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주의해야 합니까?

 

 

 

[잠언 51-14]

 

 

여러분은 여러분 주위에 성폭행 당한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지난 주 인터넷 조선일보를 보니까 “동기생 집단성추행 의대생들, 유력 로펌 변호사 대거 선임”이란 제목 아래 기사가 뜨거운 논쟁 기사인 것 같아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기사 내용은 술에 취해 잠든 동기 여학생을 나이가 20대 초,중반인 한국 K대 의대생들 3명이 집단으로 성추행한 협의로 구속 기소되었는데 그들의 법무법인(로펌)의 변호사들을 대규모로 선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3명의 학생들이 선임한 변호사들이 다 합쳐서 10명 정도 되는가 봅니다. 그것도 유명한 변호사들인가 봅니다. 그러니 의문이 드는 것은 어떻게 학생들이 변호사 비용을 충당하려고 그 많은 유명한 변호사들을 고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추행이나 성폭행 및 강간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당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성폭행을 반대하는 조직(anti-sexual violence organization)이라고 하는 RAINN(Rape, Abuse & Incest National Network)란 단체의 성범죄 통계를 보니까 약 2/3의 성폭행은 피해자가 아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8%의 강간범들은 친구이거나 아는 사람(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통계를 보니까 매 2분마다 미국에 사는 사람 중 누군가가 성적으로 폭행을 당한다고 합니다(sexually assaulted)(인터넷). 참으로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만큼 성적 유혹이 많은 세상이요 그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 만큼 많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지난 두 주 수요기도회 동안 잠언 4장 20-27절 말씀 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하는지 한 다섯 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20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21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지키며(21절)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합니다(24절).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발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함을 우리는 배웠습니다(26-27절). 오늘은 잠언 5장 1-14절 말씀 중심으로 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1절)에 주의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 2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That you may observe discretion And your lips may reserve knowledge).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지식과 근신함을 얻어(1:4) 우리를 지키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2:11; 3:21-24). 그러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에 주의하여 지식과 근신함을 얻으므로 말미암아 그 지식과 근심함이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음녀 곧 창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지혜에 주의하여 지식과 근신함을 얻을 때에 그 지식과 근신함이 우리를 음녀의 유혹으로 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며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말입니다[(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여기서 “음녀의 유혹”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잠언 4장 3절을 보십시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For the lips of an adulteress drip honey And smoother than oil is her speech).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음녀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바로 입술의 유혹입니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고 그녀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다는 말씀(3절)은 음녀가 우리를 입술로 유혹하는 것은 그만큼 간교하고 능란하여 우리의 귀에 달콤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유혹에 넘어가 믿음에서 미끄러지게 하기에 위협적이라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성경은 음녀의 입술이 처음엔 달콤하고 매력적이고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것 같아도 나중에는(끝에는) 그녀의 입술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워서(4절) 결국 우리를 영적 사망인 “사지”와 영원한 멸망인 “음부”로 이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박윤선). 이것이 바로 음녀가 우리를 입술로 유혹하는 목적입니다. 그녀는 우리로 하여금 쾌락주의에 빠져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도록 하여(6절)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멸망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음녀의 유혹을 이기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음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버리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우리가 음녀의 입술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음녀의 입술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꿀과 같이 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가 시편 19편 10절에서 고백하는 그 음성을 듣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꿀맛을 보고 있다면 결코 우리는 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유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음녀의 유혹의 목소리가 아무리 꿀과 같이 달콤하게 들릴지라도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꿀맛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점점 멀리하다가 결국에는 그 말씀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입의 말씀보다 이미 기름보다 미끄러운 음녀의 입에서 떨어뜨리는 꿀과 같은 미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송이 꿀이 심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음녀의 송이 꿀’이 심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 전 저희 집에 벌들을 없애는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한 사람은 와서 사닥다리로 집 지붕 쪽까지 올라가서 약을 뿌리고 갔는데 얼마 후 그 많은 벌들이 죽어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후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지붕에 올라가더니 아예 지붕의 부분을 뜯어서 그 안에 있는 송이꿀(honeycomb)을 다 없앤 후 다시 지붕을 잘 덮었을 뿐만 아니라 벌들이 다시금 지붕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지붕과 벽 사이에 틈들을 다 막아주고 갔습니다. 그 벌 없애는 전문가 얘기를 들어보니까 지붕을 뜯어서 송이 꿀을 없애지 않으면 그 꿀들이 녹아서 벌레와 쥐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벌들도 다시 모이게 된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거금을 들여서라도 송이 꿀을 없앨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 사단이 음녀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육신의 쾌락을 좇는 죄악 된 송이 꿀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 꿀보다 더 달게 여기는 성도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므로 그 사단과 음녀의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틈을 다 막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의 꿀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은 여기 저기 틈들이 많아 사단과 음녀의 유혹에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 꿀보다 더 달게 여겨야 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 묵상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므로 우리는 음녀의 입에 나오는 어떠한 유혹도 우리 마음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음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선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8절을 보십시오: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성적 유혹이란 것은 매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든지 피함으로만 이기게 된다”(박윤선).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라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라 생각합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던 요셉(창 39:6)을 보디발의 아내가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되(7절)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어도(10절)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동침하기를 거절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0절). 그러나 하루는 보디발의 집에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있게 되었을 때(11절) 그녀가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동침하자”고 말했을 때 요셉은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갔습니다(12절). 그러므로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는 되었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은 요셉처럼 성적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범죄하며 마음의 감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적 죄악의 사슬에 매여 성적 노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요셉과 달리 여인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다윗 외에 삼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딤나에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아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삿 14) 가사에 가서는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고(16:1) 또한 그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하므로(4절) 그녀의 꾐에 넘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결국 나중엔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가까이 하면서 성적 유혹을 이기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래 전 들은 이야기는 창녀 사역을 하는 어느 목사님이 결국에는 죄를 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후 제가 아는 어느 한 여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창녀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하신다는 말을 직접 들은 기억도 납니다. 참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엄청난 도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행과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기의 집 문에도 아예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창기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 하되 창기의 말을 멀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 창기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솔로몬 왕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지 않고 그녀의 집 문에 가까이 갈 때 어떠한 불행한 결말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그 불행한 결말을 한 5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 우리는 존영을 상실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Or you will give your vigor to others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길을 음녀의 집 문에 가까이 갈 때 첫 번째 불행한 결말은 우리는 존영을 상실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존영”이란 “힘 또는 정력”(strength or vigor)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명예(honor)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녀를 멀리하지 않고 그녀의 집 문에 가까이 하므로 결국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 때 우리는 힘도 잃는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오늘 본문 9절 상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상실은 힘이라기보다 명예의 상실을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가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란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사울 왕 밑에 있었을 때에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고 명예를 얻었지만 그가 왕이 되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후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죄를 들춰내셨을 때에는 자기의 명예와 영광(splendor)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란 말… 결국 남의 부인을 통하여 솔로몬을 낳았다고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음행의 죄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알려진 것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야곱의 아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음행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3)(박윤선). 다말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지 않고 그녀의 집 문에 가까이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청춘 시절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네 수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And your years to the cruel one).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음녀를 가까이 할 때에는 우리의 황금과 같은 시기인 청춘을 잔포자인 음녀에게 다 낭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전도서 12장 1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청년이란 황금과 같은 나이는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섬겨야 할 좋은 시기인데 그 황금과 같은 시기를 하나님이 아니 음녀에게 허송세월을 한다면 그 젊은이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음녀가 잔포자 또는 잔인한 자인 것은 청년들을 젊은 시기를 허송세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지 않고 그녀의 집 문에 가까이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재산과 수입을 상실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10절을 보십시오: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And strangers will be filled with your strength And your hard-earned goods will go to the house of an alien). 음녀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명예나 시간만 상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탕진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가 물질로도 하나님께 받쳐 하나님께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음녀의 유혹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 물질을 받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음녀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꼴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이가 없는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데 그 받은 축복을 이방인 여자인 음녀에게 갖다 바치고 있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럴 바에는 오히려 물질을 다 잃어버리는데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음녀에게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지 않고 그녀의 집 문에 가까이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건강도 잃어버리므로 후회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11절을 보십시오: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And you groan at your final end, When your flesh and your body are consumed).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창기와 동침하므로 성병에 걸려서 육신이 쇠약해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까? 아직도 AIDS라는 병은 고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참으로 무서운 것은 자기가 AIDS를 걸린 줄 알면서도 어떠한 창기들은 다른 이들과 동침하므로 성병을 번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뉴스를 접하다보면 얼마나 사람들이 잔인하고 악한지 결국 창기와 동침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건강을 잃어버리므로 말미암아 질병 가운데서 끝에 가서는 한탄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지 않고 그녀의 집 문에 가까이 할 때 우리는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되어 양심상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5장 12-14절을 보십시오: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었노라 하게 될까 하노라.” 끝에 가서 명예도 잃고 시간도 허비하고 재물도 잃어버리고 건강도 잃어버린 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선생님에게 훈계를 받고 꾸지람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훈계와 꾸지람을 싫어하고 듣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결국 이스라엘 성회에 속하여 살면서도 파렴치하게 많은 죄를 범하였으니 이 얼마나 더 큰 죄입니까?(박윤선) 지금도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목사님들이나 교사 선생님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받고 면책을 받으면서도 목을 곧게 하면서 자기 고집과 죄악의 본능대로 성적인 범죄를 지고 있는 자들은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할 것 같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많이 배우고도 그 진리를 거스리는 자의 죄는 더욱 많은 벌을 받는다”(눅 12:47-48).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지식과 근신함을 얻어 우리를 음녀의 유혹으로부터 지키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창기의 유혹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버리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창기의 유혹에 넘어가 명예와 시간과 재물과 건강 다 잃어버리고 양심에 고통 속에서 후회하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