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6장 1-5절]
여러분은 누군가를 위하여 보증을 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를 들어 여기 미국에선 차를 살 때에 은행에서 융자를 하면서 co-sign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연대보증”이라고 합니다. 즉, 채무자와 동일한 성실변제의 의무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채무자(debtor)가 변제(pay off what one owes)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을시 연대 보증인이 채무를 변제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여러분 중 혹시 그 co-sign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그 co-sign을 하므로 대신 은행에 한 달이던 두 달이던 차 값을 대신 물어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몇 년 전에 교회에서 한 히스패닉 형제가 차를 사는데 co-sign을 해달라고 직접 부탁을 받아 좀 곤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참 제가 보기에도 참 착하고 신실하게 보이던 형제였는데 그 난감한 상황에서 제가 co-sign을 하는 것을 못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물론 그 형제가 그 당시 안정적인 직장도 있었고 부인도 참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고 등등 제가 거절할 이유가 거의 없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교인들 중 누구는 보증 서주고 누구는 안서주고 그럴 수 없다는 제 생각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보증을 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co-sign를 하지 않았는데 그 형제는 다른 사람이 보증을 서줬는지 얼마 안 있다가 차를 새 차를 구입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부가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저희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듣기론 그 부부가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식이 끊겼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이요 보증에 관한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충분히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과연 성경적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과연 성경에서는 보증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6장 1-5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웃을 위하여 담보나 보증을 서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 요점은 만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위하여 담보 또는 보증하였다가(1절) 우리가 그 이웃의 손에 빠졌을 때(2-3절), 즉 우리가 그 이웃의 채무 이행 책임을 떠맡게 되었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하라(deliver yourself)고 말하고 있습니다(5절). 무슨 말입니까? 지금 성경은 저와 여러분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어리석은 행동이란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 상태를 알면서도 채무 불이행(defaults)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 그 빚을 갚는 책임을 약속하는 것, 즉 보증을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박윤선 박사님은 물론 여기선 보증을 서는 것 그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박윤선). 그 이유는 우리의 이웃이 경제적으로 곤란할 때 그 이웃을 위하여 보증인이 되어주는 것도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 왕이 경고하고 있는 어리석은 행동은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만일 보증을 선 것이 사고가 생길 때에 실제로 책임질 것을 각오하지 못한 보증인이나 혹은 남에게 속아서 보증인이 된 사람 또는 책임을 이행할 경제적 실력이 없는 보증인을 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물론 우리가 그 빚을 갚을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설 각오를 하고 보증을 선다면 그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성경에서는 우리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서기보다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참고: 신 15:1-15; 19:17) 또는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것(참고: 레 25:35-38; 28:8)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MacArthur).
이번에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접하셨겠지만 경제 대국이라는 미국이 디폴트 (default), 즉 채무 불이행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었습니다. 물론 공화당과 민주당에 극적인 타결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만일 미국이 채무 불이행 상황까지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결과 미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면 현실적으로 어느 나라가 나서서 그 많은 빚을 갚아주겠다고 약속을 하겠습니까? 돈 많은 중국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나라 적으로 채무 불이행 때에도 담보나 보증을 서려고 하는 나라가 없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빚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진 사람을 누가 나서서 그 빚을 갚겠다고 보증을 서는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자기 자신도 그 빚을 갚을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나서서 보증을 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경제적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사랑한답시고 다른 형제가 진 빚을 갚은 책임을 약속하는 보증을 섰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오늘 본문 잠언 6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보증을 선 우리가 “노루가 사냥꾼에 손에” 사로 집힌 것처럼 그리고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 잡힌 것처럼 대금업자(money lender)의 손에 잡혀서 그 대금업자의 컨트롤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채업자의 돈을 빌려다가 값을 수도 없으면서 다 사용한 후 그 사채업자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왜 뻔히 그 결과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씁니까? 아무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22장 26절 하반절에서는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Do not be a man who puts up security for debts)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 없는 자”가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된다(17: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판단력이 부족한 지혜 없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결코 우리는 남의 빚에 함부로 보증을 서서 노루가 사냥꾼에 손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리고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 잡히게 된 것처럼 대금업자의 손에 잡혀서 그 대금업자의 컨트롤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저와 여러분이 미련하여 우리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섰다가 그 이웃의 채무 이행 책임을 우리가 떠맡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 교훈입니다. 그 핵심 교훈은 한 마디로, 성경은 ‘스스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6:3) “… 스스로 구원하되”, (5절) “… 스스로 구원하라”].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구원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6장 3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성경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가서 겸손히 그 이웃에게 간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Walvoord란 학자의 의하면 그 말의 뜻은 우리 자신을 부서트리고 밟아서 뭉개 되데 우리 자신의 위신이나 품위를 손상시킬 정도로 엎드려 그 이웃에게 애원하라는 말입니다(Walvoord).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보다보면 사채업자에게 끌려가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두 손으로 싹싹 빌면서 빚 갚는 기간을 좀 연장해 달라고 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 같으면 그 정도로 굴욕감을 맛보면서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대금업자에게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빌겠습니까? 오늘 본문 3절 말씀의 교훈은 만일 우리가 책임 의식 없이(확실한 책임감 없이) 남의 보증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채권자나 또는 보증 혜택을 입은 자에게 애걸하여서라도 그 보증을 취소시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박윤선). 성경은 그 보증을 취소시키도록 하되 취소되기 전까지 우리는 여유 있게 시간을 부리면서 쉬면 아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어떻게 우리가 잠을 자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정도로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기에 절박감(긴급감)을 가지고 보증을 취소하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지금 마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 잡힌 것처럼, 또한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 걸린 것처럼 그러한 긴박한 상황에 쳐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여유 있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잖습니까? 사냥꾼에 그리고 새 그물을 치는 자의 손에 걸렸다면 어떻게 서든 거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만일 우리가 책임 의식 없이 남의 보증인이 되었다가 갑가기 채무이행을 우리가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우리는 절박감(긴급함)을 가지고 보증을 취소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서 대금업자에게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보증을 취소해 달라고 애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노예가 된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구원하여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이번 미국이 디폴트(default), 즉 채무 불이행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므로 들어난 사실은 지난 1월말을 기준으로 미국의 빚은 14조 6백억 달러였는데 이 국가부채는 3조 달러인 2010년 미국 예산의 5배이고 2011년 한국 예산(약 2600억 달러)의 54배에 달하는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미 연방정부의 재정 문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하면 미국의 국가부채가 5초마다 10만 달러씩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람에 누어있는 신생아까지 포함한 미국 인구를 3억 9백만 명이 한 사람당 진 빚이 45,390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인터넷). 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미국을 가리켜 “파산 직전의 ‘빚의 제국’”이라고도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지금 미국 나라만 그러겠습니까? 미국 연방정부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경제난도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Los Angeles 도시도 경제난을 맞이했고 많은 회사들이 경제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민 교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괜찮을 때 “믿음으로”(?) 예배당 건축을 했다가 지금 경제난을 맞이하여 파산위기에 놓인 교회도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까지 된 것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이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교회도 “믿음”(?)이라는 말 아래 경제 모험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 기독교인 가정들은 어떻습니까? 빚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롬 13:8)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정 관리를 신실하게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명분아래 이웃에게 보증을 서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채무 불이행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대금업자에게 빚을 져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은 스스로 구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6:3, 5). 만일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여 잘못 보증을 섰다면 그 보증을 취소하기 위하여 대금업자에게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애걸까지 해서라도 우리는 스스로 구원해야 합니다. 애걸하되 문제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깨달아 알아 우리는 여유를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긴급성과 절박감을 가지고 스스로 구원하여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대금업자가 우리의 보증을 취소해 줄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대금업자가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 구원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직 구원자 주님만이 우리를 그러한 상황에서 건져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원자 주님께 애걸하듯이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무능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를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그러므로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 다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 상태를 알면서도 채무 불이행(defaults)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 그 빚을 갚는 책임을 약속하는 보증을 서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