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칠 악

 

 

[잠언 616-19]

 

 

여러분, 혹시 “칠 악”(Seven Deadly Sins)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칠악”하면 1995년작 “세븐”(Se7en)이 생각납니다. 그 때 그 영화에는 유명한 배우인 브래드 피트, 모건 프리만 그리고 케빈 스페이시가 출연하였는데 그 영화의 줄거리는 일곱 가지 원죄를 모티브로한 연쇄살인 사건을 보여주었는데 영화의 주제는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곱 가지 원죄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인터넷). 여기서 말하는 그 일곱 가지 죄악이란 색욕(lust), 탐식(gluttony), 탐욕(greed), 게으름(sloth), 분노(wrath), 질투(envy), 그리고 교만(pride)입니다. 이 일곱 가지 죄악은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 1세가 분류한 것으로서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인터넷): (1) 교만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으로 우월감을 갖는 것, (2) 탐욕은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요구, (3) 색욕 육체적 쾌락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 (4) 탐식은 음식에 대한 무질서한 섭취로 생각하는 일을 둔하게 만들고, 이성의 통제를 약화 시키며 인간의 품위를 하락시킴, (5) 질투는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비난, (6) 분노는 타인을 증오함으로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도 해칠 수 있는 죄종, (7) 게으름은 받은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거절하는 태도. 카톨릭에서는 이 칠 악을 오늘 본문인 잠언 6장 16-19절을 근거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악을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카톨릭에서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는 칠 악은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악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오늘 우리가 함께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여기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여섯 가지, 일곱 가지가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숫자가 혼동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죄악이 여섯 가지인지 아니면 일곱 가지인지 좀 혼동이 되지 않습니까? 왜 솔로몬 왕은 숫자를 “육 칠”이라는 두 숫자를 다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2가지로 주석가들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해석은 이 “육 칠”이란 숫자를 저자가 사용한 목적은 우리에게 완전히 죄악의 목록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째 죄악이 그 전에 적혀 있는 여섯 가지 죄악의 산물(product) 또는 절정(culmination)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Walvoord). 만일 우리가 이 해석을 따른다면 오늘 본문에서 일곱 번째 죄악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19절)이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17절),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18절) 그리고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19절)의 산물 또는 절정이라는 말입니다. (2) 두 번째 해석은 이 여섯이나 일곱이라는 순서의 숫자는 전체(totality)를 묘사함과 동시에 우리의 시선과 집중을 사로잡기 위해 사용된 숫자들이라는 것입니다(참고: 30:15, 18; 욥 5:19, 암1:3)(MacArthur). 그 한 예로 욥기 5장 19절을 들 수가 있습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이 2가지 해석들 중 제 생각엔 두 번째 해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첫 번째 해석을 우리가 따른다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일곱 가지 죄악 중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 그 이전에 나오는 여섯 가지 죄악들의 절정이라고 봐야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같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제 생각엔 솔로몬 왕이 나열하고 있는 일곱 가지 죄악의 절정은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기보다 네 번째 죄악인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어 문법에 chiasm(교차대구법)을 적용할 때]. 오히려 두 번째 해석이 저에겐 좀 더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욥기 5장 19절 때문입니다. 여섯이나 일곱이란 숫자를 함께 사용된 것은 그 숫자 자체의 의미를 두기보다 전체를 묘사함과 동시에 우리의 시선과 집중을 사로잡기 위해 사용된 숫자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잠언 6장 16-19절에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칠 악(일곱 가지 죄악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죄악은 바로 교만한 눈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곧 교만한 눈과 ….” 우리가 “눈”을 생각할 때 이미 6장 13절에서 묵상한 불량하고 악한 자의 “눈짓”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남은 해하려고 다른 악한 사람하고 공모를 할 때 불량하고 악한 자는 상대방이 알아차릴까봐 눈짓을 하는 것을 보면 교만한 눈을 가진 자 또한 다른 사람을 해하되 오늘 본문 19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형제 사이를 이간할 수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 근거로 저는 시편 101편 5절 말씀을 제시합니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용납지 아니하시는 마음이 교만한 자는 눈이 높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렇게 교만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는 결국에는 형제 사이를 충분히 이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미워하신다고 성경 잠언 8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6장 17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눈”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만한 눈이란 바로 잠언 30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눈이 심히 높은 것’(lofty eyes)을 말합니다. 이렇게 눈이 심히 높은 교만한 눈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낮추신다고 성경 시편 18편 2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교만한 눈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겸손한 눈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까? 바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입니다(빌2: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사(잠 3:34)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게 하십니다(엡 4:2). 즉, 교만한 눈을 가진 자는 형제 사이를 이간하지만 겸손한 눈을 가진 자는 형제 사이를 화목케 합니다.

 

둘째 죄악은 바로 거짓된 혀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7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거짓된 혀와 ….” 우리가 이미 묵상한 12절을 보면 불량하고 악한 자는 “궤휼한 일을 벌”린다(a corrupt mouth)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불량하고 악한 자는 자기의 구부러진 입으로 거짓과 속이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업에 있어서 구부러진 입으로 거짓과 속이는 말을 하는 자는 잠언 21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재물을 많이 모아 형통하게 보일지라도 성경 잠언 21장 6절은 분명히 그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된 혀는 인간관계에서도 “미움”이 개입돼 있습니다. 잠언 26장 28절을 보십시오: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거짓된 혀로 상처 입힌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을 미워하기에 거짓말 하는 자가 거짓말을 해서라고 그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며 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6장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상대방을 해하려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내 뱉는 망령된 증인, 그 거짓된 증인으로 인하여 그 상대방은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거짓된 입술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습니다(12:22). 그리고 거짓된 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잠언 12장 19절을 보십시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성경은 거짓된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입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실한 입술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욥 33:3).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잠 12:22)

 

셋째 죄악은 바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여러분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구약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무죄한 자인 나봇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우리가 이미 묵상한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죄악인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 그리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등 이 모든 것이 다 이세벨 왕후에게 적용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녀는 남편 사마리아 왕 아합은 자기의 궁에서 가까운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밭으로 삼고 싶어 했지만 그 밭을 파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시기에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고 말하므로 근심하고 답답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세벨은 아합을 위하여(왕상 21:1-4) 교만한 눈으로 나봇을 보고 거짓된 혀로 편지를 써서 그 성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분부하여(11절) 결국에는 나봇을 죽여(12-13절) 그의 포도원을 뺏어서 자기 남편 아합에게 주었습니다(16절). 결국 악한 왕후 이세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신뢰할 만한 이웃인 무죄한 나봇을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생각할 때에 저는 전혀 죄가 없으신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죽게 한 유대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눈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고, 그들의 거짓된 혀로 예수님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소리가 생각났습니다(요19:6). 그리곤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그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찬송가 144장 2절이 생각났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무지한 유대인들, 예수님이 그들의 구세주이심을 모르고 무죄한 예수님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이 생각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발도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은 오늘 본문 잠언 6장 18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함께 하기 때문에 불량하고 악한 자의 손과 발을 생각할 때 무죄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손과 발이 생각난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손을 주님께 받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비록 사단과 우리의 대적자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손을 피곤케 하여 주님의 일을 중지하게 만들려고 하겠지만 우리는 그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느 6:9) 우리의 손을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드려야 할 것입니다.

 

넷째 죄악은 바로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6장 14절을 보면 성경은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마음에 패역을 품”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량하고 악한 자는 삐뚤어진 마음으로 삐뚤어진 말을 하면서(12절)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킵니다(14절). 그 원인은 항상 악을 꾀하는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그 불량하고 악한 자의 마음을 삐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량하고 악한 자의 마음이 삐뚤어진 원인은 항상 악한 계교를 꾀하는 사단 때문입니다. 사단은 악합니다. 그리고 악한 사단은 악한 계교만을 꾀합니다. 그 악한 계교에 바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마음을 삐뚤어 놓는 계획도 있습니다. 사단은 그 계획을 행동으로 옮김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거나 하여 진리를 거짓과 섞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우리를 미혹하여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삐뚤어 놓습니다. 그 말은 사단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들(막 7:21)을 자극하여 끄집어내어 그 악한 생각들로 하여금 우리를 주관케 하므로 결국에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악한 생각들은 무엇입니까? 성경 마가복음 7장 21-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여러분, 사단의 악한 계교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범하는 것 아닙니까? 창세기 3장을 보아도 사단은 거짓된 혀를 사용하여 아담과 하와의 눈을 교만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가인은 무죄한 자인 동생 아벨의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창 4장)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 왕이 잠언 4장 23절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 진실 된 마음, 섬기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죄악은 바로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6장 13절을 보면 성경은 불량하고 악한 자는 눈짓을 할 뿐만 아니라 “발로 뜻을 보”인다(signals with his feet)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불량하고 악한 자가 자기의 발로 뜻을 보여 악을 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발은 악을 행하는데 도구로 사용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악을 행하는데 쓰이는 발을 생각할 때 잠언 1장 15절이 생각납니다. 그 구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악한 자들(10절)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고 우리 발을 금하여 악인들의 길을 밟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악인들의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르기 때문입니다(16절).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을 가진 악인은 무죄한 자인 의인의 피를 흘리는 손만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6:17)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18절)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악인의 손과 발은 악을 행하는데 빠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찬송가 348장 2절이 우리의 헌신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합소서.” 특히 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저는 로마서 10장 1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민첩해야 합니다. 비록 악인들의 발은 빨리 악으로 달려가지만 우리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데 빨리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죄악은 바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두 번째 죄악은 “거짓된 혀”라고 우리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기 19절에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여섯 번째 죄악은 그 거짓된 혀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12절에서 이미 묵상한 말씀을 보면 불량하고 악한 자는 “궤휼한 입을 벌”린다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쓸모없고 문제만을 일으키는 사람은 삐뚤어진 입으로 거짓말과 속이는 말을 내뱉는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 본문 19절에 와서 솔로몬 왕은 거짓된 혀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은 그의 거짓된 혀로 “까닭 없이” 자기의 이웃을 쳐서 증인하며(24:28) 또한 그 이웃을 거짓으로 모함하기 때문입니다(신 19:18).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망령된 증인의 마음에 “미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그 미워함을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자를 가리켜 잠언 10장 18절은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거짓 증인의 거짓 증거로 말미암아 망령된 증인은 충분히 형제 사이를 이간할 수가 있습니다(6:19).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망한 풍설(false reports)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a malicious witness)이 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출 23:1). 만일 거짓된 혀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 되면 성경 잠언 19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거짓을 말하는 거짓 증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기 때문입니다(14: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행 1: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증거 하되 우리는 진실하고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죄악은 바로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14절을 다시 보면 성경은 불량하고 악한 자는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없고 문제를 일이키는 자는 이렇게 다툼을 일으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죄악이 바로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형제들 사이에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는 자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형제 사이에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는 이간하는 자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첫 번째 죄악인 “교만한 눈”(17절)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잠언 13장 10절을 보십시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한 자는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다(시 101:5).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중 가운데서 형제 사이를 서로 멀어지게 이간질을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중 가운데서 형제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잘 합니다. 그는 화평케 하는 자이지 결코 화평을 깨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신실하게 잘 지켜 나아갑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일곱 가지 죄악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일곱 가지 죄악들이란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그리고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칠 악들을 묵상하면서 과연 어떠한 눈과 혀와 손과 마음과 발 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겸손한 눈, 진실 된 혀,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드려진 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마음,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 진실을 말하는 증인, 그리고 형제 사이를 화목케 하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칠 선들(일곱 가지 선들)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