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녀와 미련한 자녀

 

 

[잠언 101-32]

 

 

며칠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70-80년대 유지인, 장미희와 함께 최고의 인기스타 반열에 올랐던 정윤희 씨의 아들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뉴스를 보니까 사망원인이 약물복용과 음주에 의해 급성 폐렴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가 전에 유명했던 인기스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읽어 보았는데 그녀의 22살 아들이 여기 로스앤젤레스 사립대학인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재학중이였다는 사실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오래전 USC 대학 재학생들 중 많은 유학생들은 한국에 부자 집 자녀들로서 미국까지 유학을 와서 학업에 충실하기보다 술과 마약 등 방황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들었기에 그 들은 이야기 이렇게 전에 인기스타의 자녀의 죽음 소식으로 좀 확인이 되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나이 57살이나 된 정윤희 씨와 그녀의 남편의 마음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식을 그리 잃는 부모의 마음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10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즉, 지혜로운 아들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지만 미련한 아들은 부모님의 근심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자녀와 미련한 자녀”란 제목 아래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지혜로운 자녀가 누구인지, 부모님에게 근심이 되는 미련한 자녀는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자녀는 의리를 추구하지만 미련한 자녀는 불의의 재물을 추구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2절을 보십시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얼마 전 온 가족 식구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저희 집 막둥이 예은이의 “Life”란 게임을 함께 하였습니다. 제가 그 게임을 같이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 게임이 아주 물질(만능)주의적인(materialistic) 게임이라고 아내에게 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좀 파악하고 아이들에게 물질에 관하여 교훈을 주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 게임을 하다 보니 아무리 게임이지만 몇 천 불, 몇 만 불, 심지어 십만 불 지폐가 게임 판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게임을 물질주의적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제 자녀들에게 ‘너희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면 아니 된다’라고 말해주었더니 ‘I know’(예, 알아요)라고 대답하더군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이 알아야 할 진리는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는 사실입니다(2절). 여기서 “불의의 재물”이란 탐심 속에서(참고: 1:19; 28:16) 부당하게(unjustly)(참고: 16:8) 얻되 특히 절도(theft)와 속임수 또는 사기(deceit)로 얻은 재물을 가리킵니다(Walvoord). 그 좋은 예가 잠언 1장 13절에 나옵니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죄 없는 사람의 피를 까닭 없이 흘려(11절) 죽게 한 후 그 사람의 온갖 보화를 빼았아 우리 집에 채우자’(13절)라고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실제로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 사람의 재물을 빼앗지는 않겠지만(물론 그런 사람들도 이 세상엔 많지만) 충분히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어 우리 집 은행 구좌를 채우려는 유혹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수 없이 받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제는 탐심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말로는 바른 목적으로 돈을 벌고 재물을 모으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을 속여서라도 재물을 모으려 하고 심지어 도둑질을 해서라도 돈을 모으려고 한다면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미련한 자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근심이 되는 미련한 자녀들은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여 불의의 재물을 얻는 자들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는 사실을(10:2)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신다(He will reject the craving of the wicked)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3절).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바로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악인의 수입(income)은 오히려 그에게 (형)벌(punishment)이 된다는 말입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수입이 많으면 좋을 텐데 악인의 수입은 오히려 그에게 형벌이 된다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악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입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심판하시되 그들의 재물로 그들에게 올무가 되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물이 많냐 적냐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의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본문 잠언 10장 2절 하반절에서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But righteousness delivers from death)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지만 의리는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리”라는 단어입니다. “의리”하면 우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생각하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리”란 “의”(righteousness)를 말합니다. 여기서 “의”란 ‘남을 동정하는 사랑(신 24:13)을 가리킨다는 해석가들이 있지만 박윤선 박사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올바른 생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박윤선). 저는 박윤선 박사님의 해석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불의의 재물”이란 불공평한 방법인 절도나 사기 등으로 얻은 재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법이 아닐진대 “불의”와 대조적으로 “의”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불의”는 재물을 사랑하지만 “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과연 이 “의”가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죽음에서 건집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2절을 보십시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여기서 “의리가 죽음에서 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곧 사람이 의리를 지키면 그 지키는 동안 곤란한 때도 있지만 마침내 좋은 열매를 거둔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올바른 생활을 할 때에 비록 어려움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사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하셨는데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된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심지어 죽음에서도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영원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십니다.

 

잠언10장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하여금 주리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적이로든 영적이로든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환난과 궁핍함 속에서 있을지라도 일용할 양식 먹여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환난과 궁핍함 속에서도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사 정금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3) 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6-7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하나님께서 위에서 의인에게 내려 주시는 복이란 바로 형통의 복입니다. 비록 의인이 걸어가는 길에는 다소 곤란과 역경이 있을 때도 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형통케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의 이름을 후세대에 기억되게 하시되 칭찬받는 인물로 기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를 형통케 하시사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사 야곱과 그의 온 식구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번성케 하시사 나중에는 요셉의 이름이 후세대에 칭찬받는 열조로 기억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로운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미련한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쳐 들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로운 자녀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이 세상에 눈이 멀어 무익한 불의의 재물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근심케 하는 어리석은 자녀들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둘째로, 지혜로운 자녀는 부지런하지만 미련한 자녀는 게으릅니다.

 

성경 잠언 10장 4절을 보십시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러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녀가 맨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생산적으로 살지 못하고 허비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속 터지지 않겠습니까? 마냥 침대에서 뒹굴면서 먹고 자기만 하고 게으르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 부모님의 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잠언 6장 6-11절에서 “개미보다 못한 사람”이란 제목 아래 개미보다 못한 게으른 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게으른 자란 습관적으로 게으르고 활동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규율도 없고 계획도 없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자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은 자, 불의한 자로서 개미보다 못한 사람임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개미보다 못한 게으른 사람은 감독하는 자가 있어도 게으르게 일하고, 일을 해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없고 협력도 할 줄 모르고(6:7),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도 없는 것(8절)을 볼 때 그러한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10장 4절 상반절을 보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일을 해도 나태하게 일을 하기에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21:25). 오히려 게으른 자녀는 일을 만들므로(참고: 딤전 5:11-13) 부모님에게 근심이 됩니다(잠 10:1).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게으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는 것입니다(렘 48:10). 이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성경 예레미야 48장 10절은 그러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오늘 본문 잠언 10장 5절 하반절을 보면 추수 때에 잠을 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수할 영혼은 많은데 영적으로 잠을 자면서 복음 전파에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을 면책하고 있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부끄러움을 끼치는 자녀들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10장 26절을 보면 성경은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게으른 자가 그 주인에게 역스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그 주인이 게으른 자를 볼 때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릴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도 게으른 자식으로 인하여 근심하는데 주인의 입장에서 게으른 종업원을 볼 때 얼마나 역정이 나겠습니까? 그 종업원의 게으름을 볼 때 얼마나 그 주인의 눈에 그 종업원이 거슬리겠습니까? 당연이 그러한 종업원을 그의 주인이 좋아 할리가 없습니다.

 

고대(약 4,500년 전) 이집트의 현자로 불리웠던 프타호텝(Ptah-Hotep)은 일에 대한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The wise rise early to start to work, but fools rise early to worry about all there is to do”(Matthews)(지혜로운 자는 일찍 일어나 일을 하기 시작하지만 미련한 자는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할 일을 걱정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하십니까 아니면 온종일 할일 생각하면서 걱정하십니까? 세계에서 최고로 지혜로운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10장 4절에서 게으른 자와 대조적으로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4). 다시 말하면, 부지런한 자는 부지런히 일을 하는 자요 특히 추수 때인 여름에 자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수확한다는 것입니다(5절). 이러한 자를 가리켜 성경은 “지혜로운 아들”(5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지혜로운 아들은 그의 부모님으로 근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절).

 

셋째로, 지혜로운 자녀는 명령을 받지만 미련한 자녀는 조심 없이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8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리라.” 성경 마태복음 21장 28-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한 아버지에게 있는 두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을 때 그 맏아들은 “아버지여 가겠소이다"라고 말한 후 가지 아니하였습니다(28-29절). 그 아버지가 이제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까 그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습니다(30절). 이 비유를 말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31절). 그 때 그들의 대답은 “둘째 아들이니이다”(31절)였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1-32절). 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해놓고 불순종한 맏아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에 ‘싫습니다'라고 말한 후 뉘우치고 순종한 둘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멸시하는 세리들과 창기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실제로 순종했느냐 아니면 불순종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할 때 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 외에 아버지 앞에서 “예”하고 순종하는 셋째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셋째 아들이 물론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제일 좋지만 그러한 아들은 독생자 예수님 밖에 없어서 그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된 저와 여러분은 적어도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싫습니다, 하나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뉘우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뉘우치고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17절을 보면 성경은 마음이 지혜로운 자녀는 부모님의 훈계를 듣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로운 자녀는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한다고 오늘 본문 8절에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과연 지혜로운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명령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명령을 한 4 가지로 찾아보았습니다:

 

(1)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길로 행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9절을 보십시오: “바른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어느 부모가 자식이 굽은 길 곧 죄악의 길로 행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모든 부모의 마음은 우리 자녀들이 죄악의 길을 걷지 않고 바른길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른 길로 행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의로운(깨끗한)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의로운(깨끗한) 생활을 하는 자는 우선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의 마음은 평안하고 고생 끝에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고로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박윤선).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 자녀들이 누리길 원치 않는 부모기 이 세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여 그릇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할지라도 우리 부모의 마음은 우리 자녀들이 징계를 받아서라도 다시금 바른 길, 곧 생명 길로 행하는 것(17절)을 간절히 보길 원하여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릴 것(인내할 것)입니다.

 

(2)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12절을 보십시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어느 부모가 자식이 다투고 싸우며 미워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겠습니까? 오히려 부모의 마음은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길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이웃 사랑은 지식에 근거한 사랑입니다(14절). 그저 무조건 감정에 치우친 사랑이 아닙니다. 어떠한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즉,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의 허물을 다 예수님이 보혈로 덮어주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가려 주는 그러한 사랑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녀는 상대방의 허물을 가리기보다 들춰내길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미련한 자의 미워하는 마음은 그 상대방에게 편견을 가지기 때문에 없는 허물도 있는 것 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이러한 미련한 자는 자기 마음에 있는 상대방을 향한 미워함을 감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에 대해 오늘 본문 잠언 10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워함을 감추는 자는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요 참소하는 자는 미련한 자니라.”

 

(3)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입술을 제어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19절을 보십시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이 말씀은 생각할 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말을 많이 해서 제 자신의 허물을 들어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에 재갈까지는 먹히기까지는 못하지만 입술을 제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기 때문입니다(21절). 저는 여러 사람을 교육하는 천은과 같은 혀를 생각할 때 구약의 인물인 에스라가 생각났습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겸 제사장이였습니다(스 7:11).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10절)한 학자로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한 “학자의 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사 50:4). 우리도 에스라처럼 학자의 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성도들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4)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지혜로 낙을 삼으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10장 23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미련하여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을 볼 때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행악으로 낙을 삼지 말고 지혜로 낙을 삼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로 즐거움을 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라 명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렇게 지혜로운 자녀는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하지만 오늘 본문 잠언 10장 8절과 10절을 보면 성경은 미련한 자녀는 입이 미련하여 패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입이 미련한 자가 말을 조심성 없이 하기 때문에 그 말로 인하여 화를 당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왜 미련한 자는 말을 조심성 없이 해서 스스로 화를 당합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처럼 지식을 간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다시 말하면,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습니다(21절).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입은 패역을 말합니다(32절). 그 결과 미련한 자의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입니다(31절). 또한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1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합니다(1절).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27절) 하나님의 의를 추구합니다(2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도를 정직히 행합니다(29절). 행하되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지런히 행합니다(4절). 또한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합니다(8절). 그러므로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영히 요동하지 않습니다(30절). 그러나 미련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근심이 됩니다(1절).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무익한 불의의 재물을 추구합니다(2절). 그리고 그들은 게으릅니다(4절). 또한 그들은 조심 없이 말을 하므로 스스로 화를 당합니다(8, 10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로운 자녀들입니까 아니면 미련한 자녀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