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잠언 327-35]

 

 

여러분은 인간관계를 잘 하고 계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떠오릅니까? 그러면 지금 여러분과 관계가 안 좋은 사람(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 생각에 떠오릅니까? 언젠가 어느 지체가 교회 안에서 다른 교우들과의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다고 나누기에 그 때부터 제 개인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가끔씩 인간관계에 대한 글들을 적어서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12월 1일 날짜에 “용납하라”란 제목 아래 쓴 그 글 내용을 저는 다시 읽으면서 지금도 공감하는 것은 우리 인간관계에 있어서 참 용납하기 힘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며 아프게 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과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도 용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해답은 로마서 15장 7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용납하신 것을 깨달아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사람들조차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를 알아갈 때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달아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원수조차도 용납하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27-31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하지 말라’(“Do not”)라는 명령으로 다섯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27, 28, 29, 30, 31절). 이 다섯 구절들은 지혜로운 자가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다섯 구절의 말씀을 우리는 한 3그룹으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Walvoord). 이 3 그룹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한 3가지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그 세 가지 원리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 실제로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지혜롭게 적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첫 번째 원리는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27-28절을 보십시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저회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보내신 이 메일의 글을 읽어 보니까 사람이 죽을 때면 보편적으로 3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첫째가 바로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 주지 못했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이 가장 큰 후회랍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후회를 혹시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국에 슈바이처라고도 불렸던 고 장기려 박사님은 평생 주님 사랑과 섬김 그리고 이웃 사랑과 섬김으로 한 평생을 재물로 바치셨던 분으로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 45분 경 85세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때 한국의 언론은 그 분을 가리켜 “살아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렸다고 합니다(인터넷). 그 분은 의사로서 “의사 한번 못 만나고 죽어 가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약속대로, 그의 일생은 가난하고 버림받고 외면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삶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그가 머무르는 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들은 언제든지 부담 없이 그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산복음병원을 무료의료기관으로 운영하려 했으나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재정적 여력이 없어 유료로 전환한 뒤에도, 가난한 환자들은 그냥 나가도록 공공연히 뒷문을 열어 놓아 병원 직원들을 곤란하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고 장기려 박사님은 끊임없는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3장 27-28절에서 솔로몬 왕은 저와 여러분에게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인 궁지에 빠진 자에게 아끼지 말고 베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유가 있는 자들로서 궁지에 빠진 불쌍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유 있게 하신 목적이 남들을 도와주도록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여유 있게 하신 이 목적을 깨달아 궁지에 빠진 불쌍한 우리 이웃을 돕데 신속히 도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도울 힘이 있으면서도 그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28절). 생각해 보십시오. 궁지에 빠진 사람이 여유가 있는 우리에게 와서 도움을 청할 때에는 얼마나 시급한 상황이겠습니까? 우리는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궁지에 빠진 이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이웃에게 아낌없이 선을 배품에 있어서도 미루지 말고 궁지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여 신속히 도와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훈을 고용주(employer)와 종업원(employee)의 관계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 재정적 여유가 있을 때 자기가 고용한 종업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여 그 종업원에게 주급이던 월급이던 그 때 그 때 임금(wage)을 지불(pay)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첫째로, 종업원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땅히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잠언 3장 27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것을 마땅히 그 주인들에게 주는 것을 거부(보류)하지 마십시오’[“Do not withhold good from its owners”(Walvoord). 무슨 말입니까? 가게에서 고용주가 가지고 있는 돈 중 종업원이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일하여 번 돈은 더 이상 고용주 것이 아니라 종업원 것이기에 고용주는 그 돈의 주인이 종업원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여유 있는 고용주는 여유가 없는 종업원이 주급일 경우 일 주일 일주일 살아가는 것, 월급인 경우 한 달 한 달 살아가는데 여유가 없고 오히려 재정적으로 빡빡하게 살므로 그 주급 또는 그 월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주급이던 월급이던 그 때 그 때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고용주라면 한번 종업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종업원이 일주일이던 한 달이던 열심히 일을 했는데 자기가 일한 만큼 임금을 그 때 그 때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만일 내가 고용주에게 받아 마땅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계속을 일을 해야 한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그 고용주를 위해서 계속 일을 하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일주일 일주일, 또한 한 달 한 달 받은 임금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 주급이나 월급을 고용주란 사람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 신명기 24장 15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9:6).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베풀되 특히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춰볼 때 배품에 있어서 참으로 인색하다는 생각을 제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왜 내가 이렇게 인색한가 자아성찰해 볼 때 그 원인은 제 안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의 이기적인 마음의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고 넓게 깨닫고 경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통하여 제 이웃에게 흘러가야 할 텐데 저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하여 인색한 작은 배품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음을 하나님께 용서를 수요기도회 때 구했습니다. 고 장기려 박사님처럼 베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소외되고 상처입고 아픔과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섬기고 싶습니다. 섬기되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므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친구를 만들어 가는데 헌신하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두 번째 원리는 우리는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잠언 3장 27-28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1)”란 제목 아래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세워 나아가야 하는지 첫 번째 원리를 배웠습니다. 그 첫 번째 원리란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3장 27-28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저는 여기서 3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다시 한 번 집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 3가지 포인트란 (1) 우리 모두는 베풀 힘이 있다는 것과 (2)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3) 우리가 선을 베풀되 아끼지 말고 신속히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3가지 포인트를 묵상하고 나눈 후 한 일주일 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적용케 하시고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한 3 가지 예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우리 모두는 베풀 힘이 있다는 포인트를 생각할 때 주로 우리는 경제적으로 베푼다고 생각하지만 그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를 우리 이웃에게 베풀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일주일 동안 살아오면서 저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의 이 메일과 전화를 받게 하시사 따뜻한 한 마디의 위로를 베풀 힘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 예는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마땅히 받을 자라는 사실과 남편 또한 아내에게 존경을 마땅히 받을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지난 주 수요기도회 후 말씀 묵상한 것을 이 메일로 여러 형제, 자매님들에게 나눈 후 저에게 온 한 형제님의 답변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부부 관계에도 적용하게 된 깨달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는 신속함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내가 요구되는 점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랑을 배품에 있어서 어쩔 때는 신속히 해야 한다는 교훈을 한 일주일 동안 살아오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잠언 15장 23절 말씀을 좀 배우게 되었습니다: “…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how good is a timely word!).

 

오늘 본문 잠언 3장 29-30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서로 오해도 사고 그 오해로 인하여 서로 관계가 나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때 일어나는 몇 가지 현상 중 하나는 서로를 향한 신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향한 신뢰가 깨지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다른 현상은 서로 오해가 더욱더 깊어지면 우리는 신뢰가 깨지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젠 원수가 되어 서로 모함하며 심지어 모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29절). 여 기서 “안연히 살거든”(lives trustfully)란 말씀은 우리 곁에서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면서 살고 있는 이웃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뢰감을 주는 이웃을 우리가 모해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그러한 신뢰감을 주는 이웃을 우리에게 아무 악도 행하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까닭 없이 비난하여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0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이 자기 궁 곁에 가까이 살고 있었던 이웃 나봇에게 행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사마리아 왕 아합이 자기 궁 곁에 가까이 있는 나봇이란 사람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서 나봇에게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고 만일 나봇이 자기 포도원을 팔면 그 값을 돈으로 주겠다고 했지만(2절) 나봇은 거절했습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열조의 유업을 아합 왕에게 주시를 금하셨기 때문입니다(3절).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뢰할 만한 이웃인 나봇을 아합의 아내 이세벨 왕후가 결국 그를 모함하며 모해하여 죽여 버렸습니다(8-13절). 남편을 돕는 배필인 이세벨 왕후가 남편 아합 왕을 돕데 그의 욕심을 채워주고자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 나봇이란 가까운 이웃을 모함하여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신실하게 살고 있던 이웃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의 죄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뢰할 만한 이웃 나봇을 모함하고 모해하여 죽인 이 죄악 된 일이 결코 아합 왕 시대 때만 있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우리 가까운 이웃과 신뢰하는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단은 예수님의 계명인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우리와 우리 가까운 이웃과의 신뢰관계를 어떻게 해서든 깨려고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사단은 제 삼자를 미혹하여 그를 사용하여 우리의 신뢴 관계를 이간질 시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에게 거짓말을 집어넣어서 우리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이간질 시켜 신뢰관계를 깨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계속 진실하고 신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신뢰감을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좀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신뢰감을 주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뜻(말씀)대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까닭 없이 우리 주위 사람들을 오해하여 그들에게 피해를 주며 모함하며 모해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우리를 신뢰하는 우리 친척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등에게 그 신뢰감을 깨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인 이웃을 우리 몸 같이 사랑하는 과정에서 사단의 끊임없는 미혹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것이 영적 전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 가까운 이웃을 신뢰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설상 그 이웃이 나중에 우리를 오해하고 우리 뒤에서 다른 사람들과 수군수군하며 우리를 모해하고 모함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 가까운 이웃을 신뢰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간관계를 주관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로서 우리 이웃에게 신뢰감을 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마지막 세 번째 원리는 우리는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관계 중에 제일 즐겁고 기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관계는 부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저는 인간관계 중에 제일 슬프고 괴롭고 불행 감을 느끼게 하는 관계가 바로 부부 관계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에게 제일 위로가 되는 위로자(the best encourager)인 반면에 또한 제일 낙심케 하는 자(the worst discourager)도 됩니다. 과연 부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부부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3)”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잠언 3장 27-31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미 묵상한 2가지 원리와 더불어 세 번째 원리도 부부 관계에 적용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부부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 중심된 부부관계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1)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27-2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저는 이 교훈을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에 이미 적용했습니다. 오늘은 이 교훈을 부부 관계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남편들은 마땅히 사랑을 받을 자인 우리의 아내에게 사랑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남편들은 아내는 제일 가까운 내 아내이기 때문에 내 아내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내조차도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많은 변명 중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아내가 사랑 받을 만하게 우리를 존경해야지 우리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 에베소서 5장 25절은 우리 남편들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내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랑 받을 만한 언행을 해서 우리가 우리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우리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내는 우리의 사랑을 마땅히 받아야 할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마땅히 사랑 받을 자로 알고 사랑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그녀의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존경(respect)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줘야 합니다. 물론 아내들은 그녀들의 남편을 존경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내 남편이 나에게 존경 받을 만한 언행을 일삼지 않는데 어떻게 존경할 수 있습니까?’ 성경 에베소서 5장 24절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 또는 경외(respect)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아내들은 주님께 하듯 그녀들의 남편을 존경해야 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2) 우리는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29-30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우리 곁에서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제일 가까운 이웃은 부부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남편 또는 우리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사단은 서로에게 신뢰감을 주기보다 그 신뢰감을 깨고자 의심과 불신을 우리 각자 마음에 심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들은 아주 조그만 일로도 크게 싸우고 다투곤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 조그만 일로 서로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오해를 하면서도 그 오해를 풀려고 어떻게 대화할 줄을 잘 모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오해로 인하여 서로를 향한 신뢰가 깨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엔 오해가 쌓일 때 그 쌓인 오해가 장성하여 불만과 불평 그리고 불신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로도 분노가 쌓인 것들이 폭파하여 크게 다투고 싸웁니다. 결국 남편과 아내가 부부 관계가 아니라 원수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남편들은 우리들의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들은 우리 남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까닭 없이 서로 비난하며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30절). 또한 우리는 서로에 까닭 없이 피해를 주면서 모함하고 모해하는 그러한 부부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 부부들은 서로에게 신뢰감을 주는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부부관계에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정직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내는 그녀의 남편을 그리고 남편은 그의 아내를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 아니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므로 서로를 신뢰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31절을 보십시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우리는 이악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포악한 자나 죄인이나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할 때가 있습니다(잠 23:17; 24:1, 19). 그 결과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서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시 73:1).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포악한 자나 죄인과 악인들은 형통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충분히 실족하여 그 악인들의 행위를 좇아 하나님께 범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3장 31절에서 솔로몬 왕은 포학 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우 리는 포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 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3장 32-35절에서 한 4가지 이유를 성경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Walvoord). 이 4 가지 이유를 생각하면서 부부관계에 적용해 보고 자 합니다.

 

(a) 하나님께서 그 패역한 자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32절을 보십시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우리가 포악한 자들이나 악인들의 형통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행위를 좇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분명한 이유에 우리가 뭐 이렇고 저렇고 핑계될 것이 있습니까? 간단하고 단순하고 명백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포학한 자들이나 악인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의 행위를 좇아서 아니 됩니다. 오히려 저와 여러분은 정직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자만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직의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다른 인간관계를 말할 것도 없고 제일 가까운 주님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우리 부부관계 안에 정직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 부부들이 패역한 자를 부러워하여 정직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기보다 패역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부부들은 주님과 깊은 교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부 서로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부부들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주님 안에서 깊은 교제를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패역을 버리고 정직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남편들은 주님께 정직하듯이 우리들의 아내들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정직하듯 아내들도 그녀들의 남편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b) 하나님께서 그 악인을 저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33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성경 잠언을 보면 솔로몬 왕은 여러 번 반복하여 우리에게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잠 23:17; 24:1, 19).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악인의 집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3:33). 비록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이 땅에서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결국은 파멸이요 전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73:18-19).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는 복을 내려주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잠 3:33).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기보다 의인의 고통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도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빌 1:29).

 

우리는 고통을 싫어합니다. 어느 부부가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은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들은 천 명의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여 좇기보다 한 명의 의인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29절).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부부들이 한 몸이 되어 의인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당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c) 하나님께서 그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34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우리가 이미 잠언 1장 26절에서 묵상했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책망을 듣기를 싫어하고(24절) 도리어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할 때(25절) 우리는 재앙을 만날 것이고(26절) 그리고 우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하나님께서 비웃으신다는 사실(26절)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듣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그 책망을 멸시할 때 우리는 향하여 비웃으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34절에서도 솔로몬 왕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십니다. 성경은 거만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거만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비웃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거만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들은 교만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에 교만함을 집어넣어서 서로를 겸손히 섬기기보다 서로보다 높은 자리에게 사랑 또는 존경을 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질시킵니다. 우리는 이 사단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우리 부부들은 예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마음이 겸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빌 2:5-8). 그러므로 우리 부부들은 서로를 우리 자신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3절). 그리고 우리는 각각 우리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각각 서로의 배우자의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4절). 그리할 때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4절).

 

(d) 하나님께서 그 미련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 35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 포악한 자들, 악인들은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수치심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양심도 마비되었고 얼굴도 철면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같은 죄를 거듭 짓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끄러운 줄 점점 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한 기독교 인터넷 뉴스 기사를 읽어 보니까 어느 한 목사님이 함께 큰 기독교 단체에서 동역하다가 그 나이가 더 많으신 교단 선배 목사님의 돈 선거를 폭로하면서 증거로 녹음한 테이프를 제시하는 글과 사진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뭐라 할 말이 잃었습니다. 그런데 저로 하여금 더 할 말 없게 만든 것은 그 사실을 폭로하는 참모 목사님이라는 사람이 증거물 녹음기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수치심을 느끼는 겸손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미련하여 우둔한 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으면서도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할 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을 범하고 나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고 나서도 수치심을 못 느끼는 그러한 미련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춰내실 때 우리는 좀 수치를 느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광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부부들은 하나님과 우리 자녀들 앞에서 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녀들 앞에서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며 서로 존경하지 않고 불순종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 앞에서 다투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양심이 마비되었고 우리의 얼굴이 철면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양심을 찌르시고 우리의 마음을 책망할 때 그 면책을 듣고 성령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1)~(3)란 제목 아래 잠언 3장 27-25절에서 주시는 3가지 인간관계 원리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우리는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우리는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포악한 자를 미워하시고 또한 그를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그 미련한 자를 부끄럽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정직한 자가 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기업으로 받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 저는 이 3 가지 원리를 우리 부부 관계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우리 주위에 많은 부부들이 부부 갈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며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비수를 꽂는 말도 분노 가운데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합니다. 부부들이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세상의 악인들의 형통도 부러워하며 겸손히 서로를 섬기기보다 거만함 가운데 서로를 컨트롤(control)하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부부들이 미련하여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사랑의 책망도 듣기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부부들은 서로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존경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남편은 마땅히 아내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며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부부들은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들은 서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기보다 의인의 고통에 서로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나보다 낫게 여기므로 겸손히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로운 부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 중심된 부부관계를 세우는데 헌신하여 부부 이혼율이 치솟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부부가 어떻게 다른지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를 들어내는 부부들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