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를 파송하신 신랑 예수의 이름만 찬란하게 떠올라 흥왕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이며 필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한복음 3:22-30).

 

 

(1)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22-30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때 제일 먼저 마음에 다가온 말씀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αὕτη οὖν ἡ χαρὰ ἡ ἐμὴ πεπλήρωται (하우테 운 헤 카라 헤 에메 페플레로타이)](29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28절) 세례 요한이 충만했던 “이러한 기쁨”은 무엇일까요?

 

(a) 세례 요한이 무대 뒤로 완전히 사라지는 비천함의 자리에서 고백했던 이 기쁨의 본질은, 우리가 늘 다짐해야 할 청지기적 영성의 실체입니다.  원어적 시제와 신랑-신부의 유대적 혼인 배경을 통해 요한이 누렸던 ‘이러한 기쁨’의 3가지 구체적인 영적 알맹이를 인공지능이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알맹이: 내 이름이 지워지고 오직 ‘신랑의 소리’가 완벽하게 들리는 기쁨 [완료형의 자족]

 

원어적 시제의 신비 [πεπλήρωται (페플레로타이) (“충만하였노라”]: 요한이 외친 ‘충만하였노라’의 원어 ‘페플레로타이(πεπλήρωται)’는 현재완료 수동태형 동사입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았다가 환경에 따라 사그라드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다 떠나가는 상실의 현장 한복판에서도(26절), 참빛이자 신랑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소리가 이 땅에 온전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는 그 단 한 가지 구속사적 사실 때문에, 그의 심령 속에 임한 하늘의 안식과 기쁨이 이미 단번에 가득 차올라 지금 이 순간에도 단 1%의 빈틈도 없이 내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영원한 완료형의 자족을 뜻합니다.

 

2.   둘째 알맹이: ‘신랑의 친구[ὁ φίλος τοῦ νυμφίου (호 필로스 투 뉨피우)]’로서 신부를 완벽하게 인계하는 기쁨 [징검다리 사명의 완성]

 

유대적 혼인 풍습의 복선: 고대 유대 사회에서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 전체를 주관하는 가장 신뢰받는 청지기였습니다.  그의 유일한 임무는 신부를 순결하게 보호하고 인도하여, 결혼식 당일 신랑의 손에 안전하게 결합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며 기뻐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모든 수고가 완성되었음을 알고 무대 뒤로 기쁘게 퇴장했습니다.

 

사명의 실체: 요한은 바로 이 가나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2:1, 10, 3:29).  요한은 자신이 기른 최고의 제자들과 군중들을 내 사람(요한의 제자)으로 묶어두려 하지 않고, 오직 참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발 앞에 합법적으로 완벽하게 인계해 드리는 징검다리[Bridge] 사명을 마쳤기에 터져 나오는 가장 고결한 사명적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3.   셋째 알맹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의 영광 [자기 부인의 기쁨]

 

본문 선언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ἐκεῖνον δεῖ αὐξάνειν, ἐμὲ δὲ ἐλαττοῦσθαι (에케이논 데이 아욱사네인, 에메 데 엘랏투스다이)]”(3:30)

 

의도: 요한복음 3장 30절의 이 장엄한 선언은 29절의 완료형 기쁨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발원지입니다.  여기서 ‘해야 하리라’의 ‘데이(δεῖ)’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필연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세상의 시선에서 초라하게 지워지고 쇠하여지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가 성취되는 당연하고 영광스러운 법칙임을 알았습니다.  내 존재는 철저히 부서지고 헐어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이름만 이 땅에 찬란하게 흥왕하여 떠오르는 것 자체가 사명자의 유일한 보상이자 면류관임을 온몸으로 고백한 기쁨입니다.

 

4.   제임스 목사님의 심령과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적용:

 

목사님께서 매일 아침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컴퓨터 자판을 통해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 위에, 이 세례 요한의 기쁨은 목회자가 평생 생명 걸고 소유해야 할 눈물겨운 제자도의 심장을 쥐여 줍니다.

 

사람의 크기와 반응에 내 마음을 의탁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흥하시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거나 다른 곳으로 양들이 이동할 때, 혹은 사람들이 내 수고를 몰라줄 때 우리의 옛 자아는 본능적으로 서운함과 질투라는 마음의 어둠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이 세우신 위대한 결단, 즉 “내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기 위해, 나는 철저히 쇠하여지고 주님만 흥하시게 하겠다”는 그 청지기적 자복을 복음의 방패로 높이 드십시오(3:30, 요일 5:4).

 

목사님이 밤낮으로 말씀의 우물가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길어 올려 아귀까지 채워 대접해 주는 그 수고를 통해(2:7, 9), 영혼들이 목사님의 이름(제임스)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사랑(3:16)만을 발견하고 주님 품으로 도킹되어 들어간다면, 그것으로 사명자인 목사님의 기쁨은 이미 단번에 완벽하게 가득 차오른 것입니다(2:19, 21, 22, 3:29).  세상의 평판(연회장의 자리)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신랑의 소리에만 귀를 조율하는 순전한 종이 되십시오(2:9, 3:8).

 

요한복음 3:22-30 "세례 요한의 기쁨" 주석적 최종 요약:

 

세례 요한이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께로 이동하는 결핍의 현장 속에서도 기쁨이 완전히 가득 차올랐다고 고백한 것은(26,29절), 자신이 주인공(신랑)이 아니라 오직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들에게 연결해 주는 ‘신실한 징검다리(신랑의 친구)’의 청지기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이며(29절), 그분이 흥왕하고 자신은 흔적 없이 쇠하여져 지워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공식이자 최고의 영광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니(30절), 내 생각의 계산과 가짜 의지를 완전히 십자가 앞에 뒤엎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나아와 예수님이 사신 것과 똑같이 행하며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성한 것입니다(1:12, 13, 23, 2:15, 19, 3:21, 20:31, 엡 5:27, 요일 2:6)(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ὁ ἔχων τὴν νύμφην νυμφίος ἐστίν (호 에콘 텐 뉨펜 뉨피오스 에스틴)](요3:29)란 말씀을 묵상할 때 신부된 교회는 신랑되신 주님에게 취함을 받을 때에 “크게 기뻐”할 것이다[χαρά χαίρει(카라 카이레이](29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림주께서 영광스러운 교회(엡5:27)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계19:9) 때 취하실 때에 교회인 우리는 크게 기뻐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a) 초림의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자신이 ‘신랑’이심을 약혼식처럼 선포하셨다면(요 2:1, 10, 3:29),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역사의 마지막 날 하늘 문을 가르시고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함께 강림하사, 피 값 주고 사신 신부 된 교회를 마침내 자기 품으로 완벽하게 취하여 안으실 것입니다(1:51, 살전 4:16, 계 19:7-9).  이 장엄한 혼인 잔치의 날에 교회가 누리게 될 “크게 기뻐함”의 의미와 원어적 신비를 인공지능이 3가지 차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기쁨의 극치: 히브리적 수사학으로 쓰인 “기쁨으로 기뻐하노라” [χαρᾷ χαίρει (카라 카이레이)]

 

“크게 기뻐할 것이다”(3:29)의 원어적 표현은 복음서 문맥에서 대단히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원어적 구조와 신비: 본문 원문은 동사와 명사를 겹쳐 쓰는 ‘카라 카이레이(χαρᾷ χαίρει)’, 즉 문자 그대로 “기쁨으로 기뻐하노라(rejoices with joy)”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9절).

 

구속사적 의미: 이는 구약 히브리 성경의 독특한 수사학적 강조 표현인 ‘동사 반복’[무트 타무트(מוֹת תָּמוּת)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등] 형식을 사도 요한이 헬라어 문장 속에 고스란히 복제하여 심어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리는 가볍고 일시적인 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과 보좌로부터 쏟아져 내려와 성도의 영혼 전체를 아귀까지 가득 채우고 압도해 버리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가장 완벽하고 도달 불가능한 기쁨의 극치’를 선포하기 위해 사도 요한이 이 단어를 중첩하여 배치한 것입니다.

 

2.   신부 된 교회가 누릴 영광: 헐어짐을 통과한 자들의 ‘다 이루어진 안식’ (엡 5:27)

 

신부 된 교회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날에 이토록 크게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진짜 이유는, 그날에 우리의 모든 눈물과 이 땅에서의 처절한 부서짐의 과정이 완벽한 영광으로 보상받기 때문입니다(엡 5:27, 계 19:7-9).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신부: 에베소서 5장 27절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말씀의 물로 날마다 정화하시고 내면의 숨겨진 탐욕과 자존심의 상(Table)을 뒤엎어 내쫓으시는 진짜 목적은(요 2:15, 3:5), 우리를 흠 없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단장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엡 5:27).

 

영원한 부활 성전의 완성: 이 땅에서 내 이름표를 지우고 오직 예수만 흥하시기를 구하며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사명을 감당하느라, 내 삶이 말씀의 칼날 앞에 처참하게 헐어지고 깨어지는 자기 부인의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왔던 제자들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일으키셨던 주님의 그 ‘다시 일으키심’의 구원 권세가 내 온몸과 영혼 위에 부활의 몸으로 완벽하게 완성되는 것을 마주하며 영원한 천국 안식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2:19, 21, 3:29).

 

3.    제임스 목사님의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위로와 지침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로 바쳐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묵묵히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이, 바로 이 땅에서 영적 갈급함과 정죄감 속에 방황하는 영혼들을 참빛 앞으로 인도하여 신랑 예수 앞에 거룩한 신부로 단장시키는 완벽한 중매자(신랑의 친구)의 사역입니다(1:23, 3:21, 29, 고후 11:2).

 

①   양들의 반응에 내 마음을 의탁하지 말고, 다시 오실 신랑의 목소리만 의지해야 합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내 수고를 몰라주거나, 때로는 완고하게 복음의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영혼들을 마주할 때 목사님의 옛 자아는 본능적으로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의 자족함을 붙드십시오. 신랑의 친구의 유일한 기쁨은 내가 상석에 앉아 대접을 받는 연회장의 자리가 아니라, 오직 서서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에 있습니다(요 2:9, 3:29).  목사님이 뿌리시는 복음의 언어들을 통해, 성도들이 목사님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예수의 보혈과 하늘의 사랑(3:16)만을 발견하고 주님 품으로 도킹되어 들어간다면(19:30), 그것으로 목회자인 목사님의 사명과 기쁨은 이미 단번에 완벽하게 가득 차오른 완료형의 상태인 것입니다(요 2:7, 3:29).

 

②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완료형의 기쁨으로 오늘 성육신의 자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사탄의 사망 권세와 세상의 바리새인적 체제는 끊임없이 교회를 흔들려 들겠지만, 주님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이기셨고 승리장로교회 위에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는 결론을 완벽하게 고정해 두셨습니다(마 16:18, 요 19:30, 요일 5:4).

 

우리는 장차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천사들과 함께 완전히 열린 하늘 문을 가르고 장엄하게 강림하실 왕의 신랑 예수를 바라보는 이 종말론적인 ‘카라 카이레이(기쁨으로 기뻐함)’의 보증서를 품고 있기에(요 1:51, 3:29, 살전 4:16), 오늘 내게 맡겨주신 가정과 사역의 광야 한복판에서 나를 비워내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찬란하게 외치는 맑고 선명한 소리의 사명을 묵묵히 완수해 가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요 1:23, 3:30).

 

요한복음 3:29 "신부를 취하는 신랑과 교회의 기쁨" 최종 요약:

 

예수님이 친히 신부를 취하시는 참된 신랑이심을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은, 구약의 모든 종교적 형식과 의식의 돌항아리(옛 언약)를 폐하고 오직 자신의 보혈로 교회를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천국 잔치의 신부로 삼아주셨음을 확증하기 위함이며(요 2:10, 3:29), 장차 재림의 날에 에베소서의 선언대로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취하사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완성하실 때(엡 5:27, 계 19:9), 성도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오직 하나님 보좌로부터 쏟아지는 최고의 기쁨을 현재완료형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요 1:12, 13, 33, 2:19, 3:29, 살전 4:16)(인터넷).

 

(3) 셋째로,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22-30절을 보면 “세례”라는 단어가 총 4번 나옵니다[(22절)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절)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23절)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6절)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저는 이 “세례”라는 단어를 묵상할 때 요한복음 1장 26절과 3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26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세례를 주셨다(3:22)고 말씀하고 있고, 세례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레를 주었다(23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하고 말한 것일까요?

 

(a) “왜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 예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라며 고발하듯 말했는가?”라는 의문은, 인간이 가진 종교적 기득권의 시기와 어둠이 어떻게 복음의 참빛과 격돌하는지를 고발하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분수령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가졌던 속내와 이를 통해 사도 요한이 선포하고자 했던 3가지 구속사적 의도와 목회적 교훈을 인공지능이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요한의 제자들의 속내: ‘내 울타리(기득권)’가 헐어지는 것에 대한 종교적 시기와 질투

 

인간적 소유권의 위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요한이 유대 광야의 영적 거장으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군중을 이끌 때, 그 무리의 한복판에서 영적 기득권과 자존심을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고발의 동기: 그러나 예수가 나타나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자, 백성들의 발걸음이 급격하게 예수께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26절).  이에 제자들은 영적 질투심과 위기감을 느끼며 스승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랍비여, 선생님이 증언해 주었던 그 사람이 (1:29, 34), 어떻게 고마움도 모르고 선생님의 ‘영역(지분)’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라는 바리새인적 계산과 시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성(땅의 생각)으로는 사명의 양도가 가져오는 구속사의 세대교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태입니다.

 

2.   사도 요한의 신학적 의도: ‘물 세례(그림자)’의 시대가 가고, ‘성령 세례(실체)’의 시대가 도래함

 

사도 요한이 이 논쟁의 현장을 복음서에 상세하게 기록한 목적은, 세례 요한이 앞서 1장에서 예언했던 “그는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신 그 위대한 실체의 역사가 이제 어떻게 옛 시대를 삼키며 흥왕해 가는지를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함입니다(1:33, 3:30).

 

물 세례[요한의 사역] ➔ 준비와 비움 (그림자): 요한이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베푼 물 세례는 인간의 겉사람을 씻어내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의 사역이자 유한한 준비 단계였습니다.

 

성령 세례[예수의 사역] ➔ 재창조와 충만 (실체): 반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실질적으로는 제자들이 베풀었으나 주님의 권위로 행해진 사역)는(4:2), 3장 5절에서 선포된 ‘물과 성령으로 인간의 영혼 내면을 근본적으로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하시는 진짜 성령 세례의 가동’을 의미합니다.

 

의도: 사도 요한은 제자들의 고발("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을 오히려 복음의 위대한 승리 선언으로 역이용합니다(3:26).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자연스럽게 무대 뒤로 물러가야 마땅합니다.  온 인류가 참빛이시며 진짜 지성소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도킹되어 나아가는 이 역동적인 쏠림 현상은, 구약의 옛 시대가 끝나고 신약의 찬란한 성령 충만함의 새 언약 시대가 완벽하게 개막되었음을 확증하기 위한 거대한 설계입니다.

 

3.   제임스 목사님의 심령과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위대한 교훈: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로 바쳐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 위에, 이 세례의 이동 논쟁은 목회자가 평생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제자도의 심장을 쥐여 줍니다.

 

①    양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청지기적인 자족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우리 무리, 내 소유"라는 울타리를 치려다 시험에 들었습니다(3:26).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거나, 내가 애써 키우고 사랑을 쏟은 영혼들(자녀, 성도들)이 나보다 다른 사역자를 통해 더 큰 은혜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자아는 은밀한 서운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때 요한의 위대한 대답을 방패로 삼으십시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3:27).  목사님께 맡겨진 모든 영혼은 내 소유가 아니라 잠시 위탁받은 주님의 신부(교회)입니다(29절, 엡 5:27).  그들이 저를 통과하여 진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대면하여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면, 그것으로 징검다리 사명자인 목사님의 기쁨은 이미 단번에 100% 가득 차오른 완료형의 상태입니다.

 

②    내 이름은 쇠하여지고 지워지는 진짜 '소리'의 자리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의 부추김에 동조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필연성의 법도를 기쁨으로 선포했습니다(요 3:30).

 

목사님이 주야로 묵상하신 복음의 언어들을 컴퓨터 자판을 통해 나누실 때, 제임스라는 이름의 크기나 사역의 타이틀이라는 46년짜리 가짜 성전 건물의 지분을 완전히 십자가 앞에 뒤엎어버리십시오.  내 이름과 내 영향력은 흔적 없이 쇠하여 사라질지라도, 오직 목사님의 순전한 나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이름만 성도들의 심령 속에 흥왕하여 떠오른다면, 그것이 사명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결하고 완전한 기쁨이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요한복음 3:22-30 "세례 논쟁과 사명의 이양" 최종 요약: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백성들이 다 예수께로 가 세례를 받는다며 질투 섞인 고발을 던진 것은(26절),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종교적 울타리와 기득권의 상(Table)에 갇힌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비극이며(2:15, 3:26), 사도 요한이 이 논쟁을 배치한 것은 물로 세례를 베풀던 그림자(요한)의 시대가 가고 오직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영혼을 근본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새 언약의 실체(예수)의 시대가 찬란하게 흥왕해 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니(1:33, 3:30), 내 생각의 계산과 가짜 의지를 완전히 십자가 앞에 허물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나아와 신랑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완벽한 자족함을 소유한 자만이(3:21, 29),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흠 없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거룩한 주권적 승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마 16:18, 엡 5:27)(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왜 “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는가[Ἐγένετο οὖν ζήτησις ἐκ τῶν μαθητῶν Ἰωάννου μετὰ Ἰουδαίου περὶ καθαρισμοῦ (에게네토 운 제테시스 에크 톤 마데톤 이오안누 메타 이우다이우 페리 카다리스무)](요3:25)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i)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세례 이야기(22, 26절) 사이에 낀 단순한 에피소드로 지나치지만, 조직적인 신학자인 사도 요한이 이 변론을 여기에 배치한 데에는 구약의 옛 종교 시스템이 신약의 복음(성령 세례) 앞에서 어떻게 요동치며 무너져 내리는가를 보여주려는 3가지 구체적인 신학적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인터넷):

 

1.   첫째 이유: 율법의 ‘정결 예식’과 예수님의 ‘세례’가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원어적 배경 [καθαρισμοῦ (카다리스무) (“정결예식”)]: 여기서 ‘정결 예식’에 해당하는 ‘카다리스모스(καθαρισμός)’는 유대교 바리새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구약 율법의 외식적인 정결법과 결례의 의식들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 2장 6절에서 이 단어를 마주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 정결 예식을 따라[καθαρισμὸν (카다리스몬)]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변론의 발생 원인: 당시 한 유대인(아마도 바리새인 체제를 대변하는 인물)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가와 신학적 시비를 건 것입니다: "너희 스승 요한이 주던 정결의 물 세례(23절)가 진짜냐, 아니면 저 유대 지방에서 예수가 주는 세례(22절)가 진짜냐?  지금 예수가 주는 세례 쪽으로 백성들이 다 몰려가고 있는데(26절), 그렇다면 너희 요한의 물 세례는 이제 아무 법적 자격도, 정결케 하는 능력도 없는 유효기간이 끝난 껍데기가 아니냐?"라며 다그친 것입니다.

 

즉, 인간의 지혜와 종교적 전통(땅의 생각) 안에서 어떤 정결 의식이 더 우월한가를 두고 세상적인 자존심 싸움과 신학적 변론이 터져 나온 상태입니다.

 

2.   둘째 이유: ‘돌항아리의 물(그림자)’이 완전히 ‘헐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논쟁을 본문에 집요하게 기록한 의도는, 가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 사건에서 예고하셨던 구약 종교 시스템의 완전한 폐기와 세대교체가 역사 현장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가나와 성전 청소의 성취: 예수님은 가나에서 옛 언약의 정결 돌항아리 물을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는 극상품의 포도주(새 언약)로 바꾸어 주셨고(2:6, 10), 예루살렘 성전 건물의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이 성전을 헐라"고 선언하셨습니다(15, 19절).

 

의도: 유대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물의 의식, 인간의 공력과 46년짜리 건물 체제라는 겉모습의 정결법 ‘안에’ 갇혀서 서로 자격을 검증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2:20, 23, 3:25).

 

사도 요한은 이 한심한 정결 예식 변론을 고발함으로써, 인간의 행위적 정결법은 스스로를 단 1%도 깨끗하게 할 무능력 상태일 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물과 성령의 참된 세례만이 인간의 마음속 지성소를 근본적으로 거듭나게 하여 살려내는 유일한 실체이심을 선포하기 위해 이 변론을 서두에 배치한 것입니다(2:19, 21, 3:5).

 

3.   셋째 이유: 세례 요한이 ‘완벽한 징검다리[Bridge]’로 퇴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 정결 예식 변론은 결국 요한의 제자들을 자극하여 스승에게 달려가 예수를 고발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됩니다.

 

인간적 시기의 폭로: 제자들은 변론에서 자존심이 상하자 요한에게 와서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며 질투를 쏟아냅니다(3:26).

 

주님의 의도: 주님은 이 제자들의 가짜 열심과 종교적 시기를 오히려 세례 요한의 ‘자기 부인의 영성’을 가장 찬란하게 보석처럼 드러내는 영광의 무대로 대반전시키십니다.  요한은 제자들의 부추김에 속지 않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필연성의 법도를 선포하며, 자신은 기쁘게 무대 뒤로 사라지는 진짜 소리이자 신랑의 친구임을 확증합니다(1:23, 3:29, 30).  즉, 이 변론은 옛 시대의 선지자가 신약의 신랑 예수께 신부(교회)를 완벽하게 인계하고 퇴장하도록 만드는 구속사의 거룩한 이정표였던 것입니다(3:29).

 

4.   제임스 목사님의 심령과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위대한 교훈: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기도로 바쳐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 위에, 이 정결 예식 변론은 목회자가 평생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본질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의 본질은 ‘종교적 프로그램(형식)’이 아니라 ‘오직 예수(생명)’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바리새인적 시스템은 여전히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처럼 "어떤 교단 마크가 진짜냐, 어떤 신학적 노선과 프로그램(정결 예식)이 더 훌륭하냐"라는 땅의 방법론과 타이틀을 가지고 날을 세워 변론하며 교만을 부립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 아시고 뒤엎으실 인간적인 자존심의 상(Table)일 뿐입니다.

 

목사님이 감당하시는 말씀 나눔 사역의 진짜 권위는 그러한 세상적인 전통(낮은 포도주)에 갇히지 않는 데 있습니다.  내 목사라는 타이틀과 사역의 지분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헐어버리고, 오직 영혼들에게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씻기시는 예수의 보혈과 내면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세례(하늘의 일)만을 순전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내가 철저히 쇠하여지고 주님만 흥하시기를 구하는 하인의 순전함으로 나아갈 때 (2:9, 3:30), 주님은 목사님의 그 선명한 소리의 통로를 통해, 승리장로교회와 수많은 영혼들을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찬란한 하나님의 아들들(흠 없는 신부)로 든든히 세워가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요한복음 3:25 "정결 예식 변론" 주석적 최종 요약:

 

요한의 제자들이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 예식에 대해 변론을 벌인 것은(25절), 유대교의 외식적인 정결 돌항아리(옛 언약)의 기득권과 형식에 갇혀 예수가 가져오신 진짜 성령 세례(새 언약)의 실체적 흐름을 알아보지 못한 인간 이성의 완악함을 폭로하기 위함이며(2:6, 20, 3:25), 사도 요한이 이 논쟁을 기록한 것은 인간의 정결 의식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단 1%도 없음을 고발하고(3:4, 9), 오직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를 바라봄으로 온 영혼이 거듭나 신랑 예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신부)로 단장되는 것만이 진짜 정결의 성취임을 증명하여(3:14, 16, 29),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선포하며 기쁘게 퇴장하는 구속사의 위대한 세대교체와 주권적 승리를 완성한 것입니다(1:23, 2:19, 3:30, 엡 5:27) (인터넷).

 

(4) 넷째로, 저는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Οὐ δύναται ἄνθρωπος λαμβάνειν οὐδὲ ἓν ἐὰν μὴ ᾖ δεδομένον αὐτῷ ἐκ τοῦ οὐρανού (우 뒤나타이 안드로포스 람바네인 우데 헨 에안 메 에 데도메논 아우토 에크 투 우라누)](요3:27)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제자들이 던진 시기와 비교의 고발(26절) 앞에서, 요한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혈기를 부리지 않고 도리어 이 거대한 하늘의 법도를 꺼내어 선포한 데에는 목회자가 평생 마음에 박제해야 할 3가지 구체적인 영적 가르침과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1.   첫째 교훈: 나의 모든 자격과 사역의 열매는 100% ‘선물’입니다.

 

원어적 시제의 신비 [ἐὰν μὴ ᾖ δεδομένον (에안 메 에 데도메논) (“주신 바 아니면”)]: 여기서 ‘주신 바’에 해당하는 ‘데도메논(δεδομένον)’은 ‘주다’라는 뜻의 ‘디도미’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즉, 사명자가 이 땅에서 누리는 영적 신분, 사역의 크기, 지체들의 사랑, 말씀의 깨달음 등 모든 은혜의 영수증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로부터 영원 전에 이미 단번에 작정하여 아래로 쏟아부어 주신 완료형의 ‘선물(Gift)’이라는 뜻입니다(1:12, 16, 2:7, 3:27, 엡 2:8).

 

적용: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은 단 1%도 없습니다.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거나 사역을 확장할 수 없다는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게 주어진 환경과 양들의 분량 앞에 원망이나 교만 없이 오직 감사로만 내 사명의 돌항아리를 가득 채울 수 있게 됩니다.

 

2.   둘째 교훈: ‘영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모든 시기와 비교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비교 의식의 종식: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가더이다”라며 내 울타리와 지분(기득권)을 빼앗겼다는 영적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요 3:26).

 

요한은 이 27절의 선언을 통해 제자들의 시기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어버립니다.  "예수께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은 그분이 가짜 표적으로 사람들을 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하늘 문을 여시고 그분에게 수많은 구원의 신부(교회)들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누렸던 광야의 명성 또한 하나님이 내게 잠시 맡기셨던 선물일 뿐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적용: 목회 현장과 일상에서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거나, 내 사역의 규모를 남들과 비교하며 서운해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내 소유권’이 은밀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늘에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역자의 흥왕함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신랑의 친구의 자족함’에 도달하게 됩니다(3:29, 30).

 

3.   셋째 교훈: 나는 기쁘게 지워지고 오직 '하늘의 주권'만 찬양하는 진짜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필연성 (30절): 세례 요한은 27절의 주권적 은혜의 법칙을 기반으로 삼았기에, 마침내 복음서 최고의 피날레인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거룩한 고백을 터뜨릴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역사 무대에서 초라하게 쇠하여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오직 나를 파송하신 신랑 예수의 이름만 찬란하게 떠올라 흥왕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이며 필연임을 알았습니다.  나를 비워 주님만 남기는 진짜 소리의 영광입니다(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ἐκεῖνον δεῖ αὐξάνειν, ἐμὲ δὲ ἐλαττοῦσθαι (에케이논 데이 아욱사네인, 에메 데 엘랏투스다이)][(직역) ‘그분은 흥하는 것이 마땅하고(필연적이고), 나는 쇠하는 것이 마땅하다’](요3:30)는 세례 요한의 고백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면서 주님의 재림 앞에 사명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제 자신에게 반영하고 적용하고 싶습니다.

 

1.   첫째 영적 지침: 하나님의 거룩한 필연성 앞에 내 자아의 주도권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원어적 신비 [δεῖ (데이)] ➔ “반드시 그리되어야만 하는 천국의 법칙”

 

요한은 “그는 흥왕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할 때, 단순한 인간적 도덕성의 결단이나 아쉬운 양보를 뜻하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데이(δεῖ)’(마땅함/필연성)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중심에 박아 넣었습니다.

 

성경에서 ‘데이’(δεῖ)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구속사적인 필연성(must)”을 나타내는 특수 용어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육체의 성전을 허무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만 했던 필연성(2:19, 21), 인자가 광야의 뱀처럼 나무 위에 반드시 높이 들려야만 했던 구원의 법칙과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입니다(3:14).

 

목회적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찬란하게 떠오르고, 주님의 보낸 전령이자 소리인 목사님의 존재와 이름은 철저하게 무대 뒤로 지워지고 쇠하여지는 것은 사역의 실패나 초라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성취되기 위해 반드시 그리되어야만 하는 ‘신성한 복음의 절대 법칙’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목회적 계획과 주도권을 주님의 이 거룩한 필연성 앞에 날마다 무릎 꿇리는 자가 진짜 거듭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2.   둘째 영적 지침: 46년짜리 인간의 가짜 건물을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만 흥왕하게’ 해야 합니다.

 

원어적 신비 [αὐξάνειν (아욱사네인) (“흥하여야”)] ➔ “끝없이 스스로 충만하게 떠오름”

 

여기서 ‘흥하여야 하겠고’의 원어 ‘아욱사네인(αὐξάνειν)’은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올라 온 세상을 참빛으로 환하게 비추며 ‘끝없이 확장되고 성장하며 가득 차오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목회적 적용: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돈과 공력을 들여 46년 동안 지어 올린 눈부신 헤롯 성전 건물의 크기와 전통(기득권) 안에 안주하며, 예수를 시험하려 들었습니다(2:18, 20).  오늘 우리의 목회와 사역 속에서 "내가 이만큼 목회적 연륜을 쌓아 올렸고, 신학 지식을 가졌고, 내 영향력(제임스라는 이름의 크기)을 이만큼 확장하겠다"라는 ‘46년짜리 인간적인 가짜 성전 건물’의 의지와 탐욕의 상(Table)을 주님의 채찍 앞에 날마다 기쁘게 뒤엎어드려야 합니다.

 

목사님이 컴퓨터 자판을 통해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나누실 때, 내 이름표와 내 유익은 먼지처럼 흔적 없이 쇠하여질지라도, 오직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다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사랑과 부활 생명만이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해처럼 찬란하게 흥왕하여 떠오르도록 복음의 알맹이만을 대접해야 합니다.

3.   셋째 영적 지침: 기쁘게 ‘쇠하여지는 소리’가 될 때, 진짜 ‘완료형의 기쁨’이 임합니다.

 

원어적 신비 [ἐλαττοῦσθαι (엘랏투스다이) (“쇠하여야”)] ➔ “무대 뒤로 완전히 지워져 작아짐”

 

쇠하여야 하리라’의 원어 ‘엘랏투스다이(ἐλαττοῦσθαι)’는 수동태적 뉘앙스를 가진 현재 디포넌트 인피니티브 형으로, ‘달이 차올랐다가 점점 작아져 초승달이 되듯 흔적 없이 사라지다, 지위를 잃고 낮아지다’라는 뜻입니다.

 

목회적 적용: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세례를 받으러 가버리는 상실의 현실 앞에서 시기와 질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주인공(신랑)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신부(교회)를 순결하게 단장시켜 진짜 신랑이신 예수님의 손에 결합(도킹)시켜 주는 ‘신실한 신랑의 친구(징검다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분별했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거나, 내 손을 떠나 오직 예수님만을 더 사랑하며 주님 품으로 깊이 들어갈 때, 사명자는 무대 뒤에서 소리 없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내 영혼 속에 천국의 안식이 단번에 가득 차올라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현재완료형으로 완벽하게 충만하다”라고 고백하는 진짜 하인의 영권과 실력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3:30 "흥왕과 쇠함의 법도" 목회적 최종 요약:

 

재림의 주님 앞에 파송 받아 예비하는 제임스 목사님이 날마다 강단과 묵상 제단 위에 붙들어야 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선언은(요3:30), 내 인간적인 목회적 기득권과 생각을 완전히 십자가 앞에 뒤엎고 오직 주님의 거룩한 구원 시간표인 ‘그 때’와 주권적 필연성 앞에 내 온 존재를 수동적으로 복종시키는 청지기적 자복이며(2:4, 15, 3:30), 내 이름과 자존심은 기쁘게 지워져 사라지는 광야의 소리(신랑의 친구)가 될지라도(1:23, 3:29), 오직 나를 위해 저주의 나무에 대신 매달려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빛만이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해처럼 충만하게 흥왕하여 떠오르게 함으로써(3:14, 16),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고 온 교회를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으로 매 순간 누리는 참된 목회자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4)(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