 하고자 코걸이라는 장식품을 하였습니다(MacArthur). 그런데 지금 솔로몬 왕은 삼가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여인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돼지 코에 금 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 여러분은 상상이 되십니까? 아니 금으로 만든 코걸이를 돼지 코에 해 놓으면 돼지가 아름답게 보입니까? 아니잖습니까? 지금 솔로몬 왕은 삼가지 않는 여인, 즉 도덕적으로 불결하게 행하여 파렴치한 여인은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굴은 아름다우나 행실이 방종스러우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체의 얼굴을 아름답게 화장해 놓은 것과도 같다. 그것은 사실상 흉한 것이다”(박윤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여인은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여인이요 그러한 여인은 도덕적으로 정결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행위는 신중하며 분별력 있게 자기 재량껏 일을 잘 처리하는 여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인정이 많아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며 또한 은혜를 베풀되 신중하게 자기 재량 것 잘 베풉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입니다. 도덕적으로 정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되 신중하며 분별력 있게 잘 베푸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2)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자들은 흩어 구제합니다.
잠언 11장 24절을 보십시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아낌없이 구제하는 것(“흩어 구제하여도”)을 좋아합니다(24-25절)(박윤선). 그들은 남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비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아낌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부하게 하는 비결이요 풍족케 하는 비결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은 그 비결을 모르기에 불안과 근심 걱정 속에서 과도히 아끼되 남에게 베푸는 것이나 구제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는 가난하게 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4절). 그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성경은 구제하는데 인색한 자들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는다(the people will curse him)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 남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을 칭찬하고 좋아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겠습니까? 원리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후함”(generosity)입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되 후히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후히 베풀되 특히 남을 구제하는 일을 아낌없이 합니다. 어떻게 그들은 아낌없이 구제하며 남에게 후히 베풀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그들은 선을 간절히 구하므로 하나님께 은총을 풍성히 얻었기에(27절) 다른 이들에게 풍족히 베풀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자들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28절)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다른 이들에게 후히 베풀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은 의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8절을 보십시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솔로몬 왕은 의인에게 환난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의인에게 환난이 있지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성경은 의인의 자손도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난 속에서도 진정한 의인의 소원은 선합니다(23절). 무슨 말입니까? 의인은 환난 가운데서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23절) 하나님의 선하심에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의인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환난 가운데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므로 자기가 접한 모든 역경과 위기 상황 속에서도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의를 굳게 지킵니다(19절).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18절). 그 상이란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하여금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시34:8).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보응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1장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의인과 악인(죄인)을 보응하십니다. 의인의 보응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환난 중에서 구원하심(8, 21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으로 하여금 형통케 하십니다(10절).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은 마치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게 하십니다(28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시되 사람(영혼)들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30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경 스바냐 3장 17절이 생각났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이 말씀,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주신 교훈처럼 겸손하며, 정직하며, 완전하며(행위가 온전하며), 은혜와 자비 베풀기를 좋아하며 그리고 의의 길을 걷는 자로 세움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