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

 

 

 

[잠언 18-19]

 

 

지난 주 토요일(2011년 1월 8일) 애리조나 주 투산 지역의 한 쇼핑센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한 뉴스를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특히 ‘9.11. 둥이 소녀’라고 불리는 9살 난 크리스티나 그린에 관한 뉴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TV 뉴스를 보니까 크리스티나의 부모님의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좀 관심을 갖고 보았더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 딸이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사건 때에 태어났는데 이렇게 총 맞아 죽은 사랑하는 딸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글썽 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이틀 전인가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그 죽은 크리스티나란 아이의 장례식 때 캔자스 주의 한 침례교회가 시위를 예고하면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침례교회 교인들은 몇 년 전에도 전쟁에서 죽은 한 군인의 장례식 때에도 플랫 카드를 들고 ‘하나님이 저주하셨다’라는 식의 글을 써서 시위하므로 말미암아 큰 소란을 일으켰던 교회인데 이번에도 9살 난 크리스티나 어린아이의 장례식 때에도 그러한 소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리조나 주 입법부에서 그녀의 장례식에 다른 시위대들이 300피트 이내 접근 금지 할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는 CNN 인터넷 뉴스를 접했습니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접하면서 참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나 사단의 유혹에 놀아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사단의 유혹이 많겠지만 한 2가지로 요약한다면 저는 “혼동”(confusion)과 “환상”(illusion)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사단은 달콤한 환상(sweet illusion)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혼동 상태에 빠지게 만들어 하나님께 죄를 범케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사단의 유혹에 대항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고 합당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잠언 1장 1-7절에서 배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7절) 경건한 삶의 기술을 배우고(2절상, 3-4절) 영적 분별력을 개발시켜(2절하, 5-6절) 악한 이 때에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악한 시대에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서(약 1:5-6)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세월을 아끼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엡 5:15-17).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세나 의지, 느낌, 행실과 목적들이 하나님의 자세와 의지와 느낌과 행실과 목적으로 다 맞바꿔있는 정신 상태입니다(MacArthur).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지 결코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결코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구합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느낌, 주님의 자세와 의지, 주님의 행실을 본받아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삽니다. 이러한 삶을 저와 여러분이 살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본문 잠언 1장 8-19절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한 3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높이 들어 일으켜 사용해 주시는 은혜가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8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유대인 부모의 자녀 교육을 보면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토라)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목사님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녀가 4살이 되면 하루 3시간씩 토라(모세5경)을 암송하도록 시킨다고 합니다(인터넷). 과연 이러한 유대인의 근본적인 신본 주의적 교육 철학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그것은 바로 '쉐마(Shema)'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신명기 6장 4-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유대인 자녀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하는 영적 교육이 '쉐마'란 단어라고 합니다. 유대인 자녀는 어머니 무릎 밑에서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부터 이 '쉐마'란 단어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 리고 그들은 마지막 죽어 가는 임종 시에 모든 가족과 주위 사람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유언처럼 부탁하는 말도 역시 '쉐마'라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 어머니는 자녀들이 잠들기 전 '쉐마'를 외우게 합니다. 그 이유는 혹시 잠들다 죽을 경우 '쉐마'가 마지막 유언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 판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줘서 그들의 마음 판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줘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각인시켜야 하는가 하면 그 말씀에서 우리 자녀들이 떠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 중 하나는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새겨져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우리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데(시 119:56)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의 핵심은 바로 불순종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운다 할지라도 그 배운 말씀을 지켜 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것 즉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부모님들의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영적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기에 우리 자녀들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심겨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판이 아닌 그들의 머리에 심겨지고 있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심어주는 최고의 방법은 모범(an example)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범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자녀들도 우리의 본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소유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56절).

 

우리 젊은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잠 1:7) 믿는 부모님을 통하여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잠언 1장 9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젊은이들이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사슬”이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 순종이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영광이요 높여줌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박윤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던 다니엘도 하나님께서 높이셨고 요셉도 하나님께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젊은이들을 높이시사 당신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의 꾐을 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10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과연 악한 자들(죄인들)이 어떻게 젊은이들을 꾑니까? 바로 거짓된 행복을 약속하는 속임수로 젊은이들을 꾑니다. 그 거짓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악한 죄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약속하는 거짓된 행복은 물질이나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거짓말입니다. 이러한 거짓말로 젊은이들을 미혹하여 악인들은 그 젊은이들에게 함께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함께 해치자고 압력을 넣습니다(11절). 그것도 매우 잔인하게 해치자고 말합니다(12절). 그리고나서 그 죄 없는 자의 소유를 다 탈취해서 공동 소유로 만들자고 제안합니다(14절)(박윤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두 성경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1) 첫째로 생각난 성경 이야기는 바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이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봇이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좋은 포도원이 악한 아합 왕의 왕궁에 인접한 곳에 있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 포도원 대지를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했을 때 나봇은 자기 조상이 물려준 땅이므로 그 땅을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아합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 이세벨 이였습니다. 그녀는 궤계를 꾸며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위증하여 장로와 귀인들 앞에서 그를 쳐서 살해한 후 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입니까?

(2) 둘째로 생각난 성경 이야기는 어제 새벽기도회 때 읽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요셉의 형들이 도단이란 곳에서 양들을 치고 있었을 때 요셉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그를 죽이기를 꾀하였다(18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동생이 요셉을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라고 말하자고 서로 말을 맞췄습니다(20절). 그리고나서 그들은 그들의 맏형인 르우벤 몰래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고(28절)난 후 요셉의 옷을 취하여 수 염소를 죽여 그 곳에 피에 적시고(31절) 그 채색 옷을 아버지인 야곱에게 가져다가 보여드렸습니다(32절). 그 때 아버지 야곱은 다른 자녀들의 위로를 거부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35절). 어떻게 자기들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악한 마귀 사단은 거짓된 행복을 약속하는 속임수로 지금 우리 젊은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미혹을 받았을 때처럼 사단은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3:5-6) 거짓된 행복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죄악 된 세상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 물질과 이기적인 탐심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사단과 그의 종들인 악한 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이 아닌 이 땅에서의 순간적인 행복의 눈을 멀게 하여 영원한 것을 등한히 하게하고 순간적인 것들을 자꾸만 추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견고히 서 있어서 이러한 사단과 악한 자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본을 본받아 사단과 악한 자들의 꾐이 있을 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꾐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 꾐에 우리 마음을 양보(yielding)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15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1-2절이 생각났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 본문 잠언 1장 8-19절과 연관해서 생각할 때 우리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훈을 받습니다:

 

(1)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 우리가 이미 본문 잠언 1장 10절에서 묵상했듯이 우리는 악한 자들이 우리를 꾈지라도 좇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이나 잠언 1장 10절이나 우리에게 주는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할 때, 우리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만일 우리가 악인의 꾀를 좇게 되면 결국에 가서 우리는 그 악인들과 함께 죄인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악인의 꾐에 넘어가면 결국에 가서 우리는 그 악인들의 범죄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의 길에 아예 서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악인들과 함께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3) 그리할 때 우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결국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꾀를 좇게 하여 죄인의 길에 서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교만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아예 함께 다니지도 말아야 합니다. 함께 교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충동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 서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으로 분별력이 필요한 시기 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악인의 발은 악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잠 1:16).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기에 달음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득이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기뻐하며 기탄없이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죄악으로 굳어져 있어서 그 자신이 죄악 자체와 같다고 할 정도로 타락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과 사귀는 자는 그들의 악행을 제지할 수 없고 도리어 그들의 악으로 밀려들어가게 됩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교제 하지 말고 다니지도 말고 오히려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새들이 그물을 치는 것을 보고 피하는 것처럼(17절) 우리 또한 악한 자들이 유혹의 그물을 우리 앞에 칠 때에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미련한 새처럼 악한 자들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3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8절),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의 꾐을 좇지 않습니다(10절) 그리고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15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