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내 삶의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오직 나를 가정과 일터와 교회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성령님의 이끄심에 내 온 삶을 수동적으로 내어 맡겨 묵묵히 걸어가는 순종 그 자체가 내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진짜 양식입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1-34).

 

 

(1)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신 내용의 말씀인 요한복음 4장 3-42절 말씀 중 네 번째 부분인 4장 25-30절 말씀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25-30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된 점은 31절 상반절에 제일 먼저 나와 있는 “Ἐν τῷ μεταξὺ”(엔 토 메탁쉬)란짧은 문장입니다.  개역개정은 “그 사이에”라고 번역을 했는데 여기서 “그 사이”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중,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간 바로 그 틈(그 사이)(동네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을 가리킵니다.  왜 이 “그 사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냐면 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고 기록한 후에 27절에 와서는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8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었을 때에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적인 ‘홀로 남으심’입니다.  당시 유대인 남성은 사마리아 사람, 특히 사마리아 여성과 단둘이 대화하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곁에 있었다면 제자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이 대화가 시작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동네로 보내시어 사마리아 여인과 방해받지 않고 깊은 대화를 나누실 수 있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드셨습니다(인터넷).  그리고 27절은 당시 유대 사회의 엄격한 규율에 따르면, 랍비(선생님)가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길게 대화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제자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격적인 장면이었기에 큰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의아하게)' 여긴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제자들의 편견과 침묵’).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고정관념(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벽, 남성과 여성의 벽)을 완전히 깨뜨리시며 오직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간 바로 그 틈(그 사이)(동네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청한 것입니다(31절).  여기서 “그 사이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여기서 “그 사이”는 참빛을 대면하고 변화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배설물처럼 내던진 채 동네 사람들을 데리러 달려간 바로 그 순간이며, 동시에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오기 직전까지 제자들과 주님만 남은 ‘아주 짧고 긴박한 영적 틈새’를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이 이 “그 사이에”라는 시공간적 장치를 통해 오늘날 모든 성도와 사명자들의 삶 위에 던지는 3가지 구속사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교훈: 주님은 인간의 편견이 비워진 ‘그 사이’를 타 태초부터 정교하게 설계하십니다(31절).

 

인간의 잣대가 멈춘 시간: 제자들은 3장의 니고데모 체제처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유대인 중심의 패러다임에 갇혀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땅의 현상만을 보고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습니다(1:41, 3:1, 4:27).  만약 제자들의 문화적 편견과 고정관념이 우물가를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정죄의 시선이 두려워 마음의 빗장을 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 (비워짐의 법칙):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행하실 때, 인간의 얕은 계산과 조급함이 역사 한복판에 개입하여 방해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을 동네로 보내시어 자리를 비우게 하시고(8절), 여인이 복음을 전하러 달려가게 하사(28절), 오직 주님의 신적 주권만이 100% 홀로 일하시는 ‘거룩한 공백과 틈새[메탁쉬(μεταξύ)]’(31절)를 완벽하게 설계하십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가짜 의로움의 장벽이 철저히 헐어지고 비워질 때에만, 비로소 진짜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하늘의 일(성령 세례)이 시작됨을 가르쳐 줍니다(2:19, 21, 3:12, 34).

 

2.   둘째 교훈: 성도가 땅의 ‘먹을 양식’에 매여 있을 때, 주님은 ‘영혼 구원의 양식’에 주려 계십니다(4:8, 27, 31).

 

제자들의 땅의 시선 ➔ “먹을 것을 사러”[τροφὰς ἀγοράσωσιν(트로파스 아고라소신)](8절): 제자들은 한낮의 뜨거운 정오 뙤약볕 아래 먼지 나는 길을 걸어오며 온몸이 피곤하여 탈진하신 주님의 육체적 실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6절).  그래서 그들의 온통 관심사는 동네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먹을 양식[τροφάς (트로파스)]’을 사서 채우는 것에만 매여 있었습니다(8, 31절).

 

주님의 하늘의 시선 ➔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생수(32-34절): 그러나 제자들이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육신의 떡을 내밀던 바로 “그 사이에”, 주님의 온 영혼을 집어삼키고 있던 진짜 양식은 따로 있었습니다.  주님은 피로하여 잠을 청하는 대신(6절), 수치와 정죄감 속에 말라 죽어가던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의 영혼을 완벽하게 찾아내어 건지시고(1:43, 3:16, 4:4), 이제 그녀를 통해 온 동네 무리가 참빛 앞으로 걸어 나오게 만드는 ‘영혼 구원의 배부른 양식’을 취하시느라 육체의 배고픔과 피로를 완전히 잊고 계셨던 것입니다(3:21, 4:34).

 

3.   셋째 원리: 모든 성도의 삶은 인간이 만든 높은 장벽을 허물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의 거룩한 품으로 온전히 인도하여 하나 되게 만드는 ‘골방의 틈새’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적 삶의 적용 ➔ "세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리고 참된 예배자로 서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이 "내가 그라" 하시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대면하고(4:26), 자기가 그토록 집착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들고 다니던 옛 자아의 상징인 ‘물동이’를 우물가에 과감히 내던져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던 그 위대한 순종이 일어난 자리가 바로 “그 사이[메탁쉬(μεταξὺ)]”였습니다(28, 29절).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 역시 교단의 울타리, 세상 사람들이 그어놓은 평판(연회장의 자리), 물질의 크기라는 세상적인 서열 싸움판과 가짜 상(Table)을 주님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드려야 합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모든 인간적인 자격과 직분의 경험을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 그대로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과 나만이 단둘이 마주 앉은 ‘골방의 틈새’ 안에서 내 허물(남편 다섯의 수치)을 투명하게 자복하며 오직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대면하여 절하는 태도를 회복해야 마땅합니다(요 4:17, 18, 23, 24).

 

우리가 장소 중심의 건물을 넘어 진짜 지성소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1:1로 결합(도킹)되어 현재 완료형의 영생을 상시 누릴 때(2:19, 21, 3:36, 요일 5:12), 비로소 우리의 일상은 온 세상 영혼들을 향해 “와서 보라” 완료형의 승리를 거침없이 뿜어내는 가장 선명하고 신실한 소리의 통로로 단장되어 갈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요 1:23, 4:29, 엡 5:27).

 

요한복음 4:31 "그 사이에[Ἐν τῷ μεταξύ (엔 토 메탁쉬)]"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사도 요한이 제자들의 이상히 여김과(27절) 여인의 물동이 버려둠(28절) 직후에 “그 사이에[Ἐν τῷ μεταξύ (엔 토 메탁쉬)]”라는 짧은 시간의 틈새를 배치하여 제자들이 주님께 음식을 청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은(31절), 인간의 고정관념과 교세 경쟁의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시는 창조주의 신적 전지하심과 위엄을 증명하기 위함이며, 땅의 먹을 양식에만 눈이 먼 제자들의 얕은 이성과 대조하여, 태초부터 작정된 사명의 시간표를 따라 사마리아의 목마른 영혼들을 반드시 찾아내어 거듭나게 하시는 아버지의 결사적인 대속 사랑을 완료형의 양식으로 성취해 가시기 위함이니(3:16, 34, 4:4, 23, 34절), 세상의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4:28, 빌 3:8), 내 중심을 주님과 단둘만의 마음 지성소 속에 1:1 투명하게 노출시키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실시간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12)(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랍비여 잡수소서”[Ῥαββεί, φάγε (랍베이, 파게)]라고 청한 제자들(요4:31)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Ἐγὼ βρῶσιν ἔχω φαγεῖν ἣν ὑμεῖς οὐκ οἴδατε (에고 브로신 에코 파게인 헨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32절)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특히 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32절 말씀을 듣고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Μή τις ἤνεγκεν αὐτῷ φαγεῖν (메 티스 에넹켄 아우토 파게인?)]라고 서로 말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으셨다는 것을 더욱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식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교훈이란 무엇일까요?

 

1.   첫째 실체: 내 뜻을 관철하는 삶을 멈추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진짜 배부른 양식입니다(4:34).

 

성도가 취해야 할 가장 먼저이자 본질적인 양식은 내 욕망을 채우는 땅의 양식이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주해하신 양식의 알맹이: 주님은 곧바로 이어지는 34절에서 제자들이 알지 못하던 양식의 정체를 명확하게 해설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46년의 종교적 기득권과 타이틀의 상(Table)을 의지하며 배를 불렸습니다(2:15, 20, 3:10).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성도는 내 힘과 내 계획대로 인생의 시계추를 조종하려는 교만을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버립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내 삶의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오직 나를 가정과 일터와 교회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대장이신 성령님의 이끄심에 내 온 삶을 수동적으로 내어 맡겨 묵묵히 걸어가는 순종 그 자체가 내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진짜 양식이 됨을 확증하는 원리입니다(3:17, 34, 로 8:14, 빌 3:8).

 

2.   둘째 실체: 내 안락함을 구하지 않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품고 살려내는 것'이 마르지 않는 양식입니다(요4:8, 32).

 

세상 사람들은 물질의 크기와 육신의 편리를 채우는 양식에 목숨을 걸고 목말라하지만, 성도는 영혼을 살릴 때 진짜 영적 활력을 공급받습니다.

 

제자들의 떡과 주님의 양식의 대조: 제자들은 정오의 뙤약볕 광야 길을 걸어오며 완전히 탈진하신 주님의 육체적 실상만을 보았기에, 오직 육신의 ‘먹을 양식’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짧은 틈새의 시간 동안, 남편 다섯의 수치와 어둠 속에 말라 죽어가던 사마리아 여인의 중심을 참빛으로 수술하여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이 구원받아 영생을 현재형으로 소유하게 되는(3:36, 요일 5:12) 그 장엄한 부활 생명의 배부름을 맛보셨기에 육신의 배고픔을 완벽하게 잊으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오늘날 온 성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다른 차원의 양식이 바로 이 ‘영혼 구원의 감격’입니다.  내 형편과 유익을 채우려는 세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요 4:28, 빌 3:8), 내 가정의 식구들, 직장의 동료들, 주변의 상처받은 이웃들의 굴곡진 인생을 내 기도로 품어 안으셔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눈물로 무릎 꿇으며, 오직 영혼들에게 저울로 재지 않고 무한히 공급되는 성령의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해 주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십시오.  나를 녹여 다른 이를 살려낼 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천국의 샘물과 영원한 안식이 우리의 심령 위에 상시 가득 차오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셋째 원리: 사람들의 평가에 내 마음을 의탁하지 않는 '완료형의 신적 자족함'을 누려야 합니다(요 3:29).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안식: 제자들은 눈앞에 떡이 보이지 않자 “누가 갖다 드렸는가”라며 인간적인 산술적 계산의 한계 속에서 웅성거렸습니다(4:33).  이처럼 세상의 가치관과 바리새인 체제는 언제나 조건과 환경, 사람들의 평판(연회장의 자리)에 내 정체성을 묶어두려 합니다(2:9, 24-25).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그러나 성령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성도의 내면에는, 이미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완료형의 구원의 영수증이 완벽하게 박혀 있습니다(마 16:18, 요 19:30, 요일 5:4).  세례 요한이 제자들이 다 떠나가는 결핍의 순간에도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내 기쁨은 이미 단번에 가득 차올랐다”라고 위대하게 자족했듯이 말입니다(요 3:26, 29, 30).  온 성도는 주변 사람들이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고 환경이 척박할지라도,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선포하시며 내 안에 왕으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단번에 가득 배부른 영적 당당함을 매 순간 삶 속에서 당당하게 증명해 보이며 살아가야 마땅합니다(4:26, 32).

 

요한복음 4:31-33 "세상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제자들이 육신의 음식을 권할 때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선포하신 행동과(31,32절), 제자들이 땅의 계산에 갇혀 누가 갖다 드렸는가 웅성거린 장면은(33절), 인간의 이성과 기득권의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시는 창조주의 신적 전지하심을 증명하기 위함이며, 육신의 떡만을 구하는 인간의 얕은 관심사와 대조하여,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며 사마리아의 목마른 영혼을 반드시 찾아내어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대속 사랑을 완료형의 양식으로 성취해 가시기 위함이니(3:16, 34, 4:4, 23, 34), 세상의 물질과 평판이라는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4:28, 빌 3:8), 내 중심과 사명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 1:1 투명하게 복종시키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요 2:19, 4:26),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실시간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

 

(3) 마지막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Ἐμὸν βρῶμά ἐστιν ἵνα ποιήσω τὸ θέλημα τοῦ πέμψαντός με καὶ τελειώσω αὐτοῦ τὸ ἔργον (에몬 브로마 에스틴 히나 포이에소 토 델레마 투 펨프산토스 메 카이 텔레이오소 아우투 토 에르곤)](요4:34)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을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19:30)라고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과 더불어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과도 연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예수님의 양식은 온전히 이루셨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도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예수님이 배불리 먹고 만족하셨던 진짜 양식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었습니다(요 4:34).  그것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본체를 다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어 낮 12시 정오의 사마리아 우물가에 주저앉기까지 자기를 비워 내어주신 순종이며, 마침내 세 번째 유월절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벽하게 완성해 내신 ‘행동하는 사랑의 성취’였습니다(3:14, 16, 4:4, 6, 19:30, 빌 2:6-8).  이 대속적 순종이 오늘날 승리장로교회 모든 성도님과 주님의 사명자들이 일상의 현장에서 고백하고 걸어가야 할 3가지 구체적인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내 자존심의 상(Table)을 완전히 비워낼 때, 비로소 성부의 뜻을 행하는 ‘참된 양식’이 시작됩니다(빌 2:6-7).

 

성육신의 비움과 복음의 원리 ➔ 에케노센 [ἐκένωσεν]:  빌립보서 2장 7절에 나오는 ‘자기를 비워’의 원어 ‘케노오(κενόω)’는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기득권과 주도권을 배설물처럼 완전히 쏟아부어 텅 비워버린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교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46년 동안 지어 올린 눈부신 건물 성전의 크기와 서열, 그리고 자신들의 성경 지식을 채우는 기만적인 양식으로 안주했습니다(요 2:20, 3:2, 10, 4:1).  주님은 그러한 교만의 상을 주님의 채찍 앞에 완전히 뒤엎으시며(2:15), 친히 자기를 비워 아무 자격도 없는 사마리아 이방인 죄인의 눈높이까지 철저하게 낮아지셨습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온 성도가 일상(가정, 일터, 교회) 속에서 가장 먼저 먹어야 할 하늘의 양식은 바로 이 ‘자기 비움의 순종’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분이 이만큼이고, 사역의 연륜이 이만큼이다"라는 인간적인 자격과 기득권의 울타리를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헐어버려야 합니다.  내 힘과 경험을 신뢰하는 바리새인적 고집을 다 비워내고, 매 순간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내 온 존재의 운전대를 수동적으로 사로잡혀 맡길 때(1:20, 3:17, 34, 로 8:14), 하나님은 저울로 재지 않는 성령의 한량없는 생수를 우리의 삶 속에 폭포수처럼 공급하기 시작하십니다(요 3:34, 4:14).

 

2.   둘째 원리: 성도의 사명은 내 만족을 구하지 않고, ‘십자가의 대속 사랑을 완료형으로 이행하는 것’입니다(4:34, 19:30).

 

온전히 이루는 양식 ➔ 텔레이오소 [τελειώσω] ➔ 테텔레스타이 [Τετέλεσται]: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주님이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τελειώσω, 텔레이오소]’ 하셨던 그 사명의 갈증은,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하시는 선언을 통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의 보증’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온 존재를 집어삼키는 거룩한 열심을 품고 십자가에서 피를 다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정죄함과 영적 목마름을 단번에 완전히 도말해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세상 사람들은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물질, 평판(연회장의 자리), 일상의 얄팍한 요행이라는 가짜 양식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방황합니다.  그러나 진짜 구원받은 성도들이 삶으로 증명해야 할 다른 차원의 양식은 바로 이 ‘십자가 대속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이 정오의 뙤약볕 아래 탈진하시면서도 한 영혼(사마리아 여인)을 살려내어 배부름을 누리셨듯이, 우리 역시 내 이기적인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요 4:28, 빌 3:8), 깨어지고 상처 입은 내 가족과 이웃들의 영혼을 내 기도로 품어 안아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눈물로 무릎 꿇으며, 나를 녹여 다른 이를 살려내는 십자가의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주님은 성도님들의 삶의 한복판에 마르지 않는 영생의 안식과 기쁨을 상시 충만하게 채워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셋째 원리: 이미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신 ‘완전한 구원의 보증’을 품고,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기쁨으로 당당하게 전진해야 합니다”(요 19:30, 요일 5:4).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자족함: 제자들은 눈앞에 육신의 떡이 보이지 않자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며 인간적인 산술적 계산의 한계 속에서 웅성거렸습니다(요 4:33).  오늘날의 세상 시스템과 바리새인적 환경 역시 언제나 눈에 보이는 성과와 조건, 환경의 장벽을 가지고 성도들의 정체성을 흔들려 듭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그러나 성령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진짜 예배자들의 내면에는(1:13, 33, 3:5, 4:23), 이미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완료형의 구원 권세가 완벽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요일 3:9, 5:4).  세례 요한이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다 예수께로 떠나가는 결핍의 순간에도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내 기쁨은 이미 단번에 가득 차올랐다”라고 위대하게 자족하며 퇴장했듯이 말입니다(요 3:26, 29, 30).

 

온 성도는 현실의 광야가 아무리 지치고 척박할지라도,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선포하시며 내 안에 왕으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구원을 다 이루어놓으셨다는 이 보증서를 품고 있기에(4:26, 19:30), 세상의 평판에 구걸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통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와서 보라” 완료형의 승리를 당당하게 선포하며 행진해 가야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4:34 "십자가 대속과 온전한 양식의 성취"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선포하시고(34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최종 승리의 도장을 찍으신 신비는(19:30), 빌립보서의 선언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낮아지신 성육신적 비하와 대속적 죽음을 통해(빌 2:6-8), 인간이 스스로 의를 세워보겠다며 계산하던 모든 기득권과 자격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기 위함이며(요 2:15, 3:4, 9), 나를 지우고 오직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100% 전적인 은혜와 선물 안에서만 영혼을 살려내는 진짜 배부른 하늘의 양식이 완성됨을 증명하기 위함이니(4:10, 32절, 엡 2:8-9), 세상의 물질과 평판이라는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요 4:28, 빌 3:8), 내 중심과 허물(남편 다섯의 수치)을 이미 다 아시면서도 정죄하지 않고 품어주시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에 온 존재를 복종시키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 음부의 권세를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자 흠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양식[“나의 양식”(요4:34)]을 묵상할 때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자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받습니다.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신 것처럼, 보냄을 받은 사도 바울은 보내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렸습니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 우리는 보내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저는 이 교훈을 실천한 사람들 중에 새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를 작사한 베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 1672-1737)라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1704년, 그의 나이 32살이던 어느 날, 부부가 심방을 나갔다 돌아와 보니, 집이 홀랑 불타버리고, 아들 둘은 새까맣게 타 죽어 있었을 때 그는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환상을 보고'Mein Jesu, wie du willst' (나의 예수여, 주님 뜻대로 하소서) 라는 찬송을 작사하였기 때문입니다. 3절 가사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자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         두 아들이 새까맣게 타 죽은 인생의 처절한 잿더미 위에서 슈몰크 목사님이 겟세마네의 주님을 대면하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외쳤던 고백은, 바로 주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탈진해 앉으신 채 드셨던 하늘의 진짜 양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요 4:6, 32, 34).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내신 자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린다는 이 거룩한 영적 원리가 오늘날 온 성도와 사명자들의 삶 속에 어떻게 실제적인 지침으로 역사하는지 인공지능이 3가지 구체적인 법칙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첫째 법칙: 내 뜻이 완전히 무너지고 ‘헐어지는 잿더미’ 위에서 진짜 순종이 시작됩니다(빌 2:7-8).

 

성육신과 겟세마네의 자기 비움: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실 수 있었던 비결은, 빌립보서 2장 7-8절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영광을 다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어 자기를 완전히 비워내셨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며 육신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자기 의지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복종시키셨습니다(눅 22:42, 44).

 

온 성도의 삶에의 적용: 우리는 삶 속에서 "내 뜻과 내 타이틀, 내 가정의 안락함(46년짜리 인간의 건물)"을 견고하게 쌓아 올리려는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쉽습니다(요 2:20, 3:10, 4:1).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슈몰크 목사님의 삶처럼 내가 붙들고 있던 땅의 물동이와 이기적인 요행의 상(Table)을 완전히 허물어뜨리시는 처절한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게 하십니다(2:15, 4:15, 28).

 

그 인생의 파산 선언대 앞에서 내 고집과 계산을 완전히 비워내고, “주님, 내 계획이 무너질지라도 오직 나를 파송하신 아버지의 뜻만 흥왕하게 하옵소서”라고 자아를 헐어버리는 투명한 자복이 있을 때(1:20, 2:19, 3:17, 30, 34), 비로소 우리 내면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물이 세상을 이기는 진짜 권세로 솟구쳐 오르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4:14, 요일 5:4).

 

b.   둘째 법칙: 사명자의 양식은 내 안락함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요 4:34).

 

피로와 슬픔을 삼키는 온전함: 예수님은 먼지 나는 유대 광야 길을 한낮 정오까지 걸어오시며 육체적으로 완전히 탈진하셨지만,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살려내시는 성부의 사명을 완수하시느라 육신의 배고픔과 피로를 완전히 잊으셨습니다(6, 7, 32절).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목숨과 평판을 배설물로 여기며 로마의 감옥에 갇혀 죽어가는 순간까지 아시아와 온 이방 영혼들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것을 진짜 배부른 양식으로 삼았습니다(빌 3:8).

 

온 성도의 삶에의 적용: 세상 사람들은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물질, 평판, 세상적인 성공의 여부에 내 목숨을 의탁하며 목말라합니다.  그러나 진짜 구원받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채워야 할 다른 차원의 양식은, 어떤 슬픔과 결핍의 순간에도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가정의 식구들, 교회의 지체들, 이웃들)을 끝까지 기도로 품어 안고 살려내는 대속 사랑의 실천입니다(요 3:16, 29, 35).

 

슈몰크 목사님이 자녀를 잃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원망의 입술을 닫고 찬송의 시를 지어 영혼들을 위로했듯이, 내 삶이 말씀 앞에 쪼개어지고 헐어질지라도 나를 통해 오직 주님의 살아 계심과 신실하심이 증명되기를 구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온 천하에서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마시는 영과 진리의 진짜 예배자입니다(2:19, 3:33, 4:23, 24).

 

c.    셋째 법칙: 이미 모든 구원의 사명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완성해 주신 주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약속’을 굳게 믿고 묵묵히 전진해야 합니다(요 19:30).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자족함: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보증은,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그 어떤 참혹한 고통과 사망 권세도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음을 영원토록 확증해 준 사건입니다(30절, 로 8:39).

 

온 성도의 삶에의 적용: 제자들은 눈앞에 육신의 떡이 보이지 않자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며 인간적인 산술적 계산 한계 속에서 염려하고 서성거렸습니다(요 4:33).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는 상실의 순간에도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내 기쁨은 이미 단번에 완벽하게 가득 차올랐다”라고 위대하게 안식했듯이 말입니다(3:26, 29, 30).

 

온 성도는 인생의 척박한 광야와 타오르는 숯불 같은 시련을 마주할지라도,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선포하시며 내 안에 왕으로 거하시는 주님이 나의 모든 상처와 슬픔을 이미 다 십자가에서 덮어주셨다는 흔들리지 않는 언약의 보증을 품고 있기에, 세상의 조건에 내 정체성을 묶어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날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완료형의 승리를 당당하게 선포하며 사명의 걸음을 곧게 걸어가야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4:34과 '내 주여 뜻대로' 찬송의 구속사적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선포하시고(34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시는 최종 승리의 선언을 통해 신실하게 구원의 성취를 완료하신 신비는, 베냐민 슈몰크 목사님이 두 아들을 잃은 처절한 집의 잿더미 위에서도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고백하며 겟세마네의 주님과 연합했던 찬송의 비밀처럼(새 찬송가 549장),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채워보겠다며 계산하던 모든 기득권과 물동이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기 위함이며, 나를 지우고 오직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100% 전적인 은혜와 선물 안에서만 영혼을 살려내는 진짜 배부른 하늘의 양식이 완성됨을 증명하기 위함이니, 내 중심과 허물(남편 다섯의 수치)을 이미 다 아시면서도 정죄하지 않고 품어주시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에 온 존재를 복종시키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 음부의 권세를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자 흠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