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시는 분쟁의 목적은
“나”라는 모래 위에 세워진 관계를
허물고,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다시 세우기 위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51-53).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51-53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a) 첫째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 아느냐”(눅12:51상)고 말씀하셨습니다.
(i) 저는 이 첫 번째 말씀을 묵상할 때 오래 전에 자주 불렀던 한국 복음성가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이란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1.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듯
2. 우리 주 사랑 안에 사네 주 우릴 하나로 회복했네 한 집에 사는 우리 형제 자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린 하날세
3. 형제들 하나 안에 살 때 얼마나 좋고도 즐거운가 달콤한 기름 부은 이슬처럼 우리 위에 내리네 생명 호흡 항상 새롭다
(후렴)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돼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돼 하날 세(우리 모두 다) 하날 세(우리 모두다) 하날 세(우리 모두다) 하날 세.
· 2024년 7월 18일에 승리장로교회 원로 목사님이 “영을 따라 행하는 자”란 제목 아래 설교하신 로마서 8장 5-6절 말씀 중에 두 부분입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3517013110):
“성령님의 생각은 화평/평안/평화입니다. 로마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단절된) 상태였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엡2:1,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5:10).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우리는(1절) 이웃과도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평화가 없고 오히려 분쟁과 분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야 합니다.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3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2:14). ‘그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놓은 담을 헐어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원수로 만들었던 계명의 율법을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폐지하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화목하게 하고 또 십자가로 그들의 적개심을 죽이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이방인이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성도들과 똑같은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14-19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으며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고후5:19,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고전7:1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평화롭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마5:9)로서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서 이웃과도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주시길 기원합니다”(김창세).
(ii)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51절 상반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 아느냐”하고 말씀하신 것에 ‘예, 저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신 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마음 속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51절 하반절을 읽으면서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그러면 51절 상반절의 의미가 진정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 그래서 저는 헬라어로 누가복음 12장 51절 상반절을 찾아 읽었을 때 “Δοκεῖτε”(도케이테)(“너희는 … 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의 구체적인 특징과 문맥상 의미입니다(인터넷):
1. 문법적 의미: 동사 '도케오'(δοκέω)의 2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상대방의 생각이나 판단을 묻는 질문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2. 문맥적 배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가 오면 즉각적인 지상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통념을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
3. 의도: 이어지는 구절인 51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시며, 복음이 전파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영적 갈등과 선택의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지적인 추측을 넘어, 청중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잘못된 기대나 선입견을 깨뜨리려는 강한 부정적 의문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인터넷).
- 그러면 그 당시 유대인 청중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잘못된 기대와 선입견은 무엇이었을까요? 크게 네 가지 측면으로 요약한 것입니다(인터넷):
1. 정치적·군사적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전복: 당시 세계 질서를 지배하던 로마의 평화 체제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중심의 새로운 패권 국가를 세우는 것을 의미함]: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군사적 영웅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아적 기대: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Political Freedom). 그들이 생각한 '평화'는 이스라엘이 다시 강대국이 되어 외세의 침략이 없는 정치적인 평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로마와의 전쟁이 아닌, 죄와의 영적 전쟁을 하러 오셨기에 그들의 기대와 충돌했습니다.
2. 즉각적인 지상 낙원의 도래
구약 성경(이사야 11장 등)에는 사자와 어린양의 함께 뛰노는 평화로운 나라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자마자 이런 완벽한 물질적·환경적 낙원이 즉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광의 평화가 오기 전에 먼저 심판과 연단(불)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 하셨습니다.
3. 혈연 중심의 무조건적 연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만 하면 메시아의 나라에서 모두가 하나로 묶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을 '결속'시키고 이방인을 '심판'하는 분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전: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질 때 유대인 안에서도,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는 '분리'(“분쟁”)가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4. 갈등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
유대인에게 평화란 단순히 '싸움이나 고통이 없는 편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려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본질적인 평화였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영적 갈등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Δοκεῖτε”[도케이테(너희는 ~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너희는 내가 너희의 입맛에 맞는 안락한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진리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영적인 진영을 나누는 분수령이 되러 왔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던지신 것입니다(인터넷).
(iii)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51절 상번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 첫번째 질문: 그러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기대화 선입견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누가복음 12장 51절의 말씀을 마주하며 가질 수 있는 '잘못된 기대와 선입견'은 당시 유대인들과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비슷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복음 = 만사형통’이라는 기대 (번영 신학적 사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에 불화가 사라지고, 하던 일이 다 잘되며, 심리적인 평안만 가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실제: 예수님은 복음 때문에 오히려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길 수 있고(눅 12:52-53),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평화는 '문제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2. ‘기독교 = 도덕적 교양’이라는 선입견
신앙을 단순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도덕적 태도나 타인과 마찰을 빚지 않는 온건함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실제: 복음은 진리와 비진리를 날카롭게 가르는 분리(Division)의 성격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편함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검'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 ‘값싼 은혜’에 대한 기대
신앙생활을 하면 내 삶의 방식이나 고집을 바꾸지 않고도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나의 '자아'가 깨어지고 하나님께 굴복할 때 오는 것입니다. 나를 바꾸지 않은 채 외부의 환경만 평화로워지길 바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정치적 해방만을 원했던 것과 같습니다.
4. ‘심판 없는 사랑’만 보려는 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다 평화롭게 마무리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입니다.
실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정결하게 하는 심판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참된 평화는 죄에 대한 회개와 심판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한 뒤에 주어집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편안함(Comfort)'을 위한 도구로 기대할 때가 많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Holiness)'을 요구하시며 때로는 우리의 삶을 뒤흔드십니다. 지금 나의 신앙이 '갈등 없는 안락함'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구절입니다”(인터넷).
· 두 번째 질문: 지금 나의 신앙이 '갈등 없는 안락함'만을 구하고 있다면 어쩌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분쟁'(눅12:51-52)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만약 우리의 신앙이 아무런 부딪힘 없이 매끄럽고 안락하기만 하다면, 어쩌면 복음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분쟁'이 지금 우리 신앙에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짜 평화를 깨뜨리는 '거룩한 불편함'
심리학적 위로나 자기만족에 머무는 평화는 환경이 흔들리면 금방 무너집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분쟁'은 내 안의 이기심, 욕망, 세상적인 가치관과 복음이 충돌하게 만듭니다. 이 거룩한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우선순위의 재정립
누가복음 12장 52-53절에서 가족 간의 분쟁을 언급하신 것은,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나 사회적 유대보다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에 두라는 도전입니다. 신앙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 됩니다.
3.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경고
성경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합니다. 갈등 없는 안락함은 때로 영적인 영양실조나 나태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의 방식에 제동을 걸고 고민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4. 죽어야 사는 원리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 내 자아가 예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고 깨어지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자기 분쟁'을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더 깊은 영적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갈등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도케이테(생각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서서, 내가 붙들고 있던 안락함이 혹시 예수님보다 앞서 있지는 않았는지 정직하게 대면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인터넷).
(b) 마지막 둘째로, 예수님은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2:5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i)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을 일으키려고 오셨다(51절하,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 저는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51-53절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쟁”이란 헬라어 단어[“διαμερισμόν”(51절), διαμεμερισμένοι(52절), διαμερισθήσονται(53절)]의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디아메리조(διαμερίζω)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 의미와 문맥적 강조점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기본 의미
어원: '~을 통하여'라는 뜻의 '디아(διά)' + '부분/몫'을 뜻하는 '메로스(μέρος)'
의미: "철저히 나누다", "갈라놓다", "분할하다"
단순히 쪼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완전히 갈라지게 만드는 '철저한 분리'를 뜻합니다.
2. 구절별 의미 분석
51절: διαμερισμόν (디아메리스몬 - 명사)
의미: "분쟁", "나뉘어짐"
역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세상적 평화가 아니라 영적인 '분리표'를 던지기 위함임을 명시합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여 있을 수 없음을 선포하는 단어입니다.
52절: διαμεμερισμένοι (디아메메리스메노이 - 완료 수동태 분사)
의미: "나뉘어 있는 상태"
역할: 헬라어 완료 시제는 과거에 일어난 분리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한 집안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와 거부한 자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영적 간극이 생겨났음을 보여줍니다.
53절: διαμερισθήσονται (디아메리스테손타이 - 미래 수동태 직설법)
의미: "분쟁하게 될 것이다", "갈라설 것이다"
역할: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가족이라는 가장 끈끈한 공동체조차 이 '나뉨'의 영향을 받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부모와 자식, 고부간의 관계가 신앙의 선택에 따라 재편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나뉨'은 곧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신 이유는 복음의 배타성 때문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다: 빛이 오면 어둠과 섞일 수 없듯, 복음은 인간을 '예수 편'과 '세상 편'으로 철저히 나눕니다.
새로운 가족의 정의: 혈연의 결속보다 하나님 나라의 결속이 우선임을 강조합니다.
심판의 과정: 이 '나뉨'은 마지막 때에 있을 양과 염소의 분리를 이 땅에서 미리 보여주는 영적 전조 현상입니다(인터넷).
·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뉨”(“분쟁”)[“διαμερίζω”(디아메리조)]이 가족 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눅12:51-53)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아주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가장 친밀한 곳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됨
가족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유대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필 부모, 자식, 시어머니, 며느리를 언급하신 이유는, 복음의 영향력이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사랑과 결속력마저도 뛰어넘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의미: 복음은 적당히 타협해서 가족의 화목을 유지하는 '윤리'가 아니라, 생사가 걸린 '진리'의 문제입니다.
2.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도전
당시 유대 사회와 고대 근동에서 아버지는 집안의 절대적 권위자였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와 전통을 계승하는 중심이었습니다.
나뉨의 이유: 자녀나 며느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전통과 아버지의 권위(세상적 질서)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 시스템에서는 엄청난 충돌이자 '반란'으로 여겨졌습니다.
3. 새로운 가족의 정의 (영적 가족)
예수님은 이 갈등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누가 네 진짜 가족이냐?"
예수님은 다른 구절에서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 내의 분쟁은 혈연 공동체에서 언약 공동체(교회)로 소속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고와 같습니다.
4. 고부갈등(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언급
누가복음 12장 53절에 나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분쟁은 당시 가장 밀접하게 생활하던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는 복음이 남성 중심의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가장 사적이고 일상적인 가정의 내부 공간까지 침투하여 변화와 결단을 촉구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이 '나뉨'은 꼭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형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가치관의 고립: 가족들이 모두 돈, 명예, 안락함을 쫓을 때 혼자 복음의 가치를 지키려다 겪는 '소외감'이 현대판 분쟁일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충돌: 제사 문제나 주일 성수, 물질 사용 등에 있어 가족의 기대와 하나님의 요구가 부딪힐 때 우리는 '디아메리조(나뉨)'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분쟁의 목적이 '파괴'가 아니라 '재편'이라는 점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뭉쳤던 가족 관계가 깨어지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계로 다시 세워지기 위한 아픈 과정인 셈입니다(인터넷).
n “가족과 교회 공동체 내에서 '나 중심'의 결속이 깨어지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영적 구조조정입니다.
1. 가족 관계에서의 '필요한 분쟁'
지금 나를 중심으로 뭉쳐진 가족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동할 때 일어나는 분쟁은 '기대의 이동'에서 시작됩니다.
감정적 의존으로부터의 독립: 가족이 나의 기쁨과 위로의 절대적 근원이었던 상태에서, 하나님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시도록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가족들은 ‘변했다’거나 ‘서운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필요한 분쟁'의 시작입니다.
인정 욕구의 포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자녀의 성공을 통해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던 습관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만 집중할 때 생기는 충돌입니다.
침묵의 타협 깨기: 평화를 위해 신앙적 가치관을 숨겼던 영역에서 정직하게 복음적 기준을 제시하기 시작할 때 생기는 긴장입니다.
2. 주님의 교회(공동체)에의 적용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결속'이 '그리스도의 통치'보다 앞설 때 주님은 분쟁(나뉨)을 허락하십니다.
친목 중심에서 사명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여 위로를 주고받는 '동호회식 결속'이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말씀의 날카로운 검이 임하면, 인간적인 정(情)으로 묶인 공동체는 불편함을 느끼고 흩어지거나, 그리스도의 사명을 중심으로 재결합하게 됩니다.
기득권과 질서의 재편: ‘우리가 해왔던 방식’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지배하던 구조가 깨지는 것입니다. 오직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최고의 권위가 될 때, 기존 질서와의 분쟁은 불가피합니다.
가짜 평화의 폭로: 갈등을 덮어두는 것이 평화라고 믿는 교회에 주님은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불'을 던지십니다. 이는 상처를 드러내어 치유하고, 복음 안에서 정직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결론: 분쟁의 목적은 '진정한 연합'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분쟁은 파괴가 목적이 아닙니다. ‘나(Self)’라는 모래 위에 세워진 관계를 허물고, ‘그리스도(Christ)’라는 반석 위에 다시 세우기 위한 은혜의 수단입니다”(인터넷).
(ii) 결론적으로 제가 이 말씀 묵상을 맺으면서 던지게 된 질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분쟁을 통하여 가정과 교회가 누려야 할 평화는 무엇입니까?’입니다.
· “예수님이 주시는 그 아픈 '나뉨(분쟁)'의 과정을 통과한 가정과 교회가 비로소 누리게 되는 '참된 평화'는 이전의 안락함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 평화의 실체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조율된 화음’의 평화 (가치관의 일치)
이전의 평화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서로의 목소리를 죽인 '침묵의 평화'였다면, 나뉨을 통과한 평화는 그리스도라는 기준음에 각자의 삶을 맞춘 '화음의 평화'입니다.
가족이나 교우들이 서로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서로와도 연결되는 상태입니다. 중심축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옮겨갔기에, 환경이 흔들려도 전체의 조화는 깨지지 않는 단단한 평화입니다.
2. ‘가면을 벗은’ 정직한 평화 (깊은 신뢰)
예수님이 주시는 분쟁은 내 안의 이기심과 가식적인 거룩함을 폭로합니다. 이 아픈 과정을 거치면 더 이상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정직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나의 연약함과 죄성을 솔직히 고백해도 복음 안에서 용납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상태입니다. 갈등이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복음적 문법'을 공유하게 되었기에, 오해와 상처가 쌓이지 않는 투명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3. ‘사명을 향한’ 역동적 평화 (방향의 일치)
안락함만을 구하는 평화는 고여 있는 물처럼 정체되기 쉽지만, 분쟁을 통과한 평화는 흐르는 강물처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인 평화'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단순히 ‘우리끼리 행복하자’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싸우자’는 전우애(戰友愛)적 평화로 바뀝니다. 외적인 고난이나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나뉨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 공통의 사명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주시는 분쟁은 우리를 '외로운 섬'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썩은 살을 도려내고 '건강한 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사랑의 수술입니다. 그 수술대 위에서의 통증을 견뎌낸 공동체만이, 세상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하늘의 평안(Shalom)’을 소유하게 됩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