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하고 악한 자”
[잠언 6장 12-15절]
여러분은 인간관계가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누구하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 대답은 다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비슷한 점들이 많고 서로 통하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등 이러한 사람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와 너무나 다를 뿐만 아니라 성격도 괴팍하고 까다로우며 나를 너무나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멀리하고 싶고 아예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한 사람, 악의를 가지고 나를 모함하고 괴롭히고 다투려하고 상처 입히려는 등 하는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한 이 주 동안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는 잠언 6장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경제적으로(financially) 우리를 파괴하는 지혜롭지 못하게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한 자(1-5절)와 도덕적으로(morally) 우리를 파멸하는 게으른 자(6-11절)에 대해서 말하다가 오늘 본문 잠언 6장 12-15절에 와서는 윤리적으로(ethically) 이웃 관계를 파괴하는 “불량하고 악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불량하고 악한 자”란 제목아래 과연 불량하고 악한 자가 누구인지 본문 잠언 6장 12-15절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불량하고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불량한 자”란 ‘행실이나 성품이 나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란 “악독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네이버 사전). 그런데 원어 히브리어 의미를 보니까 “불량한 자”란 “쓸모없는 자” 또는 “무가치한 자(worthlessness)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Brown). 그리고 “악한 자”란 “사악한 자”(wicked man) 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man of trouble), “괴롭히는 사람, 걱정시키는 사람”(troubler)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Brown). 여러분은 “불량한 자” 하면 구약 성경 인물 중 누가 생각나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다윗 시대 때 아비가일의 전 남편인 “나발”이란 인물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사무엘상 25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 나발 외에도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한 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나발이나 엘리의 두 아들들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벨리알의 사람”(a man of Belial)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여기서 “벨리알”이란 “부도덕이나 가치 없음과 같은 악에 성격을 부여하여 사용하는 말”로서 히브리어로 ‘가치 없는 자’, ‘건달’, ‘야비한 자’, ‘사악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보통명사였지만 이윽고 악마 그 자체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과 같은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인터넷). 고린도후서 6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불량하고 악한 자”를 오늘 본문 잠언 6장 12-15절에서 솔로몬 왕은 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불량하고 악한 자는 궤휼한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2절을 보십시오: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여기서 “궤휼한 입”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삐뚤어진(또는 구부러진) 입(twisted mouth) 으로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거짓이요 속이는 말들(false and deceptive words) 뿐입니다(Walvoord). 즉,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궤휼한 입으로 거짓말과 속이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므로 불량하고 악한 자에게 발달된 것은 바로 ‘눈짓, 발짓, 손가락질’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하며.” 무슨 말입니까? 입으로 거짓말과 속이는 말을 하는 불량하고 악한 자는 음모를 꾸밀 때에 피해자에게 자가의 숨겨진 의도가 간파(detect) 될까봐 두려워서 피해자가 못 알아차리게 눈짓과 손짓과 발짓을 다 써가면서 자기의 공모자에게 신호를 줘서 그 음모를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John MarArthur 목사님에 의하면 이것(이러한 관행)은 동양(the East)에 흔했다고 합니다(MacArthur). 그래서 솔로몬은 눈짓에 대해서 잠언 10장 10절 상반절과 16장 30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10:10),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16:30).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주님 안에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정직하고 진실 된 대화를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제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상대방의 몸짓 언어(body language)도 유심히 바라보곤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심각한 대화를 할 대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곤 대화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저는 상대방의 얼굴 표정과 몸짓 자세도 유심히 바라보면서 대화를 하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상대방의 손도 바라보곤 합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사람은 입으로도 말을 하지만 몸짓으로도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하면서 비언어적 요소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언어적 요소로 많은 메시기를 상대방에서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얼마 전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는데 그 때 그 사람이 저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심각한 얘기를 마음 문을 열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주의하게 된 것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좀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좀 글썽거렸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목을 보았습니다. 그 때 침을 삼기면서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은 떨고 있었음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이 자기의 배우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진실 되게 마음 문을 열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한 것임을 저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하고 대화하다 보면 저는 그 상대방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를 들어 저에게 말을 할 때 좀 목소리가 크고 밝으며 환영하는 것 같으면서도 말의 내용이나 몸짓 언어를 보면 너무 자기 마음을 포장하여 과장하여 말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왠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고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마음의 진실함을 느낄 수 없어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제 개인적인 생각과 예를 드는 이유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마음의 진실성과 더불어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고 또한 언행이 일치가 되고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신뢰를 줄만한 대화와 인간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발전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불량하고 악한 자처럼 궤휼한 입으로 거짓과 속이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둘째로, 불량하고 악한 자는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불량하고 악한 자의 입이 궤휼하여 거짓과 속이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패역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량하고 악한 자의 입이 삐뚤어져서(perverted) 진리를 삐뚤게(왜곡) 하여 거짓과 속임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이 삐뚤어져(perverted)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삐뚤어진 마음에서 삐뚤어진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의 입으로 거짓과 속임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거짓되고 그는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불량하고 악한 자의 마음은 거짓되고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바로 그가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 말씀으로 말하자면 불량하고 악한 자의 마음이 거짓되고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량하고 악한 자는 스스로 죄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의 왜곡된 진리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기를 좋아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삐뚤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혼동하게 만듭니다. 그 무서운 사탄의 역사 중 하나는 바로 그는 우리에게 ‘섞인 진리’를 믿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거짓을 더하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 섞인 진리를 믿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탄의 교묘한 역사입니까? 분명히 성경 요한계시록 22장 18절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하나님께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 사단과 그의 종들인 이단자들을 보면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 외에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사단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구약 성경 말씀을 인용하되 그 말씀에 더하므로 진리를 왜곡하여 유혹했던 것처럼(마 4) 지금도 사단과 그의 종들인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인용하되 그 말씀에 거짓을 추가하여 ‘섞인 진리’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4절 말씀처럼 사단과 그의 종인 이단자들은 삐뚤어진 (패역한)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진리가 없고 오히려 왜곡된 진리인 거짓과 속임이 가득 차 있는 불량하고 악한 자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쓰러트려 하나님께 죄를 범케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떠나 배도하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악을 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우리 마음에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귀하게 간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범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우리 심비에 깊이 적어 내려갈 때에 우리는 사단과 이단자들의 진리가 왜곡된 거짓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진리를 마음에 품고 항상 선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엡 2:10).
마지막 셋째로, 불량하고 악한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Who spreads strife). 여러분, 패역한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고 패역한 입으로 거짓을 말하며 다른 사람을 속인다면 불화 속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솔로몬 왕은 잠언에서 다툼에 대해서 여러 번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다툼의 원인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움(10:12), 분을 쉽게 냄(15:18), 패려함(16:28), 미련한 자의 입술(18:6; 20:3), 거만함(22:10), 욕심(28:25) 그리고 노함(29:22, 30:33).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요소들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솔로몬 왕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솔로몬 왕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움이던 분을 쉽게 내는 것이던 욕심 등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툼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다툼의 원인들 중에 제일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는 16장 28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한국 속담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는 말을 아시죠? 무슨 뜻입니까? 말을 언제나 바르게 하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서로 다툴 때 보면 말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구부러지게(삐뚤게)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다툴 수밖에 없는데 왜 말을 삐뚤게 하는가 생각해 볼 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우리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그 삐뚤어진 마음에서 삐뚤어진 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삐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불화와 다툼입니다. 사탄은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고 다투므로 말미암아 분쟁과 분리가 일어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와 패려함과 미련함, 거만함과 욕심 등을 집어넣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다투게 하려고 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탄은 우리 중에서 “싸우는 정욕”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투게 하고 있습니다(약 4:1). 그 결과 심지어 사탄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눅 22:24). 이러한 사탄의 다투게 하는 역사가 왜 위험한가 하면 그 이유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3:16).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다툼을 피하고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마음으로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에 두고 바른 교훈을 따르면서 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을 바르게 하지 않고 삐뚤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며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이 올바르지 않고 삐딱한 마음으로 말을 삐딱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삐딱하고 삐뚤어진 사람은 다툼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무리 바른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삐뚤어진 마음을 하나님께서 바르게 해주시지 않는 이상은 여러분의 바른 말을 상대방이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을 미워하며 여러분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불량하고 악한 자는 무가치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악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궤휼한 입과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악을 꾀하므로 다툼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결코 불량하고 악한 자, 무가치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악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됨을 배워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실한 입과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항상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유익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