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보다 못한 사람
[잠언 6장 6-11절]
여러분은”게으름”(laziness)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게으름이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게으름이 죄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는 것(마 25:18)은 주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는 책망을 받는 죄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 게으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보니까 “게으름 극복을 위한 십계명”이란 글이 있어서 읽어 내려가다가 그 십계명 보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면 크게 4가지가 중요합니다”란 글에 좀 공감이 되어 여러분과 나눕니다(인터넷):
(1) “첫 번째는 ‘바닥 체험’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삶의 바닥이 있습니다. 대개 변화의 시작이란 현실의 삶이 스스로 생각하는 바닥에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일어납니다. 이는 심각한 불행을 겪고 나서야 찾아 올 때가 많지만,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를 미리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에서 오늘을 바라보거나,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바닥 역시 움직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구나!’라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긴 안목과 큰 그림’입니다.
그것은 한 해와 내일의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긴 안목으로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이 때 큰 그림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강점이라는 붓으로 가슴이라는 캔버스에 그려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게으름과 싸우려 합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같은 습관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수직적 접근이 요구됩니다. 상위의 관점에서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작은 실천’입니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면 비전이나 목표에 다가서기 위한 디딤돌을 잘 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확신이 설 때까지 목표를 쪼개고 또 쪼개서 작은 실천을 작은 승리로 만들고 이를 단단하게 쌓아가야 합니다.
(4) 네 번째는 ‘지속적인 자기 점검’입니다.
자기점검의 질을 높이지 못하면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괘종시계의 풀어진 태엽을 매일 감듯이 느슨해진 마음의 태엽을 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긍정적 습관을 바탕으로 자기점검의 시간을 확보하여 의례화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6장 6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사람이 개미보다 못한 것입니까, 개미에게 가서 배우게?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개미 보다 못한 사람”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 누가 개미 보다 못한 사람입니까? 바로 “게으른 자”(sluggard)입니다(6절). 그러면 게으른 자는 누구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는 사람이 바로 게으른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네이버 사전). 원어 히브리어를 보면 “게으른 자”란 ‘습관적으로 게으르고 활동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규율(훈련)도 없고 계획도 없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자’를 말합니다[a person who is habitually lazy and inactive, suggesting he has no discipline or initiative, as a moral failure(Swanson)]. 그러나 잠언을 보면 “게으른 자”란 그저 이런 의미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15장 19절을 보면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은 “게으른 자”를 “정직한 자”(upright)와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21장 25-26절을 보면 성경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자”를 “의인”(the righteous)하고 대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9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게으른 자”를 “해태한 사람(an idle man), ‘나태하여 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Walvoord). 이것을 볼 때 게으른 사람이란 그저 습관적으로 게으르므로 활동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규율도 없고 계획도 없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자란 의미 외에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는 자, 불의한 자란 의미도 포함돼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경 예레미야 48장 10절은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Cursed be the one who does the LORD'S work negligently)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오늘 본문 성경 잠언 6장 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그 말씀 자체가 이미 게으른 자는 개미보다 미련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과연 게으른 자가 개미에게 배워야 할 지혜는 무엇입니까? 2가지입니다(박윤선):
첫째로, 개미는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며 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7절을 보십시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Which, having no chief, Officer or ruler). 여러분도 “개미”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개미”하면 세로로 나란히 걸어가는 개미 떼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특히 저는 “개미”하면 음식 같은 것을 물고 떼를 지어 걸어가는 개미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저는 가끔 고개를 숙여서 떼를 지어 가는 개미들을 보는데 어쩔 때 보면 개미들 중 몇 마리는 어떠한 물체(음식)를 물고 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인터넷 글을 읽어 보니까 개미에 대한 흥미로운 점들이 있어 몇 가지 나눕니다(인터넷):
(1) 개미들은 서로 사려(thoughtful)가 깊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로 “개미”하면 여왕개미하고 일개미로 생각하지만 “척후 개미”(patrolling ant)가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미는 척후 개미를 보내어 먹이를 찾아낸다고 합니다. 찾아 낸 후 척후 개미는 미숙한 동료를 데리고 천천히 세로로 나란히 가며(병렬주행) 새로 발견한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이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개미는 인도자 선생 덕분에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가는 개미가 꾸물거리면 안내자도 속도를 늦추며 뒤쪽 개미가 다시 따라붙으면 다시 빨리 이동할 만큼 인도자 개미와 따라가는 개미 모두 매우 사려 깊다고 합니다.
(2) 개미들은 서로 상부상조(help each other) 한다고 합니다.
개미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은 그들의 “의사소통”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개미는 페로몬(같은 종의 동물끼리의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화학적 신호를 말함)으로 서로 소통한다고 합니다. 개미의 화학 신호는 다른 벌목 곤충보다 훨씬 발달하였는데 다른 곤충과 마찬가지로 개미는 길고 가늘며 움직일 수 있는 더듬이로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더듬이 한 짝에서 냄새의 강도나 방향에 대한 정보를 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개미 대부분이 땅에 살고 있으므로 지표에 페로몬으로 길을 남겨 다른 개미들이 따라올 수 있게끔 한다고 합니다. 무리지어 정찰하는 종중에서는 먹이를 찾는 척후 개미는 먹잇감에서 개미집 방향으로 흔적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다른 개미들이 이 흔적을 따라가며, 이들이 먹이를 들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냄새 길을 더욱 보강한다고 합니다. 그 곳 먹이가 다 없어지면 돌아오는 개미가 표시를 하여, 냄새는 천천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은 개미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가령 먹잇감과 이어진 냄새길이 장애물로 막히면 척후 개미는 길을 벗어나 새로운 통로를 찾는다고 합니다. 한 개미가 새 길을 찾으면, 개미는 돌아오면서 지름길을 냄새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좋은 길로 개미들이 몰리게 되어, 지름길의 냄새는 강해지고 점차 최선의 통로를 찾는다고 합니다.
(3) 개미들은 크기에 따라 전문 직종을 나눈다고 합니다.
개미들의 “식량 재배”를 보면 대부분의 개미는 잡식 포식자이자 죽은 생물을 처리하는데 그러나 그 밖에 특별한 영양 공급 방법을 발전시킨 개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개미를 “가위개미”라고 하는데 그 개미들은 자기네 개미집 안에서만 버섯을 재배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계속 잎을 모아 자신의 군체로 가져와서 작은 고작으로 자르고 버섯 농장에 놓는데 일개미들은 크기에 따라 전문 직종을 나눈다고 합니다. 가장 큰 개미는 줄기를 자르고, 더 작은 일개미는 잎을 씹으며, 가장 작은 개미는 버섯을 돌본다고 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로 “개미”하면 “부지런함”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이렇게 개미들이 서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협력하여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사실이 …. 그러나 게으른 자는 어떻습니까? 감독하는 자가 있어도 그 감독하는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무책임하게 일도하지 않으면서 시간만 낭비하지 않습니까? 잠언 19장 24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넣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한 게으른 자들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서 로 상부상조하면서 협력하면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감독하는 개미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서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협력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들에 가서 자세히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둘째로, 개미는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8절을 보십시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여러분,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이를 아시죠? 그 유명한 이야기를 보면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개미들을 조롱합니다: “어이, 개미들, 여름에 겨울 준비를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추운 겨울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매일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며 살다가 겨울에 되서는 먹을 음식이 없어 밥을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이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개미처럼 되어야지 베짱이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개미처럼 근면성실하게 살아야 하지 베짱이처럼 게으르게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이 이솝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저 개미처럼 근면성실해야 한다는 교훈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뭐 어릴 때야 누가 미래를 걱정하면서 준비할 필요성을 느끼겠습니까? 오늘 잠언 6장 8절에서 성경은 개미보다 못한 사람에게 개미에게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 30장 25절에서도 성경은 개미를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 즉 자기들의 음식을 여름에 미리 준비하는 개미들이다(they prepare their food in the summer)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개미들은 “여름”에 겨울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여름이 추수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에 개미들은 겨울철 먹을 것을 모아 들인다고 합니다(박윤선). 이렇게 개미들은 추수 때에 자기들이 겨울철에 먹을 음식들을 미리 준비하는데 게으른 자들은 오늘 본문 잠언 6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르게 좀 더 자고 좀 더 졸다가 결국에는 어떻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24:34) 가난이 온다는 뜻입니다(MacArthur).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6장 9절에서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면책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잠언 21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들은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게으른 자들은 일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1-13절을 보십시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게으른 젊은 과부는 오히려 집집에 돌아다니면서 망령된 폄론을 하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므로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에게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26:16)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3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게으름의 악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개미처럼 추수할 시기에 미래(장래)를 위하여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개미처럼 상부상조하는 정신으로 협력하여 부지런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실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추수할 것이 많은 이때에 우리는 부지런히 상부상조하며 협력하여 영혼 구원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서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기름과 등을 준비하여 예수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결과 주님 앞에 설 때에 결코 아무도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는 책망을 들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마 25:26). 오히려 우리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