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
[잠언 9장 1-18절]
이번 주 월요일에 친구를 통해서 책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 책 저자가 익히 들어본 “박완서”씨래서 관심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책 제목이 더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 책 제목은 바로 “못 가본 길이 더 아릅답다”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못 가본 길이 너무나 많아서 저자가 못 가본 길이 무엇이 길래 아름답다고 하는지 궁금해서 이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선택이란 여러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를 제외한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련이 많이 남는 사람들은 선택 때문에 버려진 다른 것들에 대해 미련을 많이 갖습니다”(인터넷). 아마 못 가본 길에 대하여 미련이 많은 사람은 이 책의 제목에 이끌려서 한번쯤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 보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책을 열어서 읽기 시작하였는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첫 장 제목 이였고 그 첫 장에서 저자는 유년시절과 6.25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꿈꾸던 길을 전쟁으로 인하여 걷지 못하고 비록 다른 길을 걸어서 지금 거의 80년을 이 세상에서 살아왔지만 뒤돌아 볼 때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흭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흭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박완서).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약 44년 삶을 되돌아보면서 제가 걸어왔던 길과 주님께서 걸어오게 하신 길을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인생을 그리고 딱 두 길로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줄 알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해 보았습니다. 먼저 제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았을 때 그 길을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면 어리석고 미련하며 방황과 죄악의 길이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방황과 죄악의 길이였냐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요 그 길이 어리석고 미련한 길인 이유는 저는 주님을 떠나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걸어오게 하신 길은 한 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그 길은 은혜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제 삶의 존재 목적의 길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왜 제 삶의 존재 목적의 길이냐면 대학교 1학년 때 교회 대학부 수련회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저에게 제 삶의 존재의 목적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목적에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은혜의 길이요 사랑의 길인 이유는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고 지금도 누리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약 6년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지혜의 책 중에 하나인 시편부터 묵상케 하시면서 계속해서 전도서, 그리고 금년 2011년 들어서서 잠언 책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지혜의 길을 걷게 하시려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지혜의 책들을 통하여 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욱더 들어내시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걷기를 원하시는 지혜의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계속해서 교훈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와중에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잠언 9장을 통하여 저에게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9장 6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는 제목 아래 과연 우리가 버려야 할 어리석음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명철의 길을 행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 잠언 9장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지혜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버려야 할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그것은 바로 “거만”(mocking)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9장 7-8절을 보십시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우리가 누군가를 가리켜 ‘저 사람 거만하다’고 말할 때 주로 그 의미는 ‘저 사람 혼자 잘난 체하며 남을 업신여긴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거만한 자”란 바로 “경멸하는자” 또는 “비웃는 자”(scorner)를 가리킵니다(Strong). 이러한 거만한 자는 진리의 교훈을 비웃는 자(scoffer)입니다(박윤선). 그리고 진리의 교훈을 비웃는 거만한 자의 특징은 바로 교만하고 오만해서 멸시하여 거절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거만한 자는 무엇을 멸시하며 거절하기를 좋아합니까? 바로 훈육(discipline)과 책망(reproof or rebuke)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만한 자는 지혜를 멸시하여 거절하기를 좋아합니다(Whitaker).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8절에서 “거만한자를 책망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8절). 다시 말하면, 우리가 거만한 자를 책망하면 그가 우리를 미워할 것이기 때문에 책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거만한 자를 책망하면 우리가 도리어 능욕을 받고 또한 흠을 잡힐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여기서 ‘흠을 잡힌다’는 말은 우리가 거만한 자를 책망할 때 우리는 그 거만한 자에게 언어 학대(verbal abuse)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Swanson). 예를 들어, 우리가 거만한 자를 사랑하므로 면책을 할 때 그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솔로몬 왕의 말처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는 말씀에 공감하면서 제 마음 속에 왜 거만한 자는 책망을 듣기를 그리 싫어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교만한 자가 충고를 받지 않고 도리어 반항하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반항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는 교만으로 어두워져서 진리를 모르고 자기의 행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까닭이고, 둘째로, 언제는 그는 소위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충고나 책선하는 자를 도리어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자존심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더러 남을 나 자신보다 낮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 2:3)(박윤선). 혹시 이러한 죄악 된 자존심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거만함이란 자기 자신의 죄악 된 자존심 속에서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으로 책망한다 할지라도 책선하는 자의 말을 결코 듣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은 결코 유익이 될 수가 없습니다(12절). 오히려 그 거만한 자는 지혜의 책망을 듣지 않고 미련한 계집(13절)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본문 13-17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미련한 계집은 자기 길을 바로 가고 있되 지혜가 없는 행객을 불러 미혹하되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계집의 미혹의 소리인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한 주석가에 의하면 “도적질한 물”이란 부정 성관계(illicit sex)를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잠언 5장 15절에서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는 말씀이 결혼 안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성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도적질한 물은 결혼 밖에서의 성관계를 가리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몰래 먹는 떡”(9:17)은 은밀히 행하는 것(a clandestine activity)으로서(Walvoord) 그 또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거만한 자는 이러한 미련한 계집의 미혹에 빠져(16-17절) 홀로 해를 당한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과연 거만한 자는 어떠한 해를 당합니까? 거만한 자는 어리석어서(16절) 미련한 계집(13절)의 미혹에 넘어가(16-17절) 그녀의 처소가 사람을 죽이는 곳이며 음부로 보내는 곳임을 알지 못하고(18절) 그녀의 초청에 응하므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 2:18; 5:5 7:27). 그러므로 오늘 본문 잠언 9장 6절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거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명철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명철의 길을 행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바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3가지로 교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지혜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9장 1-5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 왕은 성중(성읍) “높은 곳에서” 두 가지 다른 목소리가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련한 계집의 초청이요(14절) 또 다른 하나는 지혜의 초청입니다(3절). 그리고 성경은 지혜 없는 자들은(16절) 성읍 높은 곳에서 부르는 미련한 계집의 초청에 응하여 자기가 걷고 있던 바른 길을 버리고(14-15절) 어리석음의 길을 택하여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1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성중 높은 곳에서 부르는 지혜의 초청에 응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을 택하여 결국에서 생명을 얻습니다(6절). 미련한 계집은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17절)고 말하면서 지혜 없는 자들을 초청하는 반면에 지혜는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5절)고 말하면서 그들을 초청합니다. 이 지혜의 초청은 이사야 55장 1-3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모든 그의 구원에 참예하라고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참예하라는 주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말합니다(박윤선). 성경 잠언 9장에서 미련한 계집이 말하고 있는 “도적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17절)과는 달리 지혜는 “내 식물”과 “내 혼합한 포도주”(5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기서 “내 식물”과 “내 혼합한 포도주”는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찢기실 살과 흘리실 보배로운 피를 가리킵니다. 지금 성경은 미련한 계집의 초청에 응하여 도적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먹으면 결국에는 사망하지만 지혜의 초청에 응하여 지혜의 식물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 생명(6절), 곧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의 초청에 응하여 명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지혜의 책망과 교훈과 가르침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9장 8-9절을 보십시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 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우리가 거만한 자를 책망하게 되면 그는 우리를 미워하여 또한 우리가 도리어 능욕을 받고 또한 흠을 잡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면 그가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7-8절). 왜 지혜 있는 자가 자기를 책망한 우리를 사랑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책망을 통하여 지혜 있는 자는 교훈을 배워서 더 지혜로워 지며 또한 학식이 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9절). 한 마디로, 우리의 책망이 지혜 있는 자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에(12절) 우리는 지혜의 책망과 교훈과 가르침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지적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짧은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어느 누구나 지적할 줄은 다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욱더 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혜롭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겸손히 그리고 바르게 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적을 겸손히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적을 받을 때 스트레스도 받고 마음에 상처도 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를 지적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보다 그 사람의 이기적인 면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충분히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해 가운데 우리가 지적을 받을 때 우리의 본능은 우리를 지적한 사람의 오해를 지적하고 싶은 충동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적을 겸손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적한 사람을 통해서(그 지적이 맞던지 틀리전지 간에) 우리를 지적하고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지적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12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The way of a fool seems right to him, but a wise man listens to advice). 스스로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거만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 여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으로 책망을 한다 해도 듣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에게는 겸손한 듣는 귀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믿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견책을 달게 받으므로 지식을 더합니다(15:32, 21:11). 우리는 견책을 달게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의 책망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지혜롭게 되어서 명철의 길로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9장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우리가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로 행하기 위해선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가 얼마나 죄악 되고 불결하며 속된 사람인 줄 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근본”이란 잠언 책의 주제인 잠언 1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에서 “근본”가 다른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잠언 1장 7절에서 “근본”은 “beginning”, 즉 ‘시작’이란 뜻인 반면에 오늘 본문 9장 10절에서 “근본”은 “prerequisite”, 즉 ‘전제 조건’이란 뜻입니다(Walvoord). 즉,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지혜의 전제 조건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로 행하기 위해선 우리는 이 지혜의 전제 조건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지런히 알아가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명철의 길로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내온 삶을 뒤돌아보면서 현재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할 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버리고 또 버리는 신앙의 길, 우리는 특히 거만함을 버리고 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명철의 길로 행하기 위해서 지혜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의 책망과 교훈과 가르침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