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사무엘상 18장 12절).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지난 주 화요일(2023. 1. 24.) 아침에 사무엘상 9장을 묵상하면서 3가지 적용을 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기도)를 들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고통 속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의 삶 속에 만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남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무엘상 18장 12절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이란 제목 아래 사무엘상 17장에서 20장까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생에 만나게 하신 3명 중 한 명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은 이스라엘 왕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야기가 사무엘상 16장 21-23절에 나옴.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는 순간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사랑하고 그를 자기 호위병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사울은 사람을 이새에게 보내 '다윗을 내 곁에 있게 하라. 내가 그를 무척 좋아한다.' 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하나님이 보낸 악령이 괴롭힐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은 상쾌하여 낫고 악령은 그에게서 떠나갔다.” 이 말씀의 문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처음 만나게 된 배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울에게서 떠나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했습니다(괴롭혔습니다)(14절). 흥미로운 점은 사울 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자신의 왕을 번뇌하게 하고 있다(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16절).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점은 그 신하들 중 한 사람은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의 8명의 아들들 중 하나님께서 막내 아들인 다윗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이스라엘 두 번째 왕이 될 다윗을 보는 순간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사랑하고 그를 자기 호위병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21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다윗과 사울 왕의 첫 번째 만남은 매우 좋았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크게 사랑”했음(21절). 사울 왕은 다윗을 무척 좋아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자기 곁에 있게 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매우 좋았던 첫 번째 만남이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상 18장6-9절에 나옵니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다음 승리한 이스라엘군이 돌아올 때 이스라엘의 모든 성에서 여자들이 승전을 축하하여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사울 왕을 환영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네.' 사울은 이 노래를 듣고 대단히 불쾌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셈인가? 저들이 다윗에게는 수만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을 돌리다니! 다음번에는 저들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겠구나.' 그 날부터 사울은 계속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9절을 보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를 보면 ‘질투의 눈으로 계속 보았더라’(“And from that time on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동사를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The New Strong's Dictionary of Hebrew and Greek Words에 의하면 ‘to watch with jealousy eye’(질투의 눈으로 보다)입니다. 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본 것입니까? 그 대답은 “그 날 후로” (9절)에 있습니다. “그 날”, 즉 다윗이 불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6절) 뛰놀며 창화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고 말했습니다. 그 때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절)라고 말한 날 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드라마의 주인공이였던 사울 왕인데 골리앗을 죽이므로 조연출도 아니였던 목동 다윗이 주인공으로 등극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고(1, 3절) 또한 사울의 딸 미갈도(20, 28절) 그리고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도 다 다윗을 사랑했습니다(16절). 그러니 사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알았던 사울(12, 14, 28절)은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힘 있게 내리므로(10절)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무서운 것은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던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타고 있을 때 다윗을 벽에 박고자 손에 든 창을 다윗에게 던졌습니다(10-11절). 사울 왕은 자기가 직접 창을 던져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 다가 실패하자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사울 왕은 자기의 딸까지 다윗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사울은 자기가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다윗을 죽이고자 자기 딸뿐만 아니라 적군인 블레셋 사람들까지 이용했습니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틈만 보이면 다윗을 함정에 빠뜨려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하려고 했습니다(20-21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우리를 두려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해치려고 수단방법을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살인적인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기 시작한 후부터는(9절, 현대인의 성경) (1) 자기 자신이 창을 다윗에게 던져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고(10-11절, 현대인의 성경), (2) 자기 딸까지 이용하여 다윗을 적군인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17, 21, 25절, 현대인의 성경), (3) 이제는 자기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까지 다윗을 죽이라고 지시까지 했습니다(19:1,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살인적인 질투는 어느 누구를 통해서라도 그리고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질투의 대상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사울 왕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곁에서 떠나게(추방) 했을 뿐만 아니라(13절)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고 알므로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29절). 그는 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자기 아들 요나단이 보기에도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리려고 했습니다(19:5).
저는 다윗의 이 첫 번째 만남인 사울과의 만남을 묵상할 때 아무리 첫 번째 만남이 매우 좋은 만남이었다 할지라도 그 매우 좋은 만남이 질투로 인하여 충분히 나쁜 만남은 변질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히 성경은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였다(16:21)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울은 그렇게 크게 사랑하였던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리도 평생에 대적이 되어 끊임없이 그를 죽이려고 했는지 참 이해가 안 되는 관계의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로 질투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질투는 까닭 없이 상대방을 싫어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어 그 사람을 멀리하게 만들며 심지어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만들어 살인을 시도하게까지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질투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적 질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질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질투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25장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질투심은 “위로부터 난”것(약3:17)으로써 성경적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질투심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비느하스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질투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출20:3). 우리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마6:24).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마22:37).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39절).
저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의 첫 번째 만남이 사울과의 만남을 묵상할 때 그 둘의 처음 만남은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고 그를 자기 곁에 둘 정도를 다윗을 무척 좋아했으므로 우리가 보기엔 매우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를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변질된 것입니다. 변절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함께하는 사울이었습니다. 최고로 좋아 보이던 만남이 최악의 만남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최악의 만남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최고의 만남을 원합니다. 그 최고의 만남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이 최고의 만남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었고(엡2:1, 현대인의 성경),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롬5:10)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요:316) 또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화목제물로 죽게하시사(요일4:10) 우리와 화목케하셨습니다(골1:20, 2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사(소명)(롬8:30)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중생, 첫 번째 부활)(딛3:5),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케하시사(회심)(행3:19, 5:31)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믿음)(엡2: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롬6:23).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만남을 최고의 만남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남이심을 고백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오시는 날(재림) 주님 안에서 잠든 성도님들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두 번째 부활)(살전4:16). 그 때까지 살아있는(17절) 성도님들은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고전15:51-54).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고전13:12, 현대인의 성경). 우리 모두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신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믿음과 사랑으로 답변하는 것입니다(계22:20).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TV 만화 프로그램은 바로 “Tom & Jerry”(톰과 제리)입니다. 제가 그 만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제리라는 쥐가 자기보다 훨씬 큰 톰이라는 고양이를 이기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톰이 제리를 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할 때마다 영리한 제리는 그 위기를 잘 모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톰으로 하여금 위기를 접하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이 만화를 생각할 때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다윗은 제리 같고 골리앗은 톰과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이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바로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입니다. 그 만남의 배경은 사울 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전쟁 배경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 배경은 “엘라 골짜기” 사이에 두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습니다(삼상17:2-3).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포진하고 있었을 때(3절, 현대인의 성경) 블레셋 진지에서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장군이 나와 이스라엘군에게 싸움을 걸어왔는데 그의 키가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놋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무게가 57킬로그램이나 되는 놋갑옷을 입고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대고 놋창까지 들고 나왔”습니다(5-6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그 창자루는 베틀 채만큼 두꺼웠고 또 그 창날의 쇠 무게는 약 7킬로그램이나 되었으며 호위병 하나가 그의 큰 방패를 들고 그 거인 앞에서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골리앗은 서서 이스라엘군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왜 나와서 전열을 갖추고 있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며 너희는 사울의 부하가 아니냐? 이제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나에게 보내라. 만일 너희가 보낸 자가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 너희 이스라엘군을 이렇게 모욕한다. 자, 나와 싸울 자를 어서 보내라”(8-10절, 현대인의 성경). 그 말을 들은 사울과 이스라엘군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블레셋 거인 골리앗은 40일 동안이나 아침저녁으로 나와 이스라엘군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습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사울 왕과 자신의 8명의 아들 중 첫째 아들 엘리압과 둘째 아들 아비나답과 셋째 아들 삼마와 이스라엘 군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군과 교전중임을 알고 막내 아들 다윗에게 음식을 줘서 이스라엘 진지로 보내 형들에게만 음식을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휘관에게도 갖다 주게 하여 자신의 3명의 아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물을 받아오라고 말했습니다(17-19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다윗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양을 다른 목동에게 맡기고 아버지가 주신 음식을 가지고 이스라엘 진지를 향해 출발하”여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군이 함성을 지르며 진지에서 막 전쟁터로 달려나오고 있었”습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얼마 후에 블레셋과 이스라엘 양군이 서로 마주 보고 전투 태세를 취”했습니다(21절, 현대인의 성경). 다윗은 “전쟁터로 달려가서 형들을 만나 그들의 안부를 물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거인 골리앗은 전과 같이 나와서 이스라엘군을 모욕하며 외치고 있었고 다윗도 그 말을 들었”습니다(22-23절, 현대인의 성경). 다윗은 곁에 선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 이방 블레셋 사람이 누군데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다 말입니까?”(26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다윗은 사울 왕에게 “왕이시여, 저 블레셋 거인 때문에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가서 저 녀석을 해치우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사울 왕은 다윗에게 “그건 안 된다. 너같이 어린 녀석이 어떻게 저 거인과 싸울 수 있겠느냐? 너는 소년에 불과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군 생활을 해 온 장군이다!”라고 말했습니다(32-33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다윗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움켜가면 몽둥이를 가지고 뒤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구해 내었으며 또 그 사자나 곰이 나에게 덤벼들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쳐서 죽였습니다. 내가 사자와 곰도 죽였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 이방 블레셋 사람을 못 죽이겠습니까? 사자나 곰처럼 내가 반드시 그를 죽이고 말겠습니다! 나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서는 저 블레셋 사람에게서도 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34-3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사울 왕은 다윗에게 “좋다. 가거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37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목동 다윗은 블레셋 장군인 거인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이미 구원의 하나님을 확고히 믿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자기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골리앗에게서도 구원하실 줄 확고히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기에(26절, 현대인의 성경)] 이방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길 원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아가가 전에 사울 왕이 자기가 착용하고 있던 놋투구와 갑옷을 벗어 자기에게 줬으므로 그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다음 사울의 칼을 차고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어 보았으니 거추장스러워서 도저히 활동할 수가 없었기에 그것들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38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다윗은 시냇가로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골라 그의 목양 주머니에 넣고 그가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와 물매만 가지고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40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방패 든 자를 앞세우고 다윗을 향해 걸어나오던 골리앗은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예쁜 꼬마 소년 다윗을 보고(41-42절, 현대인의 성경)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42절). 그리고 골리앗은 다윗에게 “’네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비웃으며 또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이리 오너라. 내가 네 시체를 새와 들짐승에게 주겠다.' 하고 외쳤”습니다(43-44절, 현대인의 성경). 그때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며 나는 너를 죽여 네 목을 자르고 또 블레셋 군의 시체를 새와 들짐승에게 주어 먹게 하겠다. 그러면 온 세상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데 창이나 칼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그분이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45-47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1)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2)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갔으며, (3)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케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군대로 하여금 블레셋 군대와 싸워서 승리케 하실 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창이나 칼이 필요치 않음도 알게 하시므로 온 세상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임을 믿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이것저것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없이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참고: 사무엘상 17:47, 현대인의 성경).”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하여 정면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17:47-48,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 자신과 죄악 된 세상과 사탄과 죽음과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정면으로 부딪혀서 싸울 수 있는 용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는 확신과 우리의 영적 전쟁은 주님께 속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정면"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던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가"며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끄집어내어 물매로 그에게 던지자 그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꽂히므로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48-49절, 현대인의 성경). 이와 같이 다윗은 칼 하나 없이 물매와 돌 하나만 가지고서 그 블레셋 거인을 쓰러뜨리고 "달려가" 골리앗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것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50-51,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정면 대결해야 하며 또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에베소서 6:17) 정통으로 대적자의 정곡을 찔러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교훈도 받습니다(참고: 시편 119:32).
작가 프랭크 타이거(Frank Tyger) “우정”(Friendship)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정은 기꺼이 들어주는 귀, 이해해 주는 마음, 도와주는 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는 이 글을 2009년 7월(21일)에 접한 후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우정을 쌓아가는 개척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친구를 만나고 세우는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친구들, 그 만남과 교제 가운데 우정을 쌓아가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듣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파하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아파할 수 있을 정도로 듣고 싶습니다. 상처 입은 친구의 이야기를 내 기준으로 들으면서 '그거 별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 기준을 내려놓고 상대방 입장에서 듣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 또한 상처 입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내가 보기에 작은 일일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크게 느껴져서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를 겸손한 자세로 경청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듣는 자가 될 때에 상대방 친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듣는 자는 이해하는 자라 생각됩니다. 친구가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을 나눌 때에 어찌 진지하게 듣지 않겠습니까. 함께 울지 못함이 미안할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울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눈물의 의미가 내 마음에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친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어쩌면 10%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10%라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형식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자와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투명성을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 이것저것으로 포장된 마음보다 자기가 상처 입을 확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고 투명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그립습니다. 진심으로 듣고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자는 행동으로 옮깁니다. 말로만 돕지 않습니다. 기도 부탁하면 그 때 기도합니다. 기도하겠다고 말한 후 기도하기를 잊어버리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싫습니다. 돕는 손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돕는 손도 내 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이 나의 손을 통하여 나타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께서 영광 받기를 원합니다. 듣고 이해하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져 빨리 돕고 싶을 때에라도 먼저 주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께 그 친구를 맡기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은 요나단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이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바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그 첫 만남의 이야기가 사무엘상 18장 1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사울 왕과 다윗의 대화가 끝난 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하여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이스라엘 왕 사울이 대화를 했는데 그 후에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다고 현대인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과 같은 사람(사도행전 13:22)에게 우리 마음이 깊이 끌리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우리 생명처럼 사랑케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즉,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은 성령님께서 그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일하심을 더욱더 깊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기에 그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으며 또 자기 갑옷과 칼과 활과 띠도 주었습니다(삼상 18:1, 3-4,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요나단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요나단과 같은 사람이 되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인 다음 승리한 이스라엘 군이 돌아올 때 이스라엘의 모든 성에서 여자들이 승전을 축하하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네"라고 노래했을 때 사울 왕은 그 노래를 듣고 대단히 불케하여 혼자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대체 이것이 어찌된 셈인가? 저들이 다윗에게는 수만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을 돌리다니! 다음번에는 저들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겠구나”(6-8절, 현대인의 성경). 사울은 얼마나 불쾌하였길래 그 날부터 다윗을 계속해서 살인적인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사울)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임을 받으면 충분히 질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하기 보다 하나님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낮춰서 다른 사람을 우리보다 낫게 여기고 우리의 모든 특권을 버리며 종의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20:28; 빌 2:3-8, 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참고: 빌 2:9-11).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자기보다 더 높임을 받은 다윗으로 인해 그 날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다가 바로 그 다음날 하나님이 보내신 악령이 강하게 사울을 사로잡자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떠들어대다가 자기 곁에 세워 둔 창을 갑자기 다윗에게 던져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이 던진 창을 두 번이나 피해 도망한 것을 보면 사울은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고 창을 던진 것 같습니다(삼상 18:6-11,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질투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다윗은 적군인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그를 향해 달려갔었는데(17:48, 현대인의 성경) 오히려 아군이 사울 왕으로부터는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입니다(18:11, 현대인의 성경).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쩔 때는 적군보다 우리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아군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 왕은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울 왕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며 무척 사랑하며(1, 3절, 현대인의 성경) 심히 좋아하고 있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19:1)은 다윗을 살리려고 그를 도와줬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내 아버지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 너는 조심하고 내일 아침 들에 가서 숨어 있거라"고 귀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2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이렇게 칭찬까지 했습니다: "아버지, 신하 다윗을 해하지 마십시오. 그가 아버지를 해칠 만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모든 일에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나가서 골리앗을 죽인 것과 그리고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주셨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그때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이제 와서 그처럼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범죄하려고 하십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4-5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3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요나단은 아버지의 명령(1절)을 어겼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순종하되 주님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엡 6:1), (2) 요나단은 심히 사랑하는 다윗을 위기 때 도와줬습니다. 진정한 사랑하는 친구는 위기 때 그 우정(friendship)이 빛을 발합니다, (3) 요나단은 살인적인 질투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기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했다는 그 자체가 놀랍습니다. 왠만한 사랑과 용기가 아니면 그리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하는 친구는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고(죽음을 각오하고) 자기 친구를 위기에서 건지고자 도와줍니다. 귀한 친구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자기에게 노발대발하면서 "이 미친 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녀석이 살아 있는 한 너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를 끌어오너라.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30-31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에도 또 다시 사울에게 "어째서 그가 죽어야 합니까? 그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따졌습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친구 다윗을 응호(defend)하는 요나단을 생각할 때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시 72:4). 그러자 다윗을 죽이려고 단창을 그에게 던졌던 사울은(18:11, 19:10) 자기 아들인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그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20:33). 그러나 다윗뿐만 아니라 요나단도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치시사 죽이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구원(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상 20장 3-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보면 요나단은 죽음 일보 직전에 있었던 다윗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죽음 일보 직전에 있다는 다윗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을 알게 하실 때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인 사울이 언제나 그가 하는 일을 사소한 것까지 모두 자기에게 말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사울이 자기가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결코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런 일(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이라고 해서 나에게 숨길 리가 없어. 결코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자기와 요나단과의 우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사울이 아들 요나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요나단에게 알리지 않은 것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1-3, 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아서 사소한 것까지 모두 다 대화를 한다 할지라도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대놓고 아들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말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사 53:10).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5절).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사(6절) 십자가에서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고(엡 1:7; 골1:14) 의롭게 되었습니다(사 53:11).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2월 18일, 인생의 여정에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케하시되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사람을 사랑케 하시는 역사를 경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