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가슴을 치며 예배하는 상한 심령의 간구: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8:9-1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9-14절 말씀을 한국어로 읽었을 때 “세리”의 기도인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란 말씀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 마음 깊은 곳에 세리처럼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싶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한 후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으면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헬라어 중심으로 대조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a) 바리새인 (Φαρισαῖος)(파리사이오스):
(i) 어원과 역사적 배경(인터넷):
어원적 의미: 히브리어 '파루쉬(Parush)'에서 유래한 말로, '구별되다', '분리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부정한 세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반 대중[“암 하아레츠”(עַם הָאָרֶץ, Am Ha'aretz: 히브리어로 '땅의 사람들(People of the land)'이라는 뜻):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엘리트층이 '율법(토라)을 배우지 못해 무식하고, 종교적 정결 예법을 지키지 않는 저급한 일반 대중'을 멸시하며 부르는 용어] 및 이방인들로부터 철저히 분리하여 거룩함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이미지: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위선자의 이미지와 달리,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적 엘리트이자 도덕적 모범생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바치는 그들의 삶(눅 18:12)은 일반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경건의 극치였습니다.
(ii)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πεποιθότας ἐφ’ ἑαυτοῖς ὅτι εἰσὶν δίκαιοι καὶ ἐξουθενοῦντας τοὺς λοιποὺς (페포이도타스 에프 헤아우토이스 호티 에이신 디카이오이 카이 엑수데눈타스 투스 로이푸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이 헬라어 문장을 직역하면 “자신들이 의롭다는 사실 위에 스스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 그리고 다른 남은 자들을 멸시하는(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자들”이라는 뜻이며, 이 비유가 겨냥하는 핵심 문제인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정조준하는 문장입니다(인터넷):
1. 단어별 집중 분석
“πεποιθότας” (페포이도타스): '신뢰하다', '확신하다', '의지하다'라는 뜻의 동사 '페이도(πείθω)'의 완료분사 형태입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은 과거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확고부동하게 굳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즉, 어쩌다 한 번 든 생각이 아니라 "뼈속 깊이, 흔들림 없이 자신을 맹신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ἐφ’ ἑαυτοῖς” (에프 헤아우토이스): "자기 자신 위에(upon themselves)"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대상이자 신뢰의 주춧돌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가 되어 있는 전도된 신앙을 폭로합니다.
“ὅτι εἰσὶν δίκαιοι” (호티 에이신 디카이오이): "자신들이 의롭다(that they are righteous)"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의(디카이오스)'는 하나님 기준의 의가 아니라, 자신들이 규정한 종교적 기준(율법주의)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스스로 내린 합격 판정입니다.
“ἐξουθενοῦντας τοὺς λοιποὺς” (엑수데눈타스 투스 로이푸스):
현재분사의 역동성: ‘엑수데눈타스(ἐξουθενοῦντας)’는 현재 시제 분사입니다. 헬라어 현재분사는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그들의 삶 자체가 타인을 끊임없이 무가치하게 만드는 과정 속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복수 목적격의 대상: ‘투스 로이푸스(τοὺς λοιποὺς)’는 정관사와 형용사가 결합한 구조입니다. 나를 제외한 ‘그 나머지 인류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묶어 내리는 오만한 시선이 문법 구조에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숨겨진 영적 뉘앙스:
"가치의 박탈"존재의 소멸: 이 단어의 어원인 '0(Zero)으로 만들다'는 단순히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을 넘어, 상대방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적 가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위입니다. "저 사람은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교 우위의 중독: 바리새인은 자신이 쌓은 종교적 업적 리스트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타인을 '0'으로 깎아내려야만 하는 영적 중독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대가 0이 되어야 자신이 '전부(All)'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짧은 문장은 "자신들의 종교적 우월감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존재 가치를 항상 습관적으로 말살하고 지워버리던 영적 폭력의 실상"을 문법과 어원으로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2. 문맥적·영적 의미 (왜 이것이 치명적인가?)
예수님은 이 구절을 통해 바로 다음에 등장할 바리새인(Φαρισαῖος)의 영적 질병을 미리 진단하십니다.
신뢰의 대상이 바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trust 인 God)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의지(trust in self)합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종교적 업적(금식, 십일조 등)을 구원의 당당한 청구서로 여깁니다.
필연적인 타인 멸시: 9절의 뒷문장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로 이어집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내가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암 하아레츠(일반 대중)'나 '세리'를 영적으로 사형 선고 내리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은혜의 차단: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나 대속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치료자가 필요한 사람은 병든 자인데(마 9:12), 스스로 건강하다고 확신(완료형 분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도덕적 성취를 근거로 삼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완고한 영적 독선"을 의미합니다(인터넷).
· 이러한 바리새인의 완고한 영적 독선(자기 의)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눅18:11)라는 말씀에서도 우리는 엿 볼수가 있습니다. 이 짧은 묘사 속에 숨겨진 헬라어 본문의 뉘앙스와 영적 의미를 살펴보면 그 독선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인터넷):
a. “따로”의 헬라어 배치와 이중적 의미
이 부분의 헬라어 성경 구조를 보면 바리새인의 영적 고립과 오만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πρὸς ἑαυτὸν ταῦτα προσηύχετο” (프로스 헤아우톤 타우타 프로세우케토): 이 구절은 번역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며, 두 가지 모두 바리새인의 독선을 폭로합니다.
(1) 스스로에게 (Prayed with/to himself):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지만, 실상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읊조리는 자기만족적 독백이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된 것입니다.
(2) 따로 떨어져서 (Prayed by himself):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들, 특히 저 구석에 있는 '세리'나 '암 하아레츠' 같은 부정한 자들과 같은 공간에 섞이기 싫어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격리된 장소를 택해 섰음을 의미합니다.
b. “서서”(σταθείς)'가 가진 태도의 속내
당시 유대인들에게 서서 기도하는 것 자체는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문맥 속에서 바리새인의 '섬'(서있는 것)은 세리의 태도와 대조를 이룹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의 가장 잘 보이는 전면에 당당하게 '자신을 과시하듯' 우뚝 서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성취(금식, 십일조)가 당당하기에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거침이 없습니다.
반면, 13절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섭니다. 같은 '서 있는' 자세이지만, 바리새인의 섬은 '교만과 과시'의 서 있음이고, 세리의 서 있음은 심판대 앞에 선 죄인의 '두려움과 경외'의 서 있음입니다.
c. '분리된 자(Φαρισαῖος)'라는 이름의 증명
결국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모습은 그들의 이름인 바리새인(분리된 자)의 삶 방식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이들은 기도의 자리에서조차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11절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라는 기도의 내용이 바로 이 '따로' 선 위치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구절은 거룩을 위한 구별이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기 위한 영적 격리를 선택한 바리새인의 자기 기만을 완벽하게 고발하는 성경의 명장면입니다(인터넷).
· 이러한 바리새인의 완고한 영적 독선(자기 의)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Ὁ θεός, εὐχαριστῶ σοι ὅτι οὐκ εἰμὶ ὥσπερ οἱ λοιποὶ τῶν ἀνθρώπων, ἅρπαγες, ἄδικοι, μοιχοί, ἢ καὶ ὡς οὗτος ὁ τελώνης (오 데오스 에우하리스토 소이 호티 우크 에이미 호스페르 호이 로이포이 톤 안드로폰 하르파게스 아디코이 모이호이 에 카이 호스 후토스 호 텔로네스)](눅18:11)란 말씀에서 우리는 더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리새인의 '완고한 영적 독선(자기 의)'이 그들의 입술을 통해 어떻게 직접적으로 고백되는지 보여주는 이 비유의 가장 충격적인 절정입니다. 헬라어 본문과 단어들을 세밀히 뜯어보면, 그가 드린 감사의 기도가 사실은 기도가 아니라 타인을 짓밟고 올라선 교만의 선포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인터넷):
a. 전도된 감사의 구조: "우크 에이미 호스페르" (οὐκ εἰμὶ ὥσπερ)
뜻: "나는 ~와 같지 않다 (I am not like...)"
영적 의미: 바리새인의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아닙니다. 타인과의 철저한 '비교'에서 오는 우월감의 표현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다른 죄인들보다 얼마나 깨끗한가를 확인하며 안도하는 기만적인 신앙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b. 타인을 향한 무자비한 정죄와 낙인
바리새인은 모든 인간[οἱ λοιποὶ τῶν ἀνθρώπων(오이 로이포이 톤 안드로폰)('그 남은 다른 사람들')을 세 가지 범주로 요약하며 자신과 분리합니다.
“ἅρπαγες” (하르파게스) (토색하는 자들): 탐욕에 눈이 멀어 남의 것을 강탈하고 사취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ἄδικοι” (아디코이) (불의한 자들):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의 기준을 깨뜨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μοιχοί” (모이호이) (간음하는 자들): 도덕적, 성적 순결을 더럽힌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은 이 거친 단어들을 동원해 세상 모두를 악한 죄인으로 몰아세우며, 자신만이 그 거대한 죄의 오염에서 벗어나 있는 유일한 '의인'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습니다.
c.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ἢ καὶ ὡς οὗτος ὁ τελώνης)
이 기도의 가장 잔인한 부분은 “οὗτος”(후토스) (이 사람)'라는 지시대명사의 사용에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멀찍이 떨어져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 그 세리를 손가락질하며 기도의 '시각 교재'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기 있는 저 추악한 세리 놈 보이시죠? 내가 저 인간과 같지 않게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타인을 멸시하고 깎아내려 자신의 종교적 자존감을 채우는 영적 폭력입니다.
d. 하나님을 관객으로 만든 기도
그는 "하나님이여(Ὁ θεός)"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지만, 이 기도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나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은 완벽하므로, 하나님은 그저 자신이 쌓아 올린 대단한 업적을 바라보고 감탄해 주어야 하는 '관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비교 우위의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타인의 허물을 디딤돌 삼아 높아지려는 신앙이 얼마나 완고하고 독선적인지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말씀입니다(인터넷).
· 이러한 바리새인의 완고한 영적 독선(자기 의)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νηστεύω δὶς τοῦ σαββάτου, ἀποδεκατῶ πάντα ὅσα κτῶμαι(네스퉤오 디스 투 삽바투 아포데카토 판타 호사 크토마이)](눅18:12)란 말씀에서도 우리는 엿 볼수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리새인이 가진 완고한 영적 독선(자기 의)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헬라어 본문을 당시 유대교의 율법적 배경과 함께 분석해 보면, 그가 왜 그토록 오만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독선에 불과했는지가 선명히 드러납니다(인터넷):
a. 율법의 요구를 뛰어넘은 과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νηστεύω δὶς τοῦ σαββάτου (네스퉤오 디스 투 삽바투)]
당시의 배경: 구약 율법(레위기 16장)이 규정한 의무적 금식은 일 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경건을 증명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주 2회 자발적인 금식을 행했습니다(이 날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날과 내려온 날로 전해집니다).
영적 독선: 그는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최소한의 의무를 넘어, 이만큼 대단한 고행과 경건을 실천하고 있다"는 공로 의식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b. 철저함을 넘어선 강박적 공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ἀποδεκατῶ πάντα ὅσα κτῶμαι (아포데카토 판타 호사 크토마이)]
당시의 배경: 율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 가축 등의 주요 소득에 대해 십일조를 내라고 했습니다(신 14:22-23).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시장에서 사 오는 아주 사소한 약초(박하, 회향, 근채)의 잎사귀 하나까지 수량을 세어 정확히 10분의 1을 구별해 바쳤습니다(마 23:23).
영적 독선: 본문의 “πάντα”(판타)는 '모든 것(everything)'을 뜻합니다. 즉, 그는 "내가 얻은 모든 사소한 것까지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십일조를 바쳤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물질적 결백함과 철저함을 하나님 앞에 당당히 청구서로 내밀고 있습니다.
c. "하나님은 나에게 빚을 지셨다"는 영적 착각
이 구절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채권자가 아닌 채무자로 만들려 했다는 점입니다.
행위의 노예: 그는 '금식'과 '십일조'라는 종교적 행위를 완벽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에게 복을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셔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은혜의 부재: 그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 용서에 대한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행한 종교적 '업적 리스트'만 나열되어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아무리 철저한 종교적 행위와 율법 준수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자기 의의 수단이 되는 순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시키는 가장 무서운 영적 독선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인터넷).
- 저는 지금도 이 바리새인처럼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최소한의 의무를 넘어,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자신이 행한 종교적 ‘업적 리스트’에 만족감을 가지고 스스로 합격 판정만 내린 것이 아니라 그러한 종교적 업적 리스트가 모자르던지 없는 사람과 비교해서 오는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마음 속으로라도 업신여기고 멸시하며 깍아내려 자신의 종교적 자존감을 채우는 영적 폭력을 휘두르는 직분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의 '직분자적 바리새주의'와 그것이 유발하는 영적 폭력의 실상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은혜의 자리에 들어선 ‘종교적 마일리지’
현상: 성경 읽기 독파 횟수, 새벽기도 개근, 공예배 참석률, 직분의 높낮이, 헌금의 액수 등이 현대판 ‘금식과 십일조 리스트’로 전락합니다.
본질: 본래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반응하여 기쁨으로 해야 할 신앙의 훈련들이, 어느 순간 내 영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종교적 마일리지(Merit)’가 됩니다. 그 리스트를 채웠다는 만족감은 ‘하나님이 나를 합격시키셨다’는 착각을 낳고, 십자가의 대속(은혜)보다 자신의 성실함을 더 의지하게 만듭니다.
2. 비교 우위를 통한 ‘영적 자존감’의 착시
현상: “나는 저 성도처럼 예배를 빼먹지 않는다”, “나는 저 집사처럼 봉사를 기피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싹틉니다.
본질: 이들의 신앙적 자존감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발견하는 십자가 사랑에서 오지 않습니다. 나보다 ‘종교적 업적이 모자란 타인’을 디딤돌 삼아 얻는 상대적 우월감에서 옵니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자존감은 참된 신앙이 아닌 심리적 교만일 뿐입니다.
3. 교회의 공기를 오염시키는 ‘영적 폭력’
현상: 겉으로는 신앙적인 권면이나 조언의 형태를 띠지만, 속으로는 정죄와 멸시를 담아 눈빛, 말투, 은연중의 무시로 드러납니다.
본질: ‘영적 폭력(Spiritual Violence)’이라는 표현이 매우 정당한 이유는, 이 행위가 연약한 영혼의 숨통을 막고 교회 문을 나서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암 하아레츠(일반 대중)’에게 "너희는 저주받은 자"라며 영적 고립감을 준 것처럼, 오늘날 일부 직분자들도 성도들에게 낙인을 찍어 교회를 ‘은혜의 병원’이 아닌 ‘외식의 시험장’으로 변질시킵니다.
4. 이 비유가 현대 교회에 주는 최종 경고
예수님이 이 비유를 꺼내신 대상은 성전 밖에 있던 죄인들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뼈를 묻으며 살던 ‘당대 최고의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거나,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이 비유의 가장 무서운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내가 쌓은 종교적 업적이 타인을 향한 잣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성전 중심에서 당당히 기도했으나 버림받았던 바리새인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인터넷).
n “교회 안의 완고한 영적 독선과 영적 폭력을 극복하고, 교회가 참된 ‘은혜의 공동체’로 회복되기 위해 직분자들과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 속 세리(τελώνης)가 보여준 태도이자, 예수님이 복음서를 통해 끊임없이 요구하신 핵심 가치입니다”(인터넷):
1.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 의식 회복
바리새인의 치명적인 오류는 신앙의 시선이 '타인과의 비교'를 향했다는 점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나님 면전에서(Coram Deo)' 나를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타인과의 수평적 비교 차단: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수평적 비교를 멈추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수직적 직면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파산 상태 인정: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기준 앞에 서면, 세상의 그 어떤 대단한 종교적 마일리지도 '더러운 옷'과 같음을 깨닫게 됩니다(사 64:6).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를 본 자는 결코 타인을 정죄하거나 멸시할 수 없습니다.
2. '성전 문턱'의 영성: 나도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자각
본문 속 세리는 성전 중심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눅 18:13). 현대 직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성전 문턱의 영성'입니다.
직분은 계급이 아닌 피로 산 은혜: 직분은 나의 경건이 훌륭해서 얻은 '훈장'이 아니라, 자격 없는 죄인을 불러 맡겨주신 '십자가의 은혜'일 뿐입니다.
동병상련의 마음: 나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ἱλάσκομαι, 속죄함)가 아니면 단 1초도 살 수 없는 용서받은 죄인임을 기억할 때, 종교적 리스트가 부족한 지체들을 향해 날 선 비판 대신 "긍휼과 애통함"을 품게 됩니다. 교회를 '심판정'이 아닌 용서와 회복이 있는 '병원'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3. '의무'에서 '사랑'으로의 동기 전환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 금식', '소득의 십일조'라는 눈에 보이는 의무와 규칙(행위)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규칙 준수가 아닌 '관계와 사랑'입니다.
율법의 알맹이 회복: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규칙을 지키는 외적 열심보다, 그 규칙의 본질인 '지체를 향한 사랑과 배려'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랑이 아닌 헌신: 내 종교적 행위가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기 위한 거룩한 도구'로만 쓰일 때 영적 독선의 고리는 끊어집니다.
요약하자면,
교회가 바리새주의적 영적 폭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직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매일 아침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던 그 세리의 자리(십자가 밑)로 다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깨어지고 낮아질 때 비로소 타인을 품는 참된 은혜의 공동체가 시작됩니다(인터넷).
(b) 세리 (τελώνης)(텔로네):
(i) 어원과 역사적 배경(인터넷):
어원적 의미: '세금' 또는 '대가'를 뜻하는 “τέλος”(텔로스)와 '사다' 또는 '계약하다'라는 어원에서 유래하여, "징세 계약을 맺고 세금을 거두는 자"를 뜻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이미지: 신약 시대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매국노'이자 '합법적 강도'로 취급받았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민간 업자에게 특정 지역의 징세권을 입찰하는 '도급제'를 썼는데, 세리들은 로마에 바칠 액수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강압적으로 뜯어내 그 차액으로 사익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낙인: 이들은 이방인(로마인) 정권과 접촉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유대교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로 분류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었으며, '죄인'이라는 단어와 늘 동의어처럼 붙어 다녔습니다(예: "세리와 죄인들").
(ii)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ὁ δὲ τελώνης μακρόθεν ἑστὼς οὐκ ἤθελεν οὐδὲ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ἐπᾶραι, ἀλλ’ ἔτυπτεν τὸ στῆθος αὐτοῦ λέγων· Ὁ θεός, ἱλάσθητί μοι τῷ ἁμαρτωλῷ(호 데 텔로네스 마크로덴 헤스토스 우크 에델렌 우데 투스 오프달무스 에이스 톤 우라논 에파라이 알 에튀프텐 토 스테도스 아우투 레곤 오 데오스 힐라스데티 모이 토 하마르톨로)](눅18:13).
· 바리새인의 오만한 기도와 극적으로 대조되는 세리의 통회와 겸손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단어별로 세밀히 분석해 보면,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느꼈던 철저한 영적 파산 상태와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인터넷):
1. 물리적·영적 거리감: “멀리 서서”[μακρόθεν ἑστὼς(마크로덴 헤스토스)]
뉘앙스: 바리새인이 성전 중심부에서 당당히 자신을 과시하며 섰던 반면, 세리는 성전 바깥뜰 구석진 곳에 섰습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자신의 영적 추악함에 대한 자각과 깊은 경외심(두려움)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2. 압도된 죄책감: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기를 원치도 못하고”[οὐκ ἤθελεν οὐδὲ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ἐπᾶραι(우크 에델렌 우데 투스 오프달무스 에이스 톤 우라논 에파라이)]
뉘앙스: ‘ἤθελεν(에델렌)’은 미완료 시제로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는 심리적 불능 상태를 뜻합니다. 당대 유대인들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두 손을 펴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세리는 자신의 죄의 무게에 짓눌려 감히 고개를 들 의지조차 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3. 반복되는 통회: “다만 가슴을 치며”(But kept striking his breast))[ ἀλλ’ ἔτυπτεν τὸ στῆθος(알 에튀프텐 토 스테도스)]
뉘앙스: 여기서 ‘ἔτυπτεν(에튀프텐)’ 역시 미완료 시제로, 한 번 툭 치고 만 것이 아니라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계속해서 반복해 쳤다”는 뜻입니다. 고대 유대 문화에서 가슴(심장)을 치는 행위는 극도의 슬픔, 수치심, 그리고 자기 혐오를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죄악된 중심(마음)을 쳐서 깨뜨리는 영적 통곡입니다.
4. 오직 은혜만을 구하는 절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God, be merciful to me) [Ὁ θεός, ἱλάσθητί μοι (오 데오스, 힐라스데티 모이)]
뉘앙스: 가장 중요한 단어는 '힐라스데티(ἱλάσθητί)'입니다. 이는 단순히 동정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 레위기적 제사 언어로 “나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어 주소서”, “진노를 거두시고 화목하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세리는 자신의 선한 행위나 종교적 업적이 제로(0)임을 알았기에, 오직 성전에서 드려지는 대속 제물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조건 없는 자비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유일한 죄인이라는 고백: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the sinner) [τῷ ἁμαρτωλῷ (토 하마르톨로)]
뉘앙스: 헬라어 문장 구조상 정관사 '토(τῷ)'가 붙어 있어 직역하면 “그 죄인에게” 또는 “우두머리 죄인인 나에게”가 됩니다. 바리새인은 세상 사람들을 '나머지 죄인들(로이푸스)'로 규정하고 자신을 예외로 두었지만, 세리는 남의 죄는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그 유일한 죄인입니다”라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타인을 0으로 만들었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0(아무 공로 없는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결코 다른 지체를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인터넷).
-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매듭짓는 예수님의 충격적인 폭탄선언이자 결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상식을 완벽하게 뒤엎는 역설적인 영적 법칙이 담겨 있으며, 그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전도된 영적 평가: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상식의 전복: 당시 유대 사회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바리새인'이 의롭다 하심(칭의)을 얻고, 매국노인 '세리'가 정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저울: 하나님이 보시는 '의'는 인간이 쌓아 올린 종교적 업적 리스트의 양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며 타인을 멸시한 자의 예배는 거부당하고, 아무 공로 없으나 자신의 죄를 찢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한 자의 통회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 "의롭다 하심을 받고(δεδικαιωμένος)"
헬라어 본문에서 이 단어는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로 쓰였습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합격 판정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채운 종교적 리스트를 근거로 스스로 의인이라 선언했지만 거절당했고, 세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고백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구원은 나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짐을 확증하는 대목입니다.
c. 하나님 나라의 절대 법칙: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바리새인): 스스로 하나님의 재판관 자리에 앉아 타인의 가치를 '제로(0)'로 만들고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낮추실(심판하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리): 거룩하신 하나님 면전(코람 데오)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절감하고 철저히 엎드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높여(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자신이 쌓은 종교적 업적과 마일리지를 가지고 다른 연약한 지체들을 업신여기고 마음으로라도 깎아내리는 직분자들은, 성전 중심에 서서 당당히 기도했으나 결국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내려간 바리새인'의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교회 안에서 직분도 없고 신앙의 리스트가 모자라 보일지라도,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가슴을 치며 예배하는 상한 심령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높여주시는 '참된 의인'입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