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mouthpiece)로 살다가 ‘말씀’(Message)만 남기고 사라지는 ‘자족(Contentment)’의 자세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한복음 1:35-42).
(1)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35-42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었을 떼 제일 먼저 관찰하게 된 흥미로운 점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35-36절에서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기록하였는데 그는 이미 29절에서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두 번이나 반복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Ἴδε ὁ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이데 호 암노스 투 테우)](29, 36절)하고 증언한 것을 기록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사도 요한은 “이튿날”[Τῇ ἐπαύριον (테 에파우리온)](29절), “또 이튿날”[Τῇ ἐπαύριον πάλιν (테 에파우리온 팔린)](35절)이라고 기록한 것일까요?
1. 두 번의 반복 증언 [Ἴδε ὁ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이데 호 암노스 투 테우)(“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역의 선포"에서 "제자들의 이동"으로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입술을 통해 동일한 고백을 이틀 연속 반복하게 한 데에는 구속사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한 명확한 목적이 있습니다.
29절의 첫 번째 선포 ➔ 온 세상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 선포
상황: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군중과 세상 전체를 향해 외친 선언입니다.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실(제거하실) 영원한 대속물, 즉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36절의 두 번째 선포 ➔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인계하는 '사명의 이양'
상황: 이번에는 군중이 아니라, 요한 곁에 있던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을 때 예수님이 거니심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의미: 요한은 이 고백을 통해 제자들에게 강력한 영적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너희를 가르쳤지만, 진짜 너희가 따르고 영접해야 할 진짜 주인공, 너희의 진짜 스승은 바로 저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라는 신호입니다.
구속사적 교훈: 이 반복을 통해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앞서 고백했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자기 부인의 영성을 어떻게 삶으로 실천했는지 증명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기른 최고의 제자들을 참빛이신 예수님께 기꺼이 내어드리는 '완벽한 징검다리(Bridge)'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튿날"[Τῇ ἐπαύριον (테 에파우리온)]과 "또 이튿날"[Τῇ ἐπαύριον πάλιν (테 에파우리온 팔린)]의 신학적 신비: 창조의 일주일의 재현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에서 날짜를 하루하루 손가락으로 꼽듯 ‘이튿날’(29절), ‘또 이튿날’(35절),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43절의 ‘이튿날’까지 집요하게 기록한 데에는 창세기와 연결된 엄청난 창조론적 설계가 숨겨져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 일주일 ➔ 요한복음의 '새 창조 일주일'
요한복음 1장 1절은 창세기 1장 1절과 똑같이 “태초에[Ἐν ἀρχῇ (엔 아르케)]”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일주일'을 다룬다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새 생명과 빛을 주시는 '재창조(구원)의 새로운 일주일'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날짜의 전개 구조:
첫째 날 (1:19-28): 유대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네 정체가 무엇이냐고 심문할 때, 요한이 자신은 "광야의 소리"라고 변증한 날.
둘째 날 (1:29-34 -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선포하고 성령의 임재를 증언한 날.
셋째 날 (1:35-42 - 또 이튿날):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게바'라는 이름을 얻은 날.
넷째 날 (1:43-51 - 이튿날):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는 날.
일곱째 날 (2:1 - 사흘째 되던 날): 넷째 날로부터 3일이 지난 일곱째 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첫 표적을 행하심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날.
신학적 의미: 하나님이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에 안식하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이 새 창조의 일주일은 가나의 혼인 잔치(기쁨과 안식의 상징)에서 마침표를 찍으며, 예수님이 깨어진 온 우주와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분이심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날짜를 이토록 촘촘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묵상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교훈과 적용: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열매(제자, 성과, 자랑)까지도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기꺼이 내어드리는 전적인 비움이 있을 때, 내 삶은 비로소 누군가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완벽한 재창조의 통로가 됩니다.
나의 영광을 주님께 이양하기:
가정이나 교회, 직장에서 내가 공들여 키워낸 성과, 내 노력으로 얻은 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자기 제자)이 있다면, 그것을 내 소유로 묶어두려 하지 마십시오. 세례 요한처럼 그 시선을 즉시 예수님께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보라, 이 모든 일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나를 지우고 주님만 남길 때,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기쁨(가나의 혼인 잔치)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세례 요한이 자기가 기른 최고의 제자들을 참빛이신 예수님께 기꺼이 내어드리는 ‘완벽한 징검다리(Bridge)’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는 것, 즉, 자기가 앞서 고백했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자기 부인의 영성을 실천했다는 사실에 깊은 귀한 인상을 받습니다. 제가 얻는 교훈은 예수님과 제 아내가 자녀들이나 섬기고 있는 교회 성도님들이나 인터넷 사역의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 사이에 저는 더욱더 쇠하여져서 예수님만 흥하심으로 저의 징검다리 사역을 겸손히 진실되고 신실하게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내(제임스의) 제자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을 주님께서 세우시는 사역에 저는 그저 겸손히 순종함으로 동참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 마음의 자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i) 바리새인들처럼 내 종교적 체제와 내 사람을 모으려는 위선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요 1:24, 25), 주님만 드러내고 사라지는 ‘신실한 징검다리(Bridge)’가 되기 위해 제가 품어야 할 3가지 구체적인 마음의 자세(영적 태도)를 인공지능이 제안한 것입니다(인터넷):
a.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청지기’의 자세 (사역의 수동성)
내가 땀 흘려 가르치고 사랑을 쏟은 영혼들(자녀, 사역의 형제자매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거나, 나보다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환경을 통해 더 큰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서운함이나 영적 질투심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내 제자’라는 소유권이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마음의 자세: 세례 요한이 자기가 아끼던 두 제자를 예수님이 거니시는 모습을 보자마자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며 주님께 등 떠밀어 보내 주었듯이 [요 1:35, 36], 성도님께 맡겨진 모든 영혼은 내 소유가 아니라 잠시 위탁받은 ‘주님의 소유’임을 날마다 인정하셔야 합니다.
구체적 실천: 기도할 때 가족과 영혼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주님, 이들은 제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들이 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저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후 기쁘게 무대 뒤로 사라지는 소리가 되게 하옵소서”(23절).
b. ‘소리’로 살다가 ‘말씀’만 남기고 사라지는 ‘자족(Contentment)’의 자세
소리(Mouthpiece)는 자기 얼굴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왕의 말씀(Message)만을 전달하고 나면 공중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유한한 도구입니다(23절).
마음의 자세: 제가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바쳐 인터넷과 삶의 자리에 나눔 사역을 감당할 때, 사람들이 저의 탁월함이나 지혜(제임스라는 이름)를 기억하게 하려는 유혹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구체적 실천: 사역의 댓글이나 성도들의 칭찬이 들려올 때, 내 자존심이나 성취감을 채우는 양식으로 삼지 마십시오. 즉시 마음에 은혜의 서치라이트를 켜서(요 1:9, 에 5:13) 그 영광을 주님께 반사해 버려야 합니다: “나는 빛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빛을 비추는 거울이자 소리일 뿐입니다. 주님만 나타나셨으면 그것으로 제 기쁨은 완벽합니다”(요 1:8, 20).
c. 사람의 눈치나 평가에 갇히지 않는 ‘임마누엘’의 시선 지키기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권력자들의 서슬 퍼런 사상 검증 앞에서도 담대하게 “나는 아니라(우크 에이미)”라고 외칠 수 있었던 비결은(19, 20, 21, 25절), 세상의 평가보다 이미 자기 곁에 와서 묵묵히 서 계시는 주님의 실재를 더 깊이 의식했기 때문입니다(26절).
마음의 자세: 사람들이 내 사역을 알아주지 않거나, 때로는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 저의 순수한 복음의 소리를 오해하고 공격할지라도(23, 25절),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변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구체적 실천: 내 곁에 임마누엘로 와서 묵묵히 텐트를 치고 서 계시는 예수님께만 시선을 고정하십시오(14, 26절). 사람의 위로나 가짜 타이틀에 목마르지 않고, 나를 이미 완벽한 자녀로 낳아주신 하나님의 신성한 DNA와 은혜 위에 은혜의 파도만을 상시 공급받을 때(12, 13, 16절), 우리는 세상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가장 단단하고 진실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를 위한 최종 격려의 고백:
“제임스라는 이름표는 지워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말씀만 남는 사역,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 우주에서 가장 눈부시고 가치 있는 인생의 서론과 결론입니다.”
내 제자를 만들지 않고 오직 주님의 제자를 세우기 위해 기꺼이 쇠하여지기를 자처하시는 저의 그 청지기적인 마음의 제사를 통해, 오늘도 성령님은 성도님이 서 계신 광야 세상 속에 다시 오실 주님의 대로를 가장 영광스럽게 예비하고 계십니다(인터넷).
(b) 또한 여기서 저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에서 날짜를 하루하루 손가락으로 꼽듯 ‘이튿날’(29절), ‘또 이튿날’(35절),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43절의 ‘이튿날’까지 집요하게 기록한 데에는 창세기와 연결된 점, 즉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일주일'을 다룬다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새 생명과 빛을 주시는 '재창조(구원)의 새로운 일주일'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못할 정도입니다. 저는 이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워서 알게 된 점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예수님의 7개 ‘나는 … 이다’[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라는 말씀과 예수님의 7개 표적만 기록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조직적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배웠는데 오늘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 1장과의 연결성은 평생 처음 알게 된 점이기에 놀랍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요한의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의 연결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새 새명과 빛을 주시는 ‘재 창조’(구원)의 새로운 일주일’의 의도적으로 배치한 구체적인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이 무엇인지 좀 간략하게라도 알고 싶어졌습니다.
(i) 사도 요한은 정말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영혼을 '재창조(구원)' 하시는지 복음서 서두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구조로 배치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재창조의 새로운 일주일'의 구체적인 요한복음 전체 흐름을 우리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이 간략하고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새 창조의 첫째 날(요 1:19-28): 빛이 임하기 전, 영적 무지와 어둠 속에 갇힌 유대 지도자들 앞에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변증하며, 마치 창세기의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이 분리되듯 새 창조의 거룩한 무대를 열어젖힙니다.
b. 새 창조의 둘째 날(29-34절):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할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주님 위에 영원히 머무십니다. 이는 궁창(하늘)과 땅을 가르셨던 창세기의 둘째 날처럼,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영원한 신령한 은혜의 통로가 개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c. 새 창조의 셋째 날(35-42절):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드디어 참빛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고, 시몬이 ‘게바(베드로, 반석)’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물이 물러가고 마른 땅이 드러나 푸른 채소가 자라나듯, 예수라는 거룩한 반석 위에 첫 제자 공동체(교회)라는 영적 토양이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d. 새 창조의 넷째 날(43-51절): 빌립과 나다나엘이 제자로 부름을 받으며,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창세기의 넷째 날에 온 우주를 다스릴 해와 달과 별의 광명체가 세워졌듯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환상을 통해 예수님이 온 우주와 하늘의 참된 통치자이심이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찬란하게 밝혀집니다.
e. 새 창조의 다섯째와 여섯째 날: 사도 요한은 본문의 행간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로 이동하는 시간을 묵묵히 흘려보냅니다. 이는 창세기에 생물이 번성하고 마침내 인간이 창조되어 가정을 이루었듯, 하나님의 아들들이 주님과 함께 호흡하며 새로운 영적 가족(제자 공동체)으로 무르익어가는 영적 재창조의 시간입니다.
f. 새 창조의 일곱째 날(2:1-11): 넷째 날로부터 3일이 지난 ‘사흘째 되던 날’, 마침내 일곱째 날의 마침표가 찍히며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첫 표적’이 일어납니다. 창세기의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마치고 안식하셨듯이, 예수님은 결핍과 슬픔이 가득한 인간 세상 한복판에 참된 기쁨과 천국 잔치의 안식을 선물하시며 자신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온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내십니다.
최종 신학적 요약:
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2장에서 날짜를 하루하루 손가락으로 꼽듯 집요하게 기록한 이유는, 태초에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창 1장), 이제 죄로 인해 완전히 깨어지고 메말라 버린 우리의 영혼을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살려내시는 완벽한 ‘재창조(구원)의 역사’를 성취하고 계심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제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35-42절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따르다’라는 단어가 반복에서 나오는 것[“따르거늘”(ἠκολούθησαν) (에콜루데산)(37절), “따르는 것”(ἀκολουθοῦντας)(아콜루둔타스)(38절), “따르는”(ἀκολουθησάντων)(아콜루데산톤)(40절)]을 보고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 교훈도 받고 싶습니다.
(a) 요한복음 1장 35-42절에서 사도 요한이 ‘따르다’라는 단어를 원어의 다양한 시제와 형태로 세 번이나 연속해서 반복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의 삶에 일어나야 할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본질’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시각화하여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 어원인 ‘아콜루데오(ἀκολουθέω)’의 구체적인 의미와 영적 배경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하는지 인공지능이 3가지 차원의 강력한 교훈을 전한 것입니다(인터넷):
1. 원어적 의미로 보는 3단계 ‘따름’의 신비
1단계 (37절) ➔ ἠκολούθησαν (에콜루데산 - 과거형):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결단적 따름"
의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을 때, 두 제자가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에콜루데산)’고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뒤를 졸졸 쫓아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삶의 터전이자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의 그늘(과거의 삶)을 과감히 떠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인생의 푯대를 향해 삶의 방향을 단번에 턴(Turn)한 ‘결단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2단계 (38절) ➔ ἀκολουθοῦντας (아콜루둔타스 - 현재분사형): "상시로 동행하는 지속적 따름"
의미: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들이 ‘따르는 것(아콜루둔타스)’을 보시고 질문하십니다. 이 현재분사 형태는 일회성 호기심으로 잠깐 쫓아오는 것이 아니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님과 보폭을 맞추며 ‘지속적으로, 상시로, 현재 진행형으로’ 끝까지 주님을 추적하며 따르는 성실한 태도를 뜻합니다.
3단계 (40절) ➔ ἀκολουθησάντων (아콜루데산톤 - 과거분사형): "존재가 변화된 사명적 따름"
의미: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아콜루데산톤)’ 두 사람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소개합니다. 이 고백은 주님을 따랐던 그 과거의 결단과 여정이 삶의 지울 수 없는 약력(DNA)이 되어,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확고한 정체성(신분)으로 완전히 굳어졌음을 확증하는 선언입니다.
2. ‘아콜루데오’(따르다)가 우리에게 주는 3가지 강력한 제자의 교훈
그렇다면 이 위대한 세 번의 반복을 통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할까요?
① 내 익숙한 울타리와 ‘내 지분’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37절의 교훈).
두 제자는 당시 유대 사회의 거장인 세례 요한의 수제자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백성들의 대접과 영적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양 예수를 마주하자마자 자기들의 기득권과 익숙한 울타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구체적 적용: 제가 다짐하였던 고백, 즉 “내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기 위해, 나는 철저히 쇠하여지고 주님만 흥하시게 하겠다”는 그 청지기적 마음이 바로 이 결단입니다. 내 사역의 성과, 내 자존심, 내가 인정받고 싶은 종교적 기득권의 울타리를 과감히 비우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붙들고 일어나는 것이 제자도의 첫 출발입니다.
② 일상의 모든 순간을 ‘현재진행형’(따르는 것)[ἀκολουθοῦντας)(아콜루둔타스)]으로 주님과 보폭을 맞춰야 합니다(38절의 교훈).
제자도는 과거에 내가 큰 은혜를 받았던 영수증이나 신학교에서 얻은 신학적 지식으로 안주하는 삶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 현재 이 순간’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내 귀를 조율하고 발걸음을 상시로 맞추는 현재진행형의 동행입니다.
구체적 적용: 제가 다짐한 사명인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기도로 바치고, 믿음으로 나눔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 바로 현재진행형의 따름입니다. 어제의 묵상으로 오늘을 살지 않고, 매일 새로운 말씀의 파도 앞에 내 내면의 어둠을 폭로당하며 주님과 1분 1초를 임마누엘로 동행하는 삶이 진짜 제자의 실력입니다.
③ 주님의 뒤에서 걸으며 내 시선을 오직 주님의 뒷모습에만 고정해야 합니다(본질적 의미).
헬라어 ‘아콜루데오’(ἀκολουθέω)의 문자 그대로의 어원은 ‘같은 길에 서서 뒤를 따르다’입니다. 제자는 주님보다 앞서 달려서 내 지혜와 혈기로 일을 추진하는 자가 아닙니다. 철저히 주님의 ‘뒤’에 서서, 주님이 멈추시면 나도 멈추고, 주님이 걸어가시면 나도 걷는 자입니다.
구체적 적용: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노예보다 낮은 자로 부인하며 묵묵히 사라지는 ‘소리’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사역과 일터의 현장에서 내 이름과 내 가치관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오직 내 앞서 걸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의 뒷모습(성품)만을 세상에 그대로 투영하여 반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묵상을 나에게 대입하는 최종 고백:
“나는 내 이름과 기득권을 기쁘게 배설물처럼 버리고 떠난 자이며(37절), 오늘도 내 삶의 모든 순간마다 임마누엘 주님과 보폭을 맞춰 걷는 현재진행형의 제자이며(38절), 내 지혜를 앞세우지 않고 오직 주님의 겸손한 뒷모습만 내 전 생애를 다해 반사하는 신실한 소리입니다(40절)”(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1:38)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3가지를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첫째로, 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구하느냐”[Τί ζητεῖτε (티 제테이테?)]라고 물으셨을까요? 둘째로, 왜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Ῥαββί, ποῦ μένεις (랍비, 푸 메네이스?)]라고 물었을까요? 셋째로, 예수님께서 “돌이켜”[στραφεὶς (스트라페이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저는 이 단어를 읽었을 때 누가복음 22장 6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알고보니 주님께서 뒤 따라오는 베드로를 보시고자 “돌이켜”[στραφεὶς (스트라페이스)]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38절에서 예수님께서 “돌이켜”[στραφεὶς (스트라페이스)]와 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여기서 저는 예수님께서 “돌이켜” 제자를 보시는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1. 첫째 질문: 왜 주님은 “무엇을 구하느냐”[Τί ζητεῖτε (티 제테이테?)]라고 물으셨을까?
원어적 의미와 신학적 충격: 여기서 ‘구하느냐’의 원형인 ‘제테오(ζητέω)’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찾는 행위를 넘어, ‘인생 전체를 걸고 갈망하다, 목숨 바쳐 추구하다(seek/pursuit)’라는 뜻을 가집니다.
주님의 의도: 주님은 지금 내 뒤를 쫓아오기 시작한 두 제자의 ‘내면의 가장 깊은 동기와 목적’을 수술도처럼 날카롭게 찌르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통해 세상의 성공, 명예, 기득권, 혹은 바리새인들이 구하는 종교적 타이틀을 얻고 싶어서 쫓아오는 것이냐? 아니면 참빛과 생명 그 자체인 나를 얻기 위해 오는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훈: 이 질문은 오늘날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나누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던지시는 영적 시험대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흥하고 내 이름을 증명하려는 세상의 ‘무엇’을 구하는지, 아니면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구하는지 날마다 내면의 동기를 점검하게 만드는 위대한 질문입니다.
2. 둘째 질문: 왜 제자들은 “어디 계시오니이까”[ποῦ μένεις (랍비, 푸 메네이스?)]라고 물었을까?
원어적 의미와 관계적 갈망: ‘계시오니이까’의 헬라어 원어는 ‘메네이스(μένεις)’로, 그 원형은 ‘메노(μένω, 머물다, 상주하다, 유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앞서 묵상한 32-33절에서 ‘성령이 예수님 위에 영원히 머물렀다[메논]’고 할 때의 그 단어이자, 요한복음 15장의 ‘내 안에 거하라[메나테 엔 에모이]’의 그 거룩한 단어입니다.
제자들의 의도: 주님이 "너희가 구하는 진짜 동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위대한 사명이나 대단한 신학적 지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우리는 주님이 머무시는[메노] 그 사귐의 자리, 주님이 계시는 그 임마누엘의 공간 안에 들어가 주님과 인격적으로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살기를 갈망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훈: 참된 제자는 주님이 주시는 ‘선물(축복, 성공, 사역의 크기)’을 구하지 않고, ‘주님 자신(Presence)’을 구합니다. 주님과 한 공간에 머물며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격적인 사귐’ 자체가 내 인생의 유일한 구함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3. 셋째 질문: “돌이켜”[στραφεὶς (스트라페이스)]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장 38절의 주님이 처음 제자를 향해 ‘돌이켜’ 보시는 장면과, 누가복음 22장 61절에서 배신한 베드로를 향해 ‘돌이켜’ 보시는 장면은 완벽하게 동일한 단어[στρέφω (스트레포)의 분사과거형]입니다. 이 행동 속에 담긴 주님의 마음은 “인간의 연약함과 배신까지도 이미 다 아시고 품으시는 창조주의 압도적인 사랑과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38의 ‘돌이킴’ ➔ "내가 이미 너를 알고 용납했다"
주님은 뒤에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제자들의 연약함, 훗날 이들이 고난 앞에서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 것(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먼저 몸을 돌려(스트라페이스) 그들을 마주해 주십니다. 제자가 주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돌이켜 자비의 얼굴을 비추어 주시는 선행적 은혜의 시선입니다.
누가복음 22:61의 ‘돌이킴’ ➔ "나는 여전히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닭이 울 때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비극의 현장 한복판에서, 매 맞고 피 흘리시던 주님은 다시 한 번 몸을 돌려(스트라페이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십니다. 그 눈빛은 "네가 나를 감히 배신해?"라는 정죄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처음 너를 요단강가에서 만나 돌이켜 바라보았던(요 1:38) 그 사랑의 눈빛, "베드로야, 나는 네 연약함을 이미 다 알고 첫날부터 너를 거듭나게 하려고 내 장막을 쳤단다. 낙심하지 말고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오너라" 하시는 포기하지 않는 추적의 사랑이었습니다.
한 문장 요약 및 최종 교훈:
예수님이 몸을 돌려[스트라페이스] 우리를 바라보시는 이유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미래의 넘어짐까지 이미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자기 품 속에 품어주시기 위함이며(14,18절), 그 사랑의 눈빛을 마주한 성도의 유일한 갈망은 세상의 썩어질 물질을 구하는[제테오]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의 성소 안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머무는[메노] 인격적인 사귐이어야 합니다.
“성도님이 다짐하신 사명, 즉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기도로 바치고 나누는 사역’의 본질이 바로 이 ‘ποῦ μένεις(주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의 영성입니다. 사역의 성과나 사람들의 평판을 구하지 않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의 그 따뜻하게 돌이키시는 눈빛[스트라페이스]을 대면하며 주님과 한 공간에 머무는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 “와서 보라”[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요1:39)는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나다니엘에게 “와서 보라”[Ἔρχου καὶ ἴδε (에르쿠 카이 이데)](46절)고 전도 초청한 말씀과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메시아임을 깨달은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와서 보라[Δεῦτε ἴδετε (데우테 이데테)]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고 외친 전도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이 “와서 보라”는 말씀을 우리도 빌립이나 사마리아 여인처럼 전도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세 본문에 쓰인 원어의 뉘앙스를 대조해 보면, 우리가 이 시대의 빌립과 사마리아 여인이 되어 세상 사람들을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3가지 구체적인 영적 원리와 실천 방안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1. 전도의 원천: 내가 먼저 주님과 '머무는 사귐'의 감격을 소유해야 합니다(무엇을).
요 1:39 ➔ 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 "와서 보라"
원어적 의미: 주님이 두 제자에게 던지신 이 초대는 단순한 구경이 아닙니다. 그날 제자들은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 가서 그날 함께 머물렀습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깊이 사귀는 체험을 먼저 한 것입니다.
교훈: 내가 경험하지 못한 주님을 세상에 전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 전도와 말씀 나눔 사역의 출발점은 현란한 전도 테크닉이 아니라, 내가 오늘 말씀의 성소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며 누리는 완료형의 감격과 기쁨입니다.
구체적 실천: 제가 다짐한 대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로 바쳐 내 심령이 먼저 주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지는 영적 예배가 날마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있을 때, 비로소 "와서 보라"고 외칠 수 있는 진짜 소리의 권위가 태어납니다.
2. 전도의 방법: 논쟁하지 말고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면하게 해야 합니다(어떻게).
요 1:46 ➔ Ἔρχου καὶ ἴδε (에르쿠 카이 이데): "와서 보라"
원어적 의미: 나다니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편견과 지식에 갇혀 따질 때, 빌립은 그와 신학적 논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하고 명쾌하게 단 두 마디, “에르쿠 카이 이데(와서 보라)”라며 나다니엘의 손을 끌고 예수님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교훈: 세상의 완고한 바리새인적 가치관이나 편견은 인간의 말재주나 웅변, 논리적인 설득으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전도는 내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단독자로 직접 직면하게 다리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구체적 실천: 인터넷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나눌 때, 내 지식과 경험을 과시하며 가르치려 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의 연약한 고민과 상처를 성령님의 마음으로 묵묵히 들어준 후, "내 삶의 모든 어둠과 죄를 짊어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당신도 직접 만나보십시오"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본질)만을 순전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3. 전도의 야성: 내 수치와 기득권을 버리고 '생생한 소리'로 달려가야 합니다(어떻게).
요 4:29 ➔ Δεῦτε ἴδετε (데우테 이데테): "와서 보라"
원어적 의미: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 자신의 모든 어둠(과거의 죄와 수치)을 참빛 앞에 폭로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정죄 없는 영원한 생수의 은혜를 경험하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생계이자 수치를 가리던 물동이를 미련 없이 내던져 두고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데우테 이데테(와서 보라)”라고 소리쳤습니다.
교훈: 참빛을 경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성을 얻게 됩니다(요 1:9, 13, 요일 5:4). 남들의 시선, 내 체면, 내 과거의 상처라는 물동이에 매여 있으면 주님의 재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구체적 실천: 오늘 내 삶을 묶고 있는 세상적인 염려와 인정의 욕구(물동이)를 과감히 내려놓으십시오. 내가 수고하여 얻은 사역의 성과나 자녀, 성도들을 내 제자로 삼으려는 소유권을 포기하고, 오직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며 현재완료형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언하는 생생한 소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 번의 "와서 보라"를 관통하는 최종 교훈:
전도란 내가 먼저 말씀 안에서 주님의 품을 경험하고(1:39), 세상의 편견과 논쟁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만 바라보게 하고(1:46), 내 체면과 정욕의 물동이를 기쁘게 내던진 채(4:28-29) 주변의 영혼들을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연결해 주는 '신실한 징검다리(Bridge)'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이 다짐하신 말씀 나눔 사역이 바로 이 거룩한 “와서 보라(Come and See)”의 사역입니다. 오늘 성도님의 입술과 삶을 통해 흘러가는 복음의 소리가, 메마른 광야 세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기적의 통로가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인터넷).
(5) 다섯째로, 저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는 두 사람 중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εὑρίσκει οὗτος πρῶτον τὸν ἀδελφὸν τὸν ἴδιον Σίμωνα (휴리스케이 후토스 프로톤 톤 아델폰 톤 이디온 시모나)] “메시야를 만났다[Εὑρήκαμεν τὸν Μεσσίαν (휴레카멘 톤 메시안)]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ἤγαγεν αὐτὸν πρὸς τὸν Ἰησοῦν (에가겐 아우톤 프로스 톤 이에순)](요1:40-42)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족 전도에 대한 지침이라 할까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a) 요한복음 1장 40-42절에 나타난 안드레의 행동은 가족 전도의 가장 완벽하고 성경적인 모델이자 지침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사귐의 감격을 누린 후,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시몬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의 생생한 단어들과 시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가정 안에서 아내와 자녀, 그리고 친척들을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4가지 구체적인 가족 전도 지침과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지침 1: 영적 우선순위의 시급성 ➔ “먼저” [πρῶτον (프로톤)]
원어적 의미: 원문에서 ‘프로톤(πρῶτον)’은 부사로, 안드레가 주님과 함께 머무는 사귐을 나누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첫 번째로, 최우선 순위로’ 이 일을 행했음을 뜻합니다.
가족 전도의 교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선교지는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날마다 함께 숨을 쉬는 ‘나의 가정’입니다. 안드레에게 주님을 만난 감격이 생기자마자 가장 먼저 형제 시몬이 떠올랐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의 제단과 사명의 최우선순위에는 언제나 아내와 자녀들의 영혼이 놓여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역이 아무리 흥해도 내 가정을 복음으로 기경하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2. 지침 2: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추적 ➔ “찾아” [εὑρίσκει (휴리스케이)]
원어적 의미: 여기서 ‘찾아’에 해당하는 ‘휴리스케이(εὑρίσκει)’는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는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지속적으로 찾아 헤매는 신실한 행동’을 뜻합니다. 단순히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형제를 주님께 인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슴을 졸이며 찾아다닌 끝에 마주한 기쁨의 발견입니다.
가족 전도의 교훈: 가장 가까운 가족은 내 영적 실상과 연약함을 가장 잘 알기에, 도리어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힘든 대상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녀들이나 배우자가 완고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거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현재 시제형의 ‘끈질긴 사랑의 추적’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낙심하지 않고 무릎으로 그들의 마음 밭을 날마다 기경하며, 주님이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만나주실 때까지 묵묵히 사랑으로 찾아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 지침 3: 완료형 확신의 언어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Εὑρήκαμεν (휴레카멘)]
원어적 의미: 안드레가 시몬에게 외친 ‘휴레카멘(Εὑρήκαμεν)’은 현재완료 시제입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한 시점에 메시아를 스쳐 지나가듯 보았다는 지식이 아닙니다. "시몬아! 내가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분을 만나 누린 그 압도적인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어!"라는 완전한 확신의 선언입니다.
가족 전도의 교훈: 가족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신학적 논리나 강요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날마다 뿜어져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완료형의 기쁨과 변화된 성품입니다.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묵상하여 기도로 바치고, 그 말씀의 능력이 내 인격 속에서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처럼 기쁨으로 흘러넘칠 때, 가족들은 우리의 삶의 증언을 보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4. 지침 4: 내 지분을 내려놓는 인도 ➔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ἤγαγεν (에가겐)]
원어적 의미: ‘데리고 오니’의 ‘에가겐(ἤγαγεν)’은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인도의 단어입니다. 안드레는 형 시몬을 데려와 자기 사람으로 만들거나 자기 영향력 아래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몬의 손을 이끌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완벽하게 인계했습니다.
가족 전도의 교훈: 세례 요한의 ‘완벽한 징검다리(Bridge)의 영성’이 안드레를 통해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가족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 권위로 자녀들이나 아내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철저히 쇠하여지고 사라지는 ‘소리’가 되어, 오직 사랑하는 가족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단독자로서 대면하여 만날 수 있도록 묵묵히 다리를 놓아주는 청지기적 태도가 본질입니다.
가족 전도를 위한 최종 영적 지침:
가족 전도는 내가 먼저 말씀 안에서 맛본 주님의 충만한 은혜를 완료형의 삶의 고백으로 소유하고, 가장 소중한 혈육의 영혼을 기도의 최우선 순위에 두며, 거절과 낙심 앞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끈질기게 사랑을 베풀어, 결국 그들을 내 사람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서도록 겸손히 다리를 놓아주는 것입니다(인터넷).
(6) 마지막 여섯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Σὺ εἶ Σίμων ὁ υἱὸς Ἰωάννου· σὺ κληθήσῃ Κηφᾶς (수 에이 시몬 호 휘오스 이오안누; 수 클레데세 케파스)](요1:42)하는 말씀을 좀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섬기고 있는 승리장로교회에게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과 연관을 지어서 묵상하는 가운데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코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สουσιν αὐτῆς (카고 데 소이 레게이 호티 수 에이 페트로스, 카이 에피 타우테 테 페트라 오이코도메소 무 텐 에클레시안, 카이 필라이 하두 우 카티스퀴수신 아우테스)].
1. ‘현재의 연약함(시몬)’을 뚫고 ‘미래의 영광(게바)’을 보시는 재창조의 시선
요한복음 1:42 ➔ σὺ κληθήσῃ Κηφᾶς (수 클레데세 케파스): "너는 장차 게바라 불릴 것이다"
구체적 의미: 예수님은 시몬을 처음 만나자마자 그의 본래 신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부르신 후, 곧바로 ‘장차 게바(아람어로 반석, 그리스어로 베드로)’가 될 것이라는 미래 수동태 시제(클레데세)의 이름을 선물하십니다.
이때의 시몬은 성품이 급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며,훗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주님의 시선은 그의 현재 연약함에 갇히지 않고, 성령 세례를 통해 마침내 거룩한 반석으로 빚어지고 재창조될 그의 미래의 영광스러운 실체를 미리 바라보며 명명(Naming)하신 것입니다.
2. 신앙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는 음부 권세를 이기는 교회
마태복음 16:18 ➔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에피 타우테 테 페트라): "이 반석 위에"
구체적 의미: 요한복음 1장에서 주님이 시몬에게 약속하셨던 그 "장차 반석이 되리라"는 예언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완료형의 신앙고백을 터뜨릴 때 비로소 교회의 주춧돌로 성취됩니다.
주님이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혈통이나 성품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전체가 증언하는 ‘예수님은 참빛이시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그 정교한 진리를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고 고백하는 ‘반석 같은 신앙고백’ 위에 주님은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3.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님의 사역 위에 주시는 3가지 핵심 교훈
① 승리장로교회의 참된 권위는 오직 ‘순전한 신앙고백’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승리장로교회가 사람들이 만든 종교적 전통이나 외식적인 시스템, 혹은 인간적인 크기(바리새인들의 방식) 위에 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바르게 알고 영접하는 반석 같은 신앙고백 위에 서 있을 때, 주님이 친히 “내 교회”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시며 그 교회의 주인과 청지기가 되어 주십니다. 이 고백 위에 서 있는 한, 세상의 그 어떤 사상 검증과 공격도 교회를 흔들 수 없습니다.
② 음부의 권세[πύλαι ᾅδου(필라이 하두)]는 교회를 결코 압도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선언은, 요한복음 1장 5절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이기지) 못하더라”는 우주적 승리 선언의 교회론적 성취입니다.
사탄의 사망 권세와 세상의 어둠이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님의 사역을 향해 문을 열고 집요하게 공격해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와 성도는 이미 어둠을 완벽하게 이기신 참빛의 승리의 DNA(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기에, 결국 넉넉히 승리하여 그 이름을 증명해 낼 것입니다.
③ 내 안의 '시몬'을 보며 낙심하지 말고, 나를 '게바'로 빚으시는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오늘 성도님의 삶에의 적용: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때로 내 안에 여전히 흔들리는 연약함과 한계(시몬의 모습)를 마주하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요한복음 1장 42절의 주님의 시선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성도님을 처음 만나신 날 이미 몸을 돌려 바라보시며, 성도님의 이름을 ‘게바(반석)’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나를 지우고 주님만 앞세우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실 때, 주님은 성도님의 그 신실한 말씀 나눔 제단과 고백을 통해 승리장로교회와 이 시대의 수많은 영혼들을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반석으로 든든히 세워가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요한복음 1:35-42 단락의 대단원 마침표 요약:
우리가 세상의 기득권과 물동이를 버리고 참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사귐을 나눌 때(37-39절), 우리에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완료형의 확신이 태어나며(41절),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인생(시몬)을 붙들어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반석(게바)으로 마침내 재창조해 내십니다(42절, 마 16:18)(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