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생각할 때 두렵습니다.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었노라 하게 될까 하노라”(잠언 5장 11-14절).
저는 세 자녀들을 둔 아버지로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란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선물로 주신 딜런, 예리 그리고 예은이가 자라나면서 사춘기 때 삐뚤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게 이러한 두려움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제 자신이 사춘기 때 삐뚤어 나아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이 세 아이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신앙과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이지만 미래 일을 알 수 없기에 저는 그저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11-14절을 보면 잠언 기자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그가 죽고 나서 자기 아들이(1절) 나이 들어 몸(육체)이 쇠패할 때에(11절) 자기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후회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잠언 기자가 두려워했던 아들의 후회하는 인생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왜 내가 부모님의 훈계와 꾸지람을 싫어하며 가볍게 여겼는가?’와 (2) ‘왜 내가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는가?’ 우리 인생의 여정에 참으로 중요한 만남이 있다면 그 만남은 바로 부모님과의 만남과 선생님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이 두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부모님과 선생님은 우리의 삶에 제일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끼치는 부모님의 영향은 선생님의 영향보다 더 크고 엄청나다 생각합니다. 물론 선생님의 가르침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부모님의 훈계와 꾸지람은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과 선생님의 영향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부모님의 교훈과 꾸지람을 싫어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를 잘되라고 교훈하며 꾸짖으신 부모님과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바램과 달리 우리는 삐뚤어진 길로 걸으면서 악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그리고 어느 선생님이 자기의 자식이, 자기의 제자가 죄악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길 원하겠습니까? 지금 잠언 기자는 이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자기의 아들은 나이가 많아 육체가 쇠패할 때 자기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부모님의 교훈과 꾸지람을 싫어하고 가볍게 여긴 것을 후회하며 또한 자기의 선생님의 가르침에 청종치 아니한 것을 후회하면서 자기 아들이 모든 악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잠언 기자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부모님의 교훈과 꾸지람과 선생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므로 말미암아 원치 않은 결말이 자기 아들에게 올까봐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두렵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생각할 때 잠언 기자와 같은 두려움이 없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이미 두려워하던 일이 여러분의 살아생전에 현실로 일어났습니까?
저는 과연 세 자녀의 아버지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언 기자처럼 “내 지혜”와 “내 명철”(1절)을 세 자녀에게 전수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떻게 제 지혜와 명철을 세 자녀에게 전수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저의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지만 그 보다 더 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합당한 삶을 하나님과 세 자녀 앞에서 살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저 제 마음은 세 자녀를 향한 이 아버지의 두려움이 현실화 되지 않길 하나님께 간절히 기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