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훈계를 들으라!

 

 

[잠언 822-36]

 

 

우리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면서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합니다(눅 10:40). 그러다 보니 "나 혼자 일하게 두는"(40절) 주위 형제, 자매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심지어 주님에게까지 나아가 기도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주님, 저들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십니까?'(40절). 그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절). 주님께서는 마리아처럼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39)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우리에게 원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많은 일을 분주하게 하여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2절)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한 가지만 하는 것으로 만족을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대로 교회를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는데(42절) 우리는 마르다처럼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언 8장을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1절에서 11절까지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명철해 지기 위해선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함과 지혜의 훈계를 듣고 지식을 얻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왜 우리가 지혜의 훈계를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지혜는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6절상). 즉, 우리가 지혜의 훈계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지혜는 우리에게 바른 가치관을 주기 때문입니다. (2) 지혜는 우리에게 “정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6절하). 즉, 우리가 지혜의 훈계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지혜는 우리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3) 지혜는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7절). 즉, 우리가 지혜의 훈계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바른 지식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4) 지혜는 우리에게 “공평”(공의)를 말하기 때문입니다(8절). 즉, 우리가 지혜의 훈계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바른 행동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잠언 8장 끝 부분인 32절부터 36절까지 말씀에서도 솔로몬 왕은 ‘지혜에게 들으라’(32, 34절), ‘훈계를 들으라’(33절)고 이렇게 3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우리에게 ‘지혜의 훈계를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혜의 훈계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 것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지혜의 훈계를 듣고자 날마다 겸손히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8장 34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로서 설교를 준비하여 전파함에 있어서 고민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고민들 가운데 특별히 저는 성경 본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과 그 바르게 해석한 본문 말씀을 어떻게 듣는 성도님들에게 바르게 선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가끔 저는 이러한 생각도 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성도님들은 설교를 어떻게 듣고 있는가?’ 이러한 생각을 할 때면 종종 저는 성도님들도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훈련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기억으로는 오래 전 제이 아담스(Jay Adams) 교수님의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라는 책 중심으로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기 위해 먼저 준비해야 할 것과 취해야 할 태도, 설교 경청을 방해하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 책을 우리가 공부한 이유 중 하나는 말씀의 씨를 받는 우리 설교를 듣는 자들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가꾸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밭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 있게 듣는 태도는 정성과 신뢰를 가지고 그것을 받음이다”(박윤선). 그 정성스러운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를 오늘 본문 34절에서 솔로몬 왕은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을 수종들면서 주님이 거하시는 왕궁 문 곁에서 주님의 음성을 겸손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자 기다리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박윤선). 제이 아담스 교수님은 그의 책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에서 설교를 잘 듣는 길 중에 하나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대감이다. 태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성경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행 17:11)라고 말한다. 기대감이 있어야 잘 들리게 된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는 한가지에만 신경을 쓰라.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말씀은 무엇인가?" 어린아이다움이 있어야 한다.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이 있어야 들리게 된다. 성경을 살필 때에도 진리를 발견하려는 간절함 때문에 성경을 살펴야 한다. 편견 가지고 가면 아무 것도 못 얻는다. 흠이 있나 없나 하는 꼬투리 잡는 듣기는 병든 귀이다. 히브리서 5장 11절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고 말씀한다. 듣는 것이 둔한 귀가 있다는 말이다. 설교 듣기는 "트집 잡기"가 아니라 "진리 찾기"이다(아담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날마다 겸손히 기다려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말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지혜이시기에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날마다 겸손히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잠언 8장 22-26절까지를 보면 솔로몬 왕은 지혜가 천지창조가 이뤄지기도 전인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여기서 “전부터/전에”, “아직”, “짓지 아니하셨을 때”라는 단어들을 볼 때 솔로몬 왕은 지혜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요한복음 1장 1-2절과 참 유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잠언 8장 22-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되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날마다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신 8:3).

 

둘째로, 우리는 지혜의 훈계를 듣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8장 32절을 보십시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겸손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듣는데서만 끝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그 모든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복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문제가 있듯이 그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데도 문제가 있는 것을 우리 삶 속에 경험합니다. 그 한 예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 있어서 우리 마음이 좋은 밭으로 날마다 부지런히 기경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그 일을 게을리 할 때 주님의 말씀의 씨앗을 겸손히 잘 못 받아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그 들은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선 지켜 행해야 하는데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도록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빼앗습니다(눅 8:12). 또한 우리가 그 말씀을 지켜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쁨으로 받아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는 우리는 주님을 배반하여(13절)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으로 인하여(14절)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켜 행하지 못하므로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착하고 좋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15절).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좀 달리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지혜로운 자는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의 파워를 경험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의 파워란 오늘 본문 잠언 8장 27-30절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여기서 “내가 거기 있었고”, “내가 그 곁에 있어서”라는 말들을 볼 때 솔로몬 왕은 지혜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창조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1장 3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곧, 잠언 8장 27-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능력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능력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혀 이끌림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은 생명력 있는 말씀이요 우리들의 빛이기에(요 1:4) 그 빛 된 생명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어떠한 복이 있습니까? 바로 형통의 복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훈계를 듣고 지켜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복을 누립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지혜의 훈계를 듣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8장 33절을 보십시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우리가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지혜가 되시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혜를 얻을 때에 우리에게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여기서 솔로몬 왕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셨으며 또한 기뻐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기뻐하셨습니다(MacArthur).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였고 그 죄로 인하여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창 6:5-6). 결국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 이르렀습니다(롬 5:12). 그러나 한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의 선물을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21절).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지혜의 훈계를 듣고 지혜를 얻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 은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8장 35절을 보십시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을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36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내어보내시면서 하신 마태복음 10장 1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리들과 같은 거짓 선생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 참 지혜로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혜로워지기 위해선 지혜의 훈계를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듣되 우리는 날마다 겸손히 주님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지식(진리)과 바른 가치관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정도)을 걷게 하고 바른 삶(행동)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