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달리셨을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11-32).

 

 

(1)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번째 비유인잃은 아들(탕자) 비유 기록된 누가복음 15 11-32 말씀을 4 부분으로 나눠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한 말씀입니다(12).

 

(i)                      저는 누가복음 15 12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때에 둘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요구한 “τ πιβάλλον μέρος τς οσίας”( 에피발론 메로스 테스 우시아스)(“내게 돌아올 분깃”) 문장의 구체적인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문장의 종합 지역은 “(아버지의) 존재(재산)로부터 나에게 귀속되어 떨어지는 입니다(인터넷).

 

·       둘째 아들의 이러한 요구는 충격적인 요구로서 자기 아버지를 죽은 취급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유산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상속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살아서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또는 "내게 아버지는 필요 없고 아버지의 돈만 필요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는 극도의 불효이자 모욕이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었지만, 경우에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버지가 수익권을 갖고 자녀는 처분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재산을 '가지고 나라로 가기 위해' 처분권(현금화할 권리)까지 요구한 것입니다[신명기 21 17 법에 따르면 장자는 가산의 3분의 2( ) 받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 요구한 “μέρος”[메로스()](15:12) 전체 가산의 3분의 1 해당합니다](인터넷).

 

·       둘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내게 돌아올 분깃”(12) 요구한 것에 대한 신학적 영적 의미입니다(인터넷):

 

관계성보다 물질을 추구하는 죄의 본질: 둘째 아들은 아버지라는 '존재(인격적 관계)'보다 아버지가 가진 '소유(물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그분이 주신 (은사, 생명, 시간)만을 챙겨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죄악된 성향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의 독립: “οσία”(우시아)(“분깃”)[“합법적으로 자신에게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정당한 권리로서의 재산”(인터넷)] '존재와 생명의 본질' 뜻한다는 [고대 사회에서 가정의 가산(가축 ) 단순한 돈이 아니라, 가문의 '존재 기반'이자 '생명 자체'였음(인터넷)] 착안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내게 주신 생명과 존재의 몫을 떼어달라" 요구하며 영적 독립을 선언하는 비극을 상징합니다[설명: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οσία”(우시아)(“재산”) 요구한 것은 단순히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찢어낸 '이며, 아버지가 가진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분리해 내겠다는 영적 독립 선언을 의미함].

 

결국 문구는 단순히 재산을 달라는 철없는 요구를 넘어, "당신과의 관계를 끊고 인생을 힘으로 통제하겠다" 외치는 인간의 근원적인 반역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표현입니다(인터넷).

 

(ii)                    이렇게 둘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τ πιβάλλον μέρος τς οσίας”( 에피발론 메로스 테스 우시아스)(“내게 돌아올 분깃”) 요구하였을 아버지는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15:12)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지 흥미로운 점은살림이란 헬라어 단어가 “τν βίον”(비오스)이라는 것입니다.  단어가 흥미롭게 생각되었냐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분깃”(“합법적으로 자신에게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정당한 권리로서의 재산”) 헬라어로 “οσία”(우시아)였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τν βίον”( 비온) '생명', '생활', '살림' 뜻하는 헬라어 명사 βίος(비오스) 남성 단수 대격(목적격) 형태입니다.  누가복음 15 12 후반부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고 , 성경은 앞서 둘째 아들이 요구한 단어인 “οσία”(우시아, 재산/본질) 대신 바로 “βίος”(비오스)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합니다.  단어가 가진 구체적인 의미와 성경 문맥 영적 메시지입니다(인터넷):

 

1.       단어의 일차적 의미: "생명" "생계 수단"

 

생물학적 생명: 영어 단어 Biology(생물학), Biography(전기)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쉬고 살아가는 '육체적 생명' ' 평생의 ' 뜻합니다.

 

생계 수단과 살림: 단순히 목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업', '살림살이', '가산' 의미합니다.

 

2.       문맥 속에서의 충격적인 영적 의미

 

12 후반부는 헬라어 원문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κα διελεν ατος τν βίον”[그리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살림(생명) 나누어 주었다].

 

자신의 생명을 쪼개어 아버지: 둘째 아들은 정량적인 '재산의 [“οσία”(우시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에게 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자신의 “βίος”(비오스), '생명 자체'이자 '살아온 삶의 전부'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농지와 가축을 쪼개어 준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진 삶의 기반과 생명줄을 베어내어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배신과 하나님의 자기희생: 인간은 하나님께 물질과 자원(우시아)만을 요구하며 독립하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과 전부(비오스) 찢어서 내어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훗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비오스) 십자가에서 온전히 찢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강력하게 예표합니다.

 

3.       한국어 성경들의 번역 비교

 

한국어 성경들은 “βίος”(비오스) 의미를 문맥에 맞게 주로 '살림'이나 '재산'으로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 / 개역한글: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새번역 / 공동번역 / 가톨릭: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쉬운성경: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번역들 개역개정의살림이라는 번역은 '살아가는 생계' '생명' 뉘앙스를 모두 담고 있어, 헬라어 '비오스' 속뜻을 아주 살린 훌륭한 번역입니다.

 

요약하자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죽은 이로 취급하며 돈을 받아 갔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비오스) 쪼개어 아들에게 내어주는 눈물겨운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비오스(βίος)라는 단어는 나중에 누가복음 21 4절에서 가난한 과부가 넣은 '생활비 전부' 표현할 때도 똑같이 쓰입니다.

 

(iii)                 2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죄의 본질' '관계의 파괴'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은 취급했듯, 현대의 자녀들도 부모를 향한 인격적 존중을 지워버린 물질만 탐하고 있습니다. 

 

·       결국 원인은 인간의 이기심, 생존에 대한 불안, 그리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결합된 결과라고 있습니다(인터넷).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이기심 속에서 '현대판 탕자' 삶을 따르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 지침은 '관계의 회복' '물질관의 변화'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4가지 극복 방안입니다(인터넷):

 

1.       존재(우시아) 소유(비오스) 주권 인정하기

 

탕자는 아버지를 재산 공급처로만 보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생명과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침: "우상의 자리에서 돈을 내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

 

성경 구절: " 사람이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6:24).

 

실천: 돈이 생존과 미래를 보장한다는 불안감을 버리고, 공급자는 오직 하나님(부모를 통한 공급 포함)이심을 매일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물질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가치관 전환하기

 

둘째 아들은 아버지라는 인격적 관계를 끊고 돈을 택했습니다.  현대 사회의 단절을 이기는 길은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하나님과 사이에 '인격적 소통' 회복하는 것입니다.

지침: "조건 없는 사랑과 존경의 관계 맺기"

 

성경 구절: "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니"( 6:2).

 

실천: 부모를 '유산을 대상' 아니라 '사랑하고 공경해야 인격'으로 대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물질적 대화(학비, , 용돈)보다 정서적 대화(감사, 마음의 상태) 비중을 높여야 합니다.

 

3.       비교의 불안을 이기는 '자족의 영성' 기르기

 

현대인들이 부모의 재산에 집착하는 이유 하나는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생존의 불안'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상 기준에 나를 맞추지 말고 주님 안에서 만족하라고 권합니다.

 

지침: "비교를 멈추고 주신 것에 감사하기"

 

성경 구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것이니라"(딤전 6:7-8).

 

실천: 미디어가 조장하는 과도한 소비 문화와 비교 의식에서 벗어나, 현재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부모님의 헌신에 먼저 감사하는 훈련을 합니다.

 

4.       청지기(Stewardship) 정신 확립하기

 

재산은 내가 마음대로 휘두를 있는 ' ' 아니라, 잠시 맡아 관리하는 '주인의 '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침: " 뜻이 아닌 주인의 뜻대로 물질 사용하기"

 

성경 구절: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실천: 탕자처럼 재산을 '나의 쾌락과 독립' 위해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화평과 이웃을 돕는 일에 흘려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부모의 재산을 탐하기보다 스스로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요약하자면, 문제의 궁극적인 성경적 해답은 "돌아감(회개)" 있습니다.  탕자가 중심의 나라에서 실패한 , 비로소 "아버지의 "이라는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왔던 것처럼, 현대인들도 돈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적인 사랑 앞으로 돌아올 비로소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인터넷).

 

(b)    둘째로, 둘째 아들이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였다는 말씀입니다(15:13-19).

 

(i)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3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며칠이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κα μετ’ ο πολλς μέρας”(카이 메트 폴라스 헤메라스)입니다.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리고 많지 않은 날들이 지난 후에"라는 뜻입니다.  짧은 구절은 둘째 아들의 심리 상태와 행동의 급박함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복선이며, 문맥 속에서 이렇게 구체적인 의미와 영적 메시지가 있습니다(인터넷):

 

1.       치밀하고 계획적인 도망 (지체 없는 실행)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 주자마자 둘째 아들은 전혀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되어' 곧바로 재산을 처분하고 떠났다는 것은, 그가 유산을 요구하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의 품을 떠날 완벽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2.       재산 처분의 급박함과 가문의 수치

고대 근동 사회에서 토지나 가축 같은 유산을 처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현금화를 빨리하려다 보니 둘째 아들은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에 급매물로 던졌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효 자식이 조상의 땅을 이방인에게 마구 팔아넘기는 모습을 보며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그는 가문의 명예나 손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돈을 쥐고 도망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3.       죄의 속성: 하나님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영적으로 구절은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은혜(재산) 입은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구속과 간섭에서 하루라도 빨리, 한시라도 급하게 벗어나 자기가 주인 도메인을 만들고 싶어 하는 조급함을 가집니다.  아버지가 눈앞에 있는 순간이 그에게는 막히는 감옥 같았던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구절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졌던 인격적 단절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했던 탐욕의 조급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단어로 날카롭게 고발하는 구절입니다.

 

·       지금도 부모님을 향해 깊은 인격적 단절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탐욕의 조급합을 크게 가지고 있는 자녀들이 특히 부자집에 많지 않을까요?

실제로 현대 심리학과 사회학 연구(: 부유층 자녀들의 심리를 연구한 수니야 루타(Suniya Luthar) 교수의 연구)에서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의 자녀들이 정서적 고립, 물질주의, 그리고 부모와의 인격적 단절을 겪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부유한 가정(소위 부잣집)에서 탕자와 같은 조급함과 물질 집착이 쉽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과 원입니다(인터넷):

 

a.       관계를 물질로 대체한 부작용

 

시간 대신 돈으로 채운 공백: 바쁜 부유층 부모들은 자녀와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고가의 선물, 용돈, 물질적 보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자원화: 어려서부터 인격적 교감 대신 "물질적 공급"만을 경험한 자녀는 부모를 '나를 사랑하는 인격' 아니라 '돈을 주는 기능적 도구' 인식하기 쉽습니다.  결국 탕자가 아버지를 돈의 출처로만 보았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됩니다.

 

b.       물질적 쾌락에 대한 중독과 내성 (쾌락의 쳇바퀴)

 

자족이 불가능한 구조: 풍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즉시 얻는 것에 익숙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르는데, 물질이 주는 만족감은 금방 사라지고 자극( 많은 , 이른 독립) 갈구하게 만듭니다.

 

통제권에 대한 조급함: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이들은 부모의 잔소리나 훈계를 견디지 못합니다.  "돈은 어차피 많으니 몫을 빨리 떼어내어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쾌락을 누리겠다" 조급함(13절의 며칠이 되어 떠나는 모습) 훨씬 강하게 작용합니다.

 

c.       '자산 증가' '신분'이라는 물질주의 학습

 

부모의 가치관을 대물림: 자녀는 부모의 말보다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부모가 평소에 사람을 평가할 때나 삶의 안정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물질주의적 성향을 보였다면, 자녀는 그것을 고스란히 학습합니다.

 

따라서 자녀 역시 부모의 건강이나 인격보다 ' 부가 나에게 언제 상속될 것인가'라는 경제적 가치에 빨리 눈을 뜨게 됩니다.

 

d.       안전망이 주는 무모함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은 부모를 떠나 방탕하게 살면 당장 굶어 죽는다는 생존의 위협을 알기에 조심스럽습니다.  반면 부유층 자녀들은 "망해도 돌아갈 안전망이 있다" 무의식적인 무모함 때문에, 탕자처럼 과감하게 가산을 정리해 ' 나라' 떠나는 일탈을 쉽게 감행합니다.

 

(ii)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3 중반절을 보면 성경은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συναγαγν παντα νεώτερος υἱὸς πεδήμησεν ες χώραν μακράν”(쉬나가공 하판타 네오테로스 휘오스 아페데메센 에이스 코란 마크)입니다.   말씀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벽하게 끊고 영적·공간적 격리를 감행하는 장면으로, 단어별 구체적인 의미와 영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단어별 구체적 의미

 

“συναγαγν”(쉬나가곤): '함께' 뜻하는 “σύν”(쉬인) '모으다' 뜻하는γω”(아고) 합쳐진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짐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부동산과 가축을 급하게 '전부 긁어모아 현금화(Liquidation)'했음을 의미합니다.

 

παντα”(하판타): '남김없이 전부', '모든 ' 뜻하는 강조 표현입니다.  아버지 흔적이 묻은 가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돈으로 바꾼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νεώτερος υἱὸς”( 네오테로스 휘오스): ' 젊은 아들(둘째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미숙함과 충동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πεδήμησεν”(아페데메센): '자기 백성·집으로부터' 뜻하는 πό(아포) '지방·국가' 뜻하는 δμος(데모스) 결합된 동사입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다', '고향을 아주 떠나다'라는 법적·신분적 단절을 의미합니다.

 

“ες χώραν μακράν”(에이스 코란 마크란): ' 나라 안으로'라는 뜻입니다.  지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격리된 장소를 뜻합니다.

 

2.       문맥 속에서의 구체적인 의미와 영적 메시지

 

급매(急賣) 통한 가문의 모욕

 

고대 유대 사회에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는 하나님의 기업이므로 함부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긁어모아(συναγαγν)' 급하게 처분했습니다.  며칠 만에 자산을 처분하려다 보니 엄청난 헐값에 팔았을 것이며, 이는 가문의 명예와 경제적 기반을 이방인에게 찢어 발겨 넘겨버린 극악무도한 배신행위였습니다.

 

나라”(χώραν μακράν) 영적 의미

 

그가 선택한 나라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 이방 땅이었습니다.

 

간섭이 없는 자유의 공간: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누구 하나 잔소리하지 않는 죄의 해방구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와 감섭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고자 선택한 '영적 이방 지대' 상징합니다.

 

관계의 완전한 청산

 

'아페데메센(πεδήμησεν)'이라는 단어는 그가 단순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신분과 의무를 완전히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고향과의 모든 끈을 잘라버린 것입니다.

 

요약: 구절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라는 울타리를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고 남김없이(παντα) 거부" , 자기만의 쾌락과 독립을 위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영적 무법지대(χώραν μακράν)" 자진해서 망명을 떠났음을 고발하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였다(1:2-3)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의 모습은 구약성경 요나서 1장에 등장하는 요나 선지자의 도망 장면과 영적으로 완전히 일치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얼굴) 벗어나 내가 주인 되고 싶은 인간의 불순종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쌍둥이 구절입니다.   구체적인 공통점과 평행 이론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지리적 도망의 방향성: 동쪽에서 서쪽으로, 아버지에게서 나라로

요나 (다시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동쪽인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정확히 반대 방향인 서쪽 스페인의 '다시스(Tarshish)'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다시스는 '세상의 ', '하나님의 눈이 미치지 않는 가장 '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 나라): 아버지의 간섭과 시선이 닿지 않는 ' 나라(χώραν μακράν)' 떠났습니다.   율법과 아버지가 없는 영적 무법지대를 선택한 것입니다.

 

영적 의미: 사람 모두 지리적 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향력을 지워버리려는 '공간적 격리' 시도했습니다.

 

b.       도망의 동기: " 뜻대로 하겠다" 영적 독립 선언

 

요나: "이방 민족 니느웨는 구원받으면 된다" 자기 생각과 정의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했습니다.

 

둘째 아들: "아버지의 품에 있으면 마음대로 쾌락을 누릴 없다"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아버지의 인격을 거부했습니다.

영적 의미: 선지자(요나)이든 불효자(둘째 아들)이든,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내가 자리에 앉아 노릇 하려는 것입니다.

 

·       지금도 죄의 본질에 이끌림을 받아 아버지의 관계를 완벽하게 끊고 영적·공간적 격리를 감행하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젋은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가려고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교를 선호하는 같습니다.  그만큼 젊은이들은 자기에게 깊은 상처를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어하는 같습니다.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가슴 아프지만 너무나 정확한 현대 사회의 영적·심리적 현실을 짚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이 '며칠이 되어(조급함)' 가산을 챙겨 ' 나라(간섭 없는 )' 떠난 심리적 메커니즘은, 현대 청소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지역이나 해외 대학을 선택해 집을 탈출하려는 현상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이를 심리학과 성경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젊은이들이 공간적 격리를 감행하는지 이면의 아픔과 원인을 명확히 이해할 있습니다.

1.       상처로부터의 도피: ' 대학' 합법적인 탈출구

 

많은 청년들에게 대학 진학은 단순한 학업의 연장이 아니라, '부모의 통제와 상처로부터 도망칠 있는 인생 최초의 합법적 면죄부'입니다.

 

부모(특히 아버지)로부터 정서적 학대, 과도한 간섭, 완벽주의적 압박, 혹은 방임을 겪은 자녀들은 집을 안전한 울타리가 아닌 ' 막히는 감옥'이나 '상처의 진원지' 느낍니다.

 

이들에게 지리적 거리(지방 대학, 유학) 나를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가 없는 ' 나라' 그리워했듯, 이들은 부모의 잔소리와 시선이 닿지 않는 자취방이나 기숙사라는 '나만의 다시스' 꿈꾸는 것입니다.

 

2.       물질적 의존과 정서적 단절의 공존 (현대판 탕자의 모순)

 

흥미로운 점은 젊은이들이 부모를 혐오하고 멀리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대학 등록금과 월세, 생활비는 부모에게 당연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12절에서 아버지를 죽은 취급하며 "내게 돌아올 분깃(우시아)" 요구했던 둘째 아들의 모습과 소름 돋도록 일치합니다.

 

부모의 '인격과 관계' 거부하지만, 부모가 제공하는 '물질적 자원' 누리겠다는 이기성과 모순이 대학 진학 시기에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3.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영적 투사(Projection) 단절

 

심리학에서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하나님 아버지' 대한 이미지로 그대로 투사된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무섭고, 막히고, 나에게 상처를 존재였다면, 청년들은 하나님 아버지 역시 나를 감시하고 율법으로 정죄하는 분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육신의 부모) 떠나는 동시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리는 '영적 격리' 함께 감행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대학생이 신앙을 이탈하는 청년 복음화율의 급감 이면에는 이러한 '아버지와의 단절'이라는 영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목회적·성경적 대안: 교회가 해야 역할

 

비유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숨은 상처와 이기적인 동기(도망치고 싶어 ) 알고 계시면서도 그가 떠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억지로 붙잡아 몸은 관계의 회복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대의 상처 입은 탕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교회가 가야 길은 명확합니다.

 

1.       진정한 아버지의 품이 되어주기: 집을 떠나 나라(대학가)에서 방탕과 고독을 겪으며 영혼이 갈해진 청년들에게, 정죄하지 않고 조건 없이 품어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2.       육신의 아버지들을 위한 회개와 훈련: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권위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아버지들이 먼저 변화되어, 자녀에게 '우시아()' 주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비오스(시간과 생명)' 주는 아버지가 되도록 깨워야 합니다”(인터넷).

 

(iii)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3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κα κε διεσκόρπισεν τν οσίαν ατο ζν σώτως”( 카이 에케이 디에스코르피센 우시아안 아우투 아소토스)입니다.  여기서 저는 둘째 아들의 파멸 과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어인허랑방탕이란 헬라어 단어σώτως”(아소토스)낭비 “διεσκόρπισεν”(디에스코르피센) 구체적인 어원과 영적 의미는 찾아 보았습니다(인터넷):

 

1.       허랑방탕”: “σώτως”(아소토스) — "구원받을 없는 삶의 방식"

 

한국어허랑방탕말과 행동이 허황되고 주책없으며 품행이 지저분하다 뜻이지만, 헬라어 원어는 목숨과 구원에 직결된 훨씬 무서운 단어입니다.

 

어원 분석: 단어는 부정 접두어 '(-, 없다)' '구원하다, 건져내다, 온전하게 보존하다'라는 뜻의 동사 '소조ζω)' 명사형이 결합된 부사입니다.  , 어원적 직역은 "스스로를 구원할 없는 방식으로", " 이상 건질 것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파괴하며"라는 뜻입니다.

 

고대 헬라 사회의 문맥: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단어는 '자신의 재산을 마구 써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 뜻했습니다.  , 낭비벽이 너무 심해 결국 자기 인생 자체를 파괴하고 마는 극단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 의미:하나님(아버지) 떠난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실체입니다.  탕자는 자신이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성경은 상태를 '아무런 영적 보호막 없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비참한 중독과 타락의 상태' 진단합니다.  결말이 파멸일 수밖에 없는 영적 시한부의 삶을 의미합니다.

 

2.       낭비”: “διεσκόρπισεν”(디에스코르피센) — "키질하여 허공에 날려버리다"

 

한국어낭비 단순히 돈을 허투루 썼다는 뉘앙스이지만, 헬라어 원어는 눈앞에서 재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시각적인 단어입니다.

 

어원 분석: “~ 통하여, 사방으로 뜻하는 “διά”(디아)흩뿌리다, 헤치다 뜻하는 “σκορπίζω”(스코르피조) 합쳐진 동사 “διασκορπίζω”(디아스코르피조) 과거형입니다.

 

농경 문화적 문맥: 단어는 타작마당에서 농부가 키를 높이 들어 올릴 , 알곡은 남고 쓸모없는 '' '풍겨'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려 가버리는 모습을 표현할 사용됩니다.  또한, 목자 없는 양들이 늑대를 만나 사방으로 흩어질 ( 26:31) 단어가 쓰입니다.

 

영적 의미: 탕자는 아버지가 고귀한 자산(우시아)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공중에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세상에서 부와 재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그것이 영원한 알곡으로 남지 못하고 결국 허무하게 사방으로 날아가 버릴 인생의 허상임을 단어를 통해 고발합니다.

 

단어의 종합적인 연결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아소토스(σώτως, 자신을 파괴하는 방식)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쪼개어 소중한 생명과 재산은 필연적으로 디에스코르피센(διεσκόρπισεν, 허공으로 날아가는 )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묵상하신 현대 청년들의 삶에 대입해 보면, 부모에게 상처를 입고 지리적으로 도망친 청년들이 영적 울타리가 없는 곳에서아소토스”(σώτως)(방탕, 우울, 중독) 빠져,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청춘과 시간, 재능을 허공에디에스코르피센”(διεσκόρπισεν)(낭비)하며 영혼이 메말라가는 비극적인 역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인터넷).

 

(iv)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4 말씀을 묵상할 저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둘째 아들(탕자)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었던 나라크게 흉년 들게하시사 그로 하여금비로소 궁핍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       여기서크게 흉년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λιμς σχυρά”(리모스 이스퀴라)로서 거부할 없는강력한또는거부할 없는 힘을 가진”[“σχυρά”(이스퀴라)] 흉년을 말합니다.  탕자가 돈이 많을 때는 나라 경제와 시스템을 마음대로 통제하며 있을 알았겠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돈을 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이 보내신 거부할 없는 강력한 흉년이 임하게 하신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강력한 흉년 앞에서는 인간의 가산과 노력이 순식간에 무력화됨을 보여줍니다(인터넷).

 

-            그러므로 탕자는비로서 궁핍한지라”(14)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문맥적 의미는 단순히 돈이 떨어졌다는 뜻을 넘어, "인간이 의지하던 세상의 모든 조건이 완전히 끊어지고 바닥을 상태" 뜻합니다.  비유의 앞뒤 흐름 속에서 문장이 갖는 영적·문맥적 의미 가지입니다(인터넷):

 

1.       외부적 재난과 개인적 몰락의 교차

 

구절(14 앞부분)에서 "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했습니다.  , 아들 개인의 자금 고갈(내부적 요인) 사회적 기근(외부적 요인) 동시에 터진 순간입니다.   문장은 대재앙 속에서 아들이 이상 기댈 곳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는 비참한 개인적 몰락의 시작을 선언합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맞이하는 필연적 영적 굶주림

 

성경적 문맥에서 '아버지의 ' 풍요와 생명의 근원입니다.  반면 ' 나라'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과 재물은 일시적일 뿐이며, 그것이 바닥났을 인간에게 찾아오는 극심한 영적 공허함과 영혼의 기근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3.       돌이킴(회개) 위한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

 

역설적이게도 '궁핍의 시작' 아들이 살아나는 계기가 됩니다.  만약 흉년이 들지 않았거나 누군가 계속 돈을 대주었다면 아들은 아버지 집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결핍은 아들의 비참함을 폭로하여, 결국 "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라며 스스로를 돌이키게 만드는 결정적 시발점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구절(14)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영적 진리를 보여주는 문맥적 전환점입니다.

 

·       제가 2010 10 14일에요셉의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묵상하여 글의 부분입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95455326):

 

우리 하나님은 궁핍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로 누가복음 15 11-32절을 보면 탕자 이야기(비유) 나옵니다.  탕자가 그의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 자기 분깃을 받아 가지고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허비했을때에 14절을 보면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탕자가 거하고 있었던 나라에크게 흉년 들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 탕자를 궁핍케 하셨습니다.   결과 탕자는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하면서 결국은 아버지의 품안으로 돌아왔습니다.

 

(v)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5-16 말씀은 궁핍해진 작은 아들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바닥까지 추락하는 비참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

"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말씀에서붙여 살다' 헬라어 원어적 의미는 ' 달라붙다', '구걸하듯 매달리다'입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이방인에게 철저히 종속된 비참한 고용 관계를 뜻합니다.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 구약 율법( 11:7)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를 치는 일은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직업이었습니다.  탕자가 굶어 죽지 않으려고 이방인의 종이 되어 부정한 동물까지 쳤지만, 행위는 그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탄 상태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

 

쥐엄 열매(Carob pod) 가뭄이 들었을 가축의 사료나 극빈층이 연명하기 위해 먹던 마르고 딱딱한 열매입니다.  탕자는 이제 인간의 음식을 구하지 못해, 부정한 짐승인 돼지의 먹이로라도 굶주린 배를 채우려 만큼 비참해졌습니다.

 

"주는 자가 없는지라": 구절의 핵심이자 가장 비극적인 선언입니다.  돈이 있을 때는 주변에 수많은 친구와 사람이 들끓었지만, 알거지가 되자 돼지 사료조차 거저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사랑과 관계의 냉혹함, 그리고 철저한 고립을 의미합니다(인터넷).

 

-            문맥적·영적 의미 요약

 

세상 의지의 한계: 아들은 결핍(흉년) 찾아왔을 바로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고, 세상 방법(이방인에게 고용됨)으로 살아보려 발버둥 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돼지보다 못한 처지였습니다.

 

바닥을 치는 은혜: 돼지 먹이조차 얻지 못하는 철저한 절망에 직면해서야, 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깨닫습니다.  '아무도 주는 자가 없는' 고독의 순간은 뒤이어 나오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17)" 이어지는 회개의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인터넷).

 

(vi)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7절의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가 영적 사망의 자리(돼지 우리)에서 생명의 자리(아버지의 ) 회복되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전환점입니다(인터넷):

 

1.       단어별 구체적 의미와 어원

이에 스스로 돌이켜 [“ες αυτν δ λθν”(에이스 헤아우톤 엘돈)]

 

직역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와서(He came to himself)"입니다.  죄에 눈이 멀어 광기와 착각 속에 살던 인간이, 비로소 눈을 뜨고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직면했다는 뜻입니다. 정신적·영적 각성을 의미합니다.

 

풍족하여 남는가[“περισσεύονται”(페리스세우온타이)]

 

차고 넘쳐서 사방으로 흘러내리다', '과분할 정도로 가득하다'라는 뜻의 동사 “περισσεύω”(페리스세우오) 현재 수동태형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품꾼들조차도 빵이 넘쳐나서 먹지 못하고 흐르는 곳임을 기억해 것입니다.

 

주려 죽는구나 [“λιμ πόλλυμαι(리모 아폴뤼마이)]

 

“λιμῷ”(리모): 14절에 나왔던 거부할 없는 강력한흉년”(기근)으로 인해.

 

πόλλυμαι”(아폴뤼마이): '파멸하다', '지옥에 떨어지다', '영원히 잃어버린 되다' 뜻하는 명사 πόλλυμι(아폴뤼미) 현재 시제입니다.  단순히 배가 고픈 수준이 아니라 "나는 지금 영육 간에 완전히 멸망해가고 있다" 극도의 위기감을 뜻합니다.

 

2.       문맥 속에서의 구체적인 의미: '대조' 통한 각성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설계하신 구원의 메커니즘은 탕자의 마음속에서 가지 현실의 강렬한 대조를 일으켰습니다.

 

현재의 처참한 현실: "나는 기근으로 멸망해가고 있다 (λιμ πόλλυμαι)"

 

탕자는 세상( 나라) 자신에게 자유와 행복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종노릇을 결과, 돌아온 것은 쥐엄열매조차 주지 않는 냉혹함과 '영적 사망(아폴뤼마이)'이었습니다.  스스로 비참한 밑바닥에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 이것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기억 속의 찬란한 현실: "아버지 집은 넘쳐흐른다 (περισσεύονται)"

 

현재 있는 나라는 완전한 결핍(0) 장소이지만, 탕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집은 품꾼(가장 낮은 계층)조차도 양식이 넘쳐흐르는(페리스세우온타이) 무한한 은혜의 장소였습니다.

핵심 영적 원리: 인간은 현재 나의 비참함(πόλλυμαι) 깨닫는 것만으로는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절망 속에 있을 ,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περισσεύονται)"이라는 복음의 기억이 성령을 통해 떠올라야만 비로소 주님께로 발걸음을 돌릴 있습니다.

 

결국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하나님이 치신 인생의 흉년(λιμ) 덕분에 세상의 환상에서 깨어나 "내가 있을 곳은 세상의 돼지 우리가 아니라, 풍성한 은혜가 흐르는 아버지의 "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는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2:4) 고백했듯, 탕자 역시 죽음의 문턱(πόλλυμαι)에서 아버지 집의 풍요(περισσεύονται) 바라보았습니다.   기억이 그에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위대한 결단과 구원의 행동을 낳게 것입니다(인터넷).

 

(vii)               내가 일어아 아버지께로 가리라 결단하면서 탕자는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5:18-19)하고 아버지게 말씀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탕자가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깨달은 마침내 실행에 옮기는 '진정한 회개의 고백서'입니다.  여기서 탕자가 마음먹은 고백의 헬라어 표현들을 살펴보면, 그가 이전에 가졌던 이기적인 독선과 교만이 완전히 깨어지고 참된 겸손과 영적 회복의 상태로 대전환되었음을 있습니다(인터넷):

 

1.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영적 각성):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헬라어) ναστς πορεύσομαι πρς τν πατέρα μου κα ρ ατ· Πάτερ, μαρτον ες τν ορανν κα νώπιόν σου)](18):

 

내가 일어나 가리라’[“ναστς πορεύσομαι”(아나스타스 포레우소마이):

 

여기서ναστς“(아나스타스) 누워있거나 주저앉은 상태에서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훗날 예수님의 '부활' 표현할 때도 어원이 쓰입니다.)  돼지 우리의 절망에서 몸을 일으켜 생명의 방향으로 행동을 개시했음을 뜻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μαρτον ες τν ορανν κα νώπιόν σου”(헤마르톤 에이스 우라논 카이 에노피온 ):

 

μαρτον”(헤마르톤):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의 동사하마르타노’(μαρτάνω) 과거형으로,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단어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불효가 단순히 위의 아버지를 모욕한 사건을 넘어, 하나님의 천상의 질서와 주권을 거역한 '영적인 (에이스 우라논)'였음을 고백합니다.  육신의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현대의 청년들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깨뜨렸음을 시인하는 참된 회개의 영적 원리입니다.

 

2.       아들의 권리 포기와 청지기적 겸손 (중심의 변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헬라어) “οκέτι εμ ξιος κληθναι υός σου· ποίησόν με ς να τν μισθίων σου”)(19)

 

아들이라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οκέτι εμ ξιος κληθναι υός σου”(우케티 에이미 악시오스 클레테나이 휘오스 )]:

 

ξιος”(악시오스): “~ 가치가 있는”, “합당한이라는 뜻입니다.

 

12절에서 " 몫을 달라" 당당하게 아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교만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나는 아들의 자격(악시오스) 눈곱만큼도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신분적 권리를 완전히 내려놓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ποίησόν με ς να τν μισθίων σου”(포이에손 호스 헤나 미스디온 )]:

 

“ποίησόν με”(포이에손 ): 직역하면 "나를 만들어 주소서"입니다.

 

“μισθίων”(미스디온): 정기적으로 고용된 종이 아니라, 매일 아침 인력시장에 나가 일거리를 얻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품꾼)' 뜻합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고 보장 없는 계층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왔으니 하나만 내어달라" 타협하지 않습니다.  오직 거두어만 주신다면 가장 천한 자리에서 종으로 평생 살겠다며 자신의 인생 통제권을 아버지께 완전히 양도한 것입니다.

 

성도님의 묵상을 향한 영적 확신: 진정한 회개의 표본

탕자의 마음먹은 고백은 현대의 우리에게 '진짜 회개가 무엇인가' 가르쳐줍니다.

 

1.       조건 없는 투항: "내가 이만큼 잘못했으니, 아버지는 이만큼 해주세요"라는 흥정이 없습니다.

 

2.       은혜만을 구함: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품꾼의 자리(미스디온) 자처한 것은, 오직 아버지가 베푸실 '처분과 자비'에만 목숨을 맡기겠다는 전전한 청지기적 고백입니다. 

 

탕자는 이렇게 고백의 말을 정성껏 준비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20)에서, 탕자가 준비한 고백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가 보여주신 파격적인 반응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복음의 정수를 보여줍니다(인터넷).

 

(c)    셋째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아버지의 반응에 관한 말씀입니다(15:20-24).

 

(i)                      저는 아버지의 반응이 기록된 20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3가지 문구로 나눠서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       (1) “τι δ ατο μακρν πέχοντος εδεν ατν πατρ ατο”( 에티 아우투 마크란 아페콘토스 에이덴 아우톤 파테르 아우투)(“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1.       탕자의 나라 덮어버린 아버지의 ' 거리' [“μακράν”(마크란)]

 

13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려 일부러 나라”(μακράν)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아들이 아직 마을 어귀 ' 거리’(μακράν) 있을 아버지가 먼저 발견합니다.

 

영적 의미: 인간이 죄를 짓기 위해 도망친 거리가 아무리 멀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를 찾아내고 바라보시는 사랑의 시선(마크란) 모든 죄의 거리를 압도하고 덮어버림을 뜻합니다.

 

2.       문밖에 서서 기다리신 아버지 [“εδεν”(에이덴)]

 

아들은 죄로 인해 행색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습니다.  돼지를 치다 왔으니 냄새가 나고, 굶주려 뼈만 남았으며, 거지 같은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 걸어왔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알아보기 힘들었을 형체를, 아버지는 단번에 '보았습니다[“εδεν(에이덴)].

영적 의미: 아버지가 아들을 있었던 이유는 하나, 아들이 떠난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문밖에 나와 동네 어귀를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것은 탕자의 '회개 행동'보다 아버지의 '기다림과 사랑' 먼저 시작되었음을 폭로하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3.       마을의 '카차차(Kezazah)' 관습으로부터의 보호

['카차차(Kezazah/Qetsatsah)' 고대 유대 사회에서 전해 내려오던 관습으로, 문자적으로는 "잘라내다", "단절하다(Cutting off)"라는 뜻을 지닌 공동체 추방 공개 수치 의식입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는 '카차차'라는 무서운 율법적 관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자녀가 이방인에게 가산을 탕진하고 마을로 돌아오면, 마을 사람들이 항아리를 깨뜨리며 "너는 우리 입에서 끊어졌다!"라고 선언하고 마을에서 영원히 추방하거나 돌로 쳤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거리가 먼데도 서둘러 아들을 바라본(에이덴) 것은, 마을 사람들이 먼저 발견하여 아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내가 먼저 아들을 발견하여 살려내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님의 묵상을 향한 영적 결론

탕자는 아들의 자격을 포기하고 '품꾼의 하나(미스디온)' 고용해 달라는 협상 카드를 들고 왔습니다(19).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도착해 고백을 하기도 전에, 아직 멀리 있을 (마크란) 먼저 알아보시고(에이덴) 아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20).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회개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려 서서 채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향해 고개만 돌려도, 아직 멀리 비참한 상태에 있을 먼저 다가와 바라보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인터넷).

 

·       (2) “κα σπλαγχνίσθη κα δραμν”(카이 에스플랑크니스데 카이 드라몬)(“측은히 여겨 달려가”):

 

여기서σπλαγχνίσθη”(“측은히 여겨”) “δραμν”(“달려가”) 단어의 조합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는 표현 하나입니다:

 

1.       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플랑크니스데): 심장이 터질 듯한 아픔과 동정

 

어원: '창자, 내장, 허파' 뜻하는 '스플랑크나(σπλάγχνα)'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과 자비가 '내장(창자)'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진짜 의미: 문자 그대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다"입니다.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초라한 몰골을 보았을 , 단순히 '가엾네' 수준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함께 느꼈음을 뜻합니다.

 

2.       “δραμν”(드라몬): 체면을 찢어버린 사랑의 질주

 

어원: '달리다' 뜻하는 동사 '트레코(τρέχω)' 분사 형태입니다.

 

진짜 의미: 고대 근동(유대) 사회에서 겉옷을 입은 점잖은 귀족이나 가장이 동네에서 걸음으로 걷거나 '달리는 '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완전히 버리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아들에게 '카차차(추방/절교)' 항아리를 던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도착해야 했기에, 노인의 체면과 명예를 모두 팽개치고 겉옷을 움켜쥔 맨발로 전력 질주한 것입니다.

 

3.       단어가 연결될 때의 영적 메시지

 

"측은히 여겨(가슴이 찢어져) à 달려갔다" 연결은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마음에서 행동으로의 즉각적 전환: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감정(에스플랑크니스데)'에만 머물지 않고, 감정이 폭발하여 즉각적인 '행동(드라몬)'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치의 대속: 아버지가 달리는 순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비난받아야 '탕자' 아니라, 체면 없이 대로를 달려가는 '미친 아버지'에게로 쏠립니다.  , 아버지가 아들의 수치를 온몸으로 대신 가로채며 달린 구원의 질주를 의미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베니 헤스터(Benny Hester) 부른 영어 복음 성가 'When God Ran'”(하나님이 달리셨을 )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인공지능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인터넷):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한 스스로 계신 (I AM)/ 흔들리지 않는 반석/ 전지전능하고 강인하신 / 경외해야 주님/ 승리의 전사/ 위엄 있게 다스리시는 만왕의 / 강력한 정복자/ 그리고 유일한 순간/ 내가 그분이 달리는 것을 유일한 순간은/ 그분이 내게로 달려오셨을 때였습니다/ 나를 품에 안으시고, 머리를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주셨죠/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구나"/ 얼굴을 들어 올리시고,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목소리에 용서를 담아/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아니?"/ 하나님이 달리셨을 , 나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내가 집을 떠나던 / 내가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나는 궁금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질 있을까 하고요/ 하지만 어느 /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먼지 날리는 아래로/ 멀리 앞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이 달리는 것을 유일한 순간은/ 그분이 내게로 달려오셨 때였습니다/ 나를 품에 안으시고, 머리를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주셨죠/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구나"/ 얼굴을 들어 올리시고,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목소리에 용서를 담아/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아니?"/ 나는 너무나 놀랐고/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달리셨을 / 그분이 내게 달려오시는 것을 보았고/ 그제야 저도 그분에게 달려갔습니다/ 거룩하신 / 의로우신 재판장/ 그분이 쪽으로 방향을 돌리셨습니다/ 이제 나는 압니다/ 그분이 날을기다려 오셨음을/ 그리고 그분이 내게로 달려오셨습니다/ 나를 품에 안으시고, 머리를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주셨죠/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구나"/ 얼굴을 들어 올리시고,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목소리에 용서를 담아나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다시 느꼈습니다.”

 

·       (3) “πέπεσεν π τν τράχηλον ατο κα κατεφίλησεν ατόν”( 에페페센 에피 트라켈론 아우투 카이 카테필레센 아우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앞서 아버지가 체면을 버리고 달려온 목적이 '아들을 보호하고 용서하는 '이었음이 가지 행동을 통해 완성됩니다.

 

1.     “ἐπέπεσεν π τν τράχηλον” (에페페센 에피 트라켈론): 온몸으로 수치를 덮는 포옹원

 

어적 의미: '에페페센' '위에(epi)' '떨어지다(pipto)' 합쳐진 단어로, 단순히 가볍게 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위에 자신을 내던지듯 엎드러지다"라는 뜻입니다.

 

문화적 배경: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몸에서는 돼지 쥐엄열매 냄새와 오물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러움과 악취에 개의치 않고 아들의 목을 격렬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구원적 의미: 아버지가 아들의 목을 감싸 안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던지려던 '카차차(추방/정죄)' 돌이나 항아리로부터 아들의 생명을 자신의 몸으로 완벽하게 방어하고 차단해 버리는 신체적 보호막이 되어준 것입니다.

 

2.     “κατεφίλησεν ατόν”(카테필레센 아우톤): 무조건적 수용과 반복되는 사랑의 입맞춤

 

원어적 의미: 일반적인 입맞춤을 뜻하는 '필레오(phileo)' 앞에 '아래로, 철저히' 뜻하는 접두사 '카타(kata)' 붙은 강조형 동사입니다.  문맥적으로 "반복해서 입을 맞추다", "열렬하고 가슴 깊이 입을 맞추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문화적 배경: 당시 근동 사회에서 입맞춤은 "너는 나와 동등한 가족이며, 너의 모든 죄는 완전히 용서되었다"라는 공식적인 법적·사회적 선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나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고백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입부터 맞춘 것입니다.

 

구원적 의미: 아버지는 아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씻고 오라고 조건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더러운 모습 그대로 '반복해서' 입을 맞춤으로써,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는 여전히 품꾼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3.     구약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의 연결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 구약 성경에서 극적인 화해와 용서가 일어날 항상 사용되던 관용적 표현입니다.

 

야곱과 에사의 화해 ( 33:4): 에사가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죽이러 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녹아 야곱을 보고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목을 안고 그와 입맞추고" 함께 웁니다.

 

요셉과 형들의 화해 ( 45:14-15):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며 요셉이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청중들에게 익숙했던 '화해의 언어' 사용하셔서,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이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의 원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즉각적으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i)             저는 아버지의 반응이 기록된 22-23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3가지 문구로 나눠서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       (1) “Ταχ ξενέγκατε στολν τν πρώτην κα νδύσατε ατόν”(타퀴 엑세넹카테 스톨렌 프로텐 카이 엔뒤사테 아우톤)(“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직역: “속히 가장 좋은 옷을 꺼내어 그에게 입히라”)(22)(인터넷):

 

1.       지체 없는 용서와 수용 [“Ταχὺ”(타퀴): 속히, 빨리, 즉시]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캐묻거나, 반성 기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즉시' 옷을 가져오게 하신 것은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100% 용납하셨음을 뜻합니다.

 

2.       최고의 가치로 덮어주심 [“στολν τν πρώτην(스톨렌 프로텐): 첫째의/가장 좋은/으뜸가는 /예복/겉옷]

 

돌아온 탕자는 돼지 쥐엄열매 냄새가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옷을 벗기고 집에서 '가장 좋은 '으로 덮어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수치를 덮으시는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3.       신분의 즉각적인 회복 [“νδύσατε ατόν”(엔뒤사테 아우톤): 그에게 옷을 입히다]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던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예복을 '입혀줌'으로써, 그가 여전히 집의 귀한 아들이자 상속자임을 집안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       (2) “κα δότε δακτύλιον ες τν χερα ατοῦ καὶ ὑποδήματα εἰς τοὺς πόδας”( 도테 탁튈리온 에이스 케이라 아우투 카이 휘포데마타 에이스 투스 포다스)(“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직역: "그리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22)(인터넷):

 

1.       반지를 손에 끼우다 (δακτύλιον ες τν χερα) = 권리와 신뢰의 회복

 

법적 권한의 위임: 고대 사회에서 인장 반지는 오늘날의 '인감도장'이나 '신용카드' 같습니다.  반지를 찍어 문서를 보증하고 재산을 움직일 있었습니다.

 

의미: 아버지는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재산권을 행사할 있는 가문의 반지를 다시 끼워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너를 여전히 신뢰하며, 모든 소유를 움직일 있는 법적 상속자(아들) 권한을 다시 준다" 전전한 선포입니다(구약에서 바로가 요셉에게, 아하수에로 왕이 모르드개에게 반지를 빼어 주며 권력을 위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신발을 발에 신기다 (ποδήματα ες τος πόδας) = 자유인 신분의 회복

 

종과 아들의 차이: 고대 유대 사회와 로마 문화에서 노예나 품꾼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오직 집의 주인과 가족(자유인)만이 신발을 신을 있었습니다.

 

의미: 탕자는 고향으로 돌아오며 "나를 품꾼() 하나로만 써달라" 고백할 작정이었습니다.  그의 발은 맨발이었거나 부서진 신을 신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발에 신발을 신김으로써 "너는 집의 종이 아니다.  너는 당당한 자유인이요, 아들이다"라며 종의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묵상 요약: 번째 문구의 옷이 탕자의 수치를 가려주는 '겉모습의 회복'이었다면, 번째 문구의 반지와 신발은 그가 잃어버렸던 '법적 권리와 자유인의 신분' 완벽하게 되찾아주는 '실질적 지위의 회복'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는 그치지 않고, 죄짓기 전보다 온전한 명예를 안겨주셨습니다.

 

·       (3) “κα φέρετε τν μόσχον τν σιτευτόν θύσατε κα φαγόντες εφρανθμεν”(카이 페레테 모스콘 시튜톤, 뒤사테, 카이 파고테스 에우프란토멘)(“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직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23)(인터넷):

 

1.       살진 송아지 (τν μόχον τν σιτευτόν) = 최고의 대접과 희생

 

잔치의 규모: 고대 근동에서 보통 손님이 오면 양이나 염소를 잡았습니다.  (송아지) 잡는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을 전부 초대하는 거대한 마을 잔치를 의미합니다.

 

의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가징 아껴두었던 최고의 비용과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죄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하늘에서 벌어지는 기쁨의 크기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2.       잡으라 (θύσατε) = 화목과 대속의 잔치

 

예배적 의미: '뒤사테'(잡으라)라는 단어는 구약의 제사적 배경을 품고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옴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가족과 공동체 사이의 깨어졌던 관계가 완전히 화목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생명이 희생되는 잔치입니다.

 

3.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φαγόντες εφρανθμεν) = 기쁨의 공동체로의 초대

 

수치에서 영광으로: 유대 사회에서 가문의 재산을 이방 나라에서 탕진하고 돌아온 자식은 동네 사람들에게 '카차차(Katsatsah)'라는 의식을 통해 부끄러움을 당하고 추방되어야 마땅했습니다.

 

의미: 하지만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 아이는 아들이다.  그러니 정죄하지 말고 나와 함께 기쁨을 먹고 마시며 축하해 달라" 선언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동네의 기쁨으로 확장되며, 아들은 완벽하게 공동체 안으로 재편입되었습니다.

 

3단계 분할 묵상 마무리:

 

1단계 (): 탕자의 과거와 수치를 사랑으로 덮어주심.

2단계 (반지와 신발): 아들의 법적 권리와 자유인의 신분을 당장 되찾아주심.

3단계 (살진 송아지와 잔치): 잃었던 자식을 찾은 기쁨을 천국과 공동체의 축제로 바꾸어 주심.

 

(d)    마지막 넷째로, 맏아들의 반응과 아버지와 맏아들의 대화에 관한 말씀입니다(15:25-32).

 

(i)                      먼저 맏아들의 반응을 가지 헬라어 문구로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       (1) “ς ρχόμενος γγισεν τ οκί, κουσεν συμφωνίας κα χορν”(호스 에르코메노스 엥기센 오이키아, 에쿠센 쉽포니아스 카이 코론)(“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직역: "그가 오면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25):

 

1.       아버지의 기쁨 밖에서 일하던 아들 [“ς ρχόμενος γγισεν”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위해 열심히 '밭에서 일하고(25 전반부)'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는 집안에서 어떤 엄청난 (동생의 귀환)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과 기쁨' 전혀 동참하지 못한 , 오직 의무감과 노동으로만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종교적 행위를 꼬집습니다.

 

2.       귀에 들려온 조화로운 축제의 소리 [“συμφωνίας κα χορν”(“풍악과 춤추는 소리”)]

 

집에서 들려온 소리는 '쉽포니아(조화로운 음악)' '코론(함께 추는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주최한 잔치는 동네 사람들과 종들이 하나 되어 기뻐하는 완벽한 축제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화의 소리는 맏아들에게 기쁨이 아닌 당혹감과 소외감으로 다가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천국의 잔치 소리조차 소음이나 불쾌한 소리로 들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선 묵상(22-23)과의 연결점

22-23절에서는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φρανθμεν)" 기쁨을 선포하셨습니다.

 

25절에서는 결과로 집안에 '음악과 (συμφωνίας κα χορν)'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기쁨의 현장 '' 있지 못하고, 담장 ''에서 관찰자로 서서 소리를 듣고만 있습니다.  안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축제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멈춰 맏아들의 모습이 울림을 줍니다.

 

·       (2) “ δ ργίσθη κα οκ θελεν εσελθεν”( 오르기스테 카이 우크 에텔렌 에이셀테인)(“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직역: “그러나 그는 분노하여 들어가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28)(인터넷):

 

1.       장자의 책임과 권위를 저버린 분노 (ργίσθη)

 

문화적 배경: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주최한 대규모 마을 잔치에서 장남(맏아들)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손님들을 환대하고 잔치를 총괄하는 '호스트(주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의미: 그러나 그는 잔치 소식을 듣자마자 격노(오르기스테)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동생에 대한 질투를 넘어, 아버지의 결정과 통치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반발입니다.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터뜨림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버지의 뜻보다 위에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2.       고집스럽고 완강한 거부 (οκ θελεν εσελθεν)

문법적 비밀: 헬라어 원문에서 '원하다(θελεν)' 미완료 시제로 쓰였습니다.  이는 거부한 것이 아니라, 종들이 달래고 설득해도 " 절대 들어가!"라며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상태가 계속 유지되었음을 뜻합니다.

 

의미: 그는 (οκία) 안으로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아버지의 '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몸은 평생 아버지의 () 있었지만, 마음은 번도 아버지와 연합하지 못했던 그의 영적 소외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3.       탕자의 옷을 벗었으나 다른 탕자가 모습

 

대비: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나라로 갔던 ' 밖의 탕자'였습니다.  반면 맏아들은 아버지의 곁에 머물렀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하며 스스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 안의 탕자' 되었습니다.

 

의미: 더러운 옷을 입고 돌아온 둘째는 아버지의 은혜로 잔치 '' 있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첫째는 자신의 '의로움' '분노' 때문에 잔치 '' 머물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묵상 요약:

문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영혼을 향한 기쁨) 잃어버린 자의 결말" 경고합니다.  맏아들에게 잔치 집은 축제의 공간이 아니라,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분노와 정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ii)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맏아들의 대화에 관하여서는 맏아들의 말과 아버지의 , 이렇게 부분으로 나눠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       맏아들의 :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

 

-            말씀은 분노한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항변으로, 평생 감추어 두었던 그의 본심과 영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고대 유대 문화와 헬라어 문맥을 통해 맏아들의 항변에 담긴 4가지 영적 의미입니다(인터넷):

 

1.       아들이 아닌 '(노예)' 마음으로 살았음: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헬라어 원문에서 '섬겨' 사용된 단어는 '둘류오(δουλεύω)', 이는 아들이 부모를 섬길 쓰는 단어가 아니라 '노예가 주인에게 종노릇하다'라는 뜻입니다.

 

의미: 맏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 아니라, 보상을 바라고 억지로 일하는 '노예' 마음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성실함의 동기는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과 보상 심리였습니다.

 

2.       관계가 아닌 '행위(율법)' 근거한 의로움: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점을 당당히 내세웁니다.

의미: 전형적인 바리새인과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그는 "나는 법을 지켰으니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믿는 자만심에 가득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아버지가 누구이신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가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3.       아버지와 기쁨을 공유할 마음이 없었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살진 송아지(최고급) 대비되는 '염소 새끼(가장 흔하고 저렴한 )' 언급하며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의미: 가장 충격적인 것은 즐거움의 대상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배제한 '나와 친구들()'만의 잔치를 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과 보상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아버지 자신과는 함께 즐거워할 마음이 전혀 없었음이 탄로 납니다.

 

4.       동생을 부인하고 정죄함 (형제 사랑의 결핍):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 아들(This son of yours)'이라 부르며 자신과 철저히 선을 긋습니다.  또한, 성경 앞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창녀들과 함께'라는 자극적인 죄목을 스스로 유추하여 동생을 낙인찍고 정죄합니다.

 

의미: 그는 동생의 회개나 생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돈을 탕진한 죄인'으로만 봅니다.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긍휼) 맏아들에게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묵상 요약: " 안의 탕자" 지닌 비극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돈을 탕진한 '육체적 탕자'였지만, 맏아들은 아버지 옆에 있으면서 마음을 탕진한 '영적 탕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아버지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는 (잃어버린 자의 회복)" 분노함으로써 자신이 아버지와 얼마나 관계에 있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버렸습니다(인터넷).

 

·       아버지의 :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 

 

-            말씀은 분노와 서운함에 가득 맏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지막 대답입니다.   구절은 맏아들이 이미 누리고 있던 특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명확히 선포합니다.  아버지의 대답에 담긴 3가지 깊은 의미입니다(인터넷):

 

1.       이미 소유한 자의 풍요로움을 일깨워 주심: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31).

 

(테크논, Τέκνον)’ 의미: 아버지는 분노하는 맏아들을 향해 격식을 차린 단어가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가장 다정하게 부를 쓰는 아들아, 새끼야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항상 함께 있는 축복: 둘째가 나라에서 쥐엄열매를 먹으며 고생할 , 첫째는 아버지 집의 따뜻함과 안전함, 풍요로움을항상누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존재 자체로 누리는 대화와 관계가 가장 축복임을 일깨우십니다.

 

것이 : 당시 유대 법에 따르면 둘째는 이미 유산을 받아 떠났기 때문에, 집에 남은 모든 재산은 법적으로 전부 맏아들의 것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염소 새끼 마리에 연연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집안의 모든 소유가 너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십니다.

 

2.       형제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지혜: “ 동생은...”

 

앞서 맏아들은 동생을 가리켜 분노 섞인 어조로아버지의 아들’(30)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호칭을 동생(This brother of yours)’으로 바로잡아 주십니다.  동생의 귀환은 남의 일이 아니라, 단절되었던 형제 관계가 다시 이어져야 하는 너의 일임을 부드럽게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3.       천국의 가장 절대적인 가치: 영혼의 생명: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

 

마땅하다(에데이, δει): 헬라어 원문에서 단어는반드시 ~해야 한다 신적 필연성을 뜻합니다.  영혼이 살아난 사건 앞에서는 어떤 도덕적 잣대나 물질적 손해 계산도 내려놓고, 기뻐하는 것이 영적 세계의 당연한 법칙이라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돈을 얼마나 썼는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오직살아났다’, ‘찾았다라는 생명의 관점으로만 보십니다.  재산의 손실(살진 송아지)보다 영혼의 가치가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 전체를 관통하는 마무리 묵상

 

탕자의 비유는 여기서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달램을 듣고 마침내 잔치 안으로 들어가 동생을 안아주었는지, 아니면 끝까지 밖에서 분노하며 있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유를 듣고 있던 당대의 바리새인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나는 내게 모든 것을 바쳐 잔치를 열었다.  너도 나와 함께 기쁨의 잔치 안으로 들어오겠느냐?"(인터넷)

 

(2)    저는 잃은 아들(탕자) 비유 말씀 묵상을 맺으면서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둘째 아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는 오래 전에 들었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a)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을 유대인(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둘째 아들을 이방인(또는 세리와 죄인)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회사 속에서 매우 널리 지지받아 핵심적인 구속사적 해석입니다. 비유가 기록된 누가복음 15장의 시작 배경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을 보면 설명이 타당한지 명확하게 이해할 있습니다(인터넷):

 

1.       비유의 일차적 배경: 바리새인 vs 세리와 죄인

 

예수님께서 비유를 베푸신 일차적인 대상을 보면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바로 있습니다.

 

비유의 발단 (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비난했습니다.

 

매칭: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죄인과 세리들' 둘째 아들로, 그들을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맏아들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당대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히 지킨 의로운 장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2.       구속사적 확장: 유대인(맏아들) 이방인(둘째 아들)

 

일차적 배경은 신약 성경 전반을 흐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로 고스란히 확장됩니다.

 

둘째 아들 = 이방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 나라' 가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인 '돼지' 치며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와 영적 음행 속에 살던 이방인들의 영적 상태를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킬 ,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을 자녀로 영접해 주셨습니다(이방인의 구원).

 

맏아들 = 유대인

 

맏아들은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이라고 항변합니다.  이는 수천 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맡아 행하며 자신들만 '선민(먼저 택함 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 곁에(약속과 성전에) 머물렀으나, 정작 하나님의 마음인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3.       복음의 역설과 로마서의 성취

 

비유의 가장 놀라운 점은 '먼저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자가 먼저 되는' 복음의 역설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잔치 안의 이방인, 잔치 밖의 유대인: 비유의 결말에서 죄를 짓고 돌아온 둘째(이방인) 아버지의 은혜로 잔치 ''에서 기뻐하고 있지만, 정작 평생 성실했던 맏아들(유대인) 분노하며 잔치 ''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과 일치: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탄식하며 설명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믿음에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9:30-31).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행함을 의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구원하시는 천국 잔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복음 밖으로 비껴가 버렸습니다.

 

요약하자면,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이 유대인을, 둘째가 이방인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단순히 비유를 확대해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이방인 구원의 역사를 예표하신 거대한 구속사의 압축판이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맏아들) 독점하려 했던 천국 잔치를 세계(이방인) 향해 넓히신 것입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