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적인 사랑이 없는 교만과 위선적 지식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르시되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도다”(누가복음 11:45-46).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5-46 말씀을 묵상할 모욕하심이니이다라는 율법교사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45).  단어는 헬라어로βρίζω”(휘브리조)인데, 이는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치욕을 주어 명예를 짓밟는 행위를 뜻합니다(인터넷).

 

(a)   , “ 율법교사 예수님에게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우리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라고 항의한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그러면 그는 심한 모욕감을 느낀 것일까요?

 

(i)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에 '모욕감' 느낀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던진 비판이 자신들의 '전문성' '생계적 기반' 정면으로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연대 책임)

 

당시 율법교사들은 바리새파의 지적인 스승이자 이론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시자, 율법교사는우리가 저들과 패라는 말이냐?  우리 같은 고결한 학자들까지 저급한 위선자들과 도구급으로 취급하는 것이냐?’라며 불쾌해한 것입니다.

 

2.      '지적 자부심' 대한 상처

 

그들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최고 전문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정식 랍비 교육도 받지 않은 젊은 청년(예수) 자신들의 삶과 가르침을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니,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느낀 것입니다.

 

3.      '숨겨진 치부' 찔림

 

예수님의 비판은 정확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남들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곤 했습니다.  자신들만 아는 위선적인 모습이 대중 앞에서 폭로되자, 부끄러움이 '모욕감'이라는 공격적인 감정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4.      권위의 위협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명예' 권력과 직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교사들이 쌓아온 종교적 기득권과 사회적 영향력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기에, 이를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모욕감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겸손함이 없을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나의 체면' 먼저 생각했기에 발생한 감정입니다”(인터넷).

 

(b)   저는 말씀을 묵상할 주로 목사는 모욕감을 느끼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보았습니다:

 

(i)                  성경 율법교사가 느꼈던 모욕감과 오늘날 목회자가 느끼는 모욕감은 심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주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1.      '영적 권위' 부정당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자부심과 소명의식으로 삽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설교나 가르침을 비판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그것을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와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깊은 모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2.      '도덕적 결점' 드러날

 

율법교사들이 예수님의 지적에 발끈했던 결정적 이유는 지적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역시 겉으로 보여지는 거룩한 모습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누군가 날카롭게 꼬집을 , 당혹감이 분노와 모욕감으로 변질될 있습니다.

 

3.      '헌신' 인정받지 못할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라는 보상 심리가 있을 위험합니다.  자신의 수고가 성도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거나,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무시당했다'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4.      '지적 전문성' 대한 자부심

 

본문의 율법교사들처럼 공부를 많이 전문가 집단일수록, 자신의 해석이나 논리가 반박당하는 것을 참기 힘들어합니다.  내가 전문가인데 감히?’라는 엘리트 의식이 모욕감의 뿌리가 되기도 하죠.

 

요약하자면 결국 '자아(Self)'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목사라는 직분' '' 동일시하다 보니 직분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모욕으로 연결 짓는 것입니다”(인터넷).

 

(c)   그러면 교인들은 모욕감을 느끼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보았습니다:

 

(i)                  교인들 역시 율법교사와 본질적으로 비슷한 이유로 모욕감을 느끼지만, 양상은 '신앙적 자부심' '보상 심리'라는 측면에서 조금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1.      '자기 (Self-righteousness)' 건드려질

 

율법교사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컸던 것처럼, 열심 있는 교인일수록나는 남보다 경건하다 무의식적인 우월감을 갖기 쉽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신앙생활(기도, 봉사, 헌금 ) 순수성을 의심하거나 비판하면,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깊은 상처와 모욕감을 느낍니다.

 

2.      '헌신에 대한 인정' 결여될

 

많은 교인이 시간과 물질을 드려 교회에 헌신합니다.   헌신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데, 사람의 '인정' 섞이게 되면 위험해집니다.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혹은 잘하라는 권면을 들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무시하나라는 서운함이 모욕감으로 변합니다.

 

3.      '영적 정체성' '자아' 분리하지 못할

 

나는 집사다’, ‘나는 권사다라는 직분을 계급이나 권위로 인식할 발생합니다.

 

직분자로서의 허물을 지적받으면, 그것을 '성숙을 위한 조언'으로 듣지 못하고 자신의 인격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합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단정 지은 것과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입니다.

 

4.      '익숙한 위선' 폭로될

 

교회 안에서 거룩한 가면을 쓰고 지내다 보면, 어느덧 가면이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말씀이나 타인의 조언을 통해 안의 이중성이나 세속적인 욕망이 날카롭게 지적될 ,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로 "무례하다", "나를 모욕했다" 화를 내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교인들이 느끼는 모욕감의 핵심도 결국 '(Self)'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 '나의 체면' '나의 공로' 부정당하면 모욕감을 느낍니다.  반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겸손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지적 앞에서도 모욕감 대신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인터넷).

 

(2)   이렇게 예수님에게 모욕감을 느낀 율법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라고 말씀하셨는데 의미가 무엇일까요?

 

(a)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율법교사 예수님께서 근거 없고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참고: 호크마).

 

(i)                  예수님께서는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운다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지기 어려운 이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사들의 해석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우월한 것으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고 복잡하여(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암기하여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호크마).

 

·         본질보다 복잡한 '세칙':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사랑과 정의) 사라지고, 말씀하신 대로 613개에 달하는 방대한 규정(하라 248, 하지 마라 365) 그에 딸린 무수한 '장로들의 전통' 남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이 죄인지조차 몰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인터넷).

 

1.      '세세한 규칙' (형식주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율법교사들은 이를 수천 가지의 잘게 쪼개진 행동 지침으로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일하지 말라 말씀을 지키기 위해 ' 미터 이상 걸으면 된다', '매듭을 묶으면 된다' 식의 막히는 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일상 속에서 "이게 죄인가, 아닌가?" 전전긍긍하며 감시받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2.      '죄책감' (영적 열등감)

 

율법교사들이 만든 613개의 조항은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이 도저히 지킬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들은 스스로를 '함량 미달의 신앙인'이라 여기며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다.

 

반면 율법교사들은 이를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무식하고 부정한 ' 낙인 찍어 영적인 열등감을 심어주었습니다”(인터넷).

 

·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가장 무겁게 느끼는 '현대판 종교적 ' 율법교사들이 지웠던 613개의 조항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심리적·문화적으로 강요되는 '보이지 않는 규칙들'입니다.

 

1.      성도들이 느끼는 '현대판 종교적 '

 

'완벽한 신앙인' 프레임: 주일 성수, 십일조, 봉사, 새벽기도 외형적인 신앙 지표를 모두 갖춰야만 "신앙이 좋다" 인정받는 분위기입니다.   기준에 미치면 스스로를 '자격 없는 신앙인'이라 정죄하며 영적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거룩한 가면' 강요: 교회 안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삶의 고통이나 의심, 슬픔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감정적 위선이 정서적 짐이 됩니다.

 

'사역과 봉사' 과부하: 사랑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삶이나 안식은 무시된 ,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로서의 사역에 동원되는 현상입니다.

 

'세속적 성공' '신앙' 결합: ‘믿음이 좋으면 복을 받아 성공해야 한다 식의 기복주의적 가르침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부족해서 이런가?’라는 이중의 짐을 지웁니다”(인터넷).

 

-          이런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율법교사의 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님의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 회복 (은혜의 우선성): 내가 무엇을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반응하는 것이 신앙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11:28) 하신 예수님의 초청은 종교적 의무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취약함' 공유 (가면 벗기):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약점과 실패를 정죄하지 않고 품어주는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교사들처럼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사역'보다 '사귐' (관계 중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성도 간의 진실한 교제가 종교적인 프로그램이나 업무보다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직분' 권위주의 타파: 목회자나 중직자가 율법교사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무게를 '함께 손을 대어' 나누어지는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현대판 짐에서 벗어나는 길은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존재를 사랑하신다 단순한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인터넷).

 

(ii)                예수님께서는너희는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하고 말씀하셨는데 말씀은 율법교사들의 '극단적인 위선' '공감 능력의 결여'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신 부분입니다.   구절에는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자신들은 빠져나갈 '편법' 만들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백성들에게는 613개의 조항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법망을 교묘히 피할 있는 '해석상의 예외 규정' 만들어 즐겼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멀리 이동하지 못하게 해놓고는, 미리 자기 물건을 목적지에 가져다 놓으면 그곳도 ''으로 간주해 이동할 있다는 식의 편법(에루브) 사용했습니다.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법을 어기면서 백성들만 옥죄었던 것입니다.

 

2.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긍휼' 전무했습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표현은 짐이 너무 무거워 쓰러져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나 마음조차 없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타인을 정죄하고 통제하는 '권력'으로만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백성들이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방관한 것입니다.

 

3.      '' 있고 '' 없는 종교 지도자의 표본입니다

 

그들은 강단 위에서 "하라, 하지 마라" 외치는 입술은 살아있었지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수고'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셔서 인류의 짐을 직접 대신 지셨지만( 11:28), 율법교사들은 거꾸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타인에게 짐을 떠넘기기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은너희는 가르치기만 , 가르침대로 살려는 고통은 조금도 분담하지 않는구나라는 무서운 책망입니다.  이는 오늘날 '가르치는 위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언행일치와 형제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합니다”(인터넷).

 

·         누가복음 11 45-46절의 맥락에서 보면,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함이 없는 교인은 '지식의 저주' 빠진 현대판 율법교사와 같습니다.  이들의 특징과 이면에 숨겨진 영적 상태를 가지로 정리해 있습니다.

 

1.      '' '행함'으로 착각하는 착각 (영적 나르시시즘)

 

이들은 성경 지식이 많거나 신앙적인 언어(기독교 술어)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을 자신의 신앙 수준이라고 믿습니다.

 

심리: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남에게 가르칠 있으니 나는 이미 이대로 살고 있다" 착각에 빠집니다.

 

결과: 입으로는 '사랑' '헌신' 유창하게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 손해를 보거나 몸을 쓰는 수고는 철저히 피합니다.

 

2.      남에게는 '철퇴', 나에게는 '솜방망이' (이중잣대)

 

율법교사들이 백성들에게는 613개의 조항을 들이대며 정죄했듯이, 말만 앞서는 교인들은 타인의 부족함을 기가 막히게 찾아냅니다.

 

특징: ‘집사님이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요’, ‘교회가 사랑이 없네요라며 남의 어깨에 '지기 어려운 ' 얹어 놓습니다.

위선: 정작 본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행위 자체를 '공의로운 조언'으로 포장합니다.

 

3.      '회개' 대신 '모욕감' 선택하는 완악함

 

이런 유형의 가장 무서운 점은 누군가 그들의 실상을 지적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11:45 율법교사처럼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서 모욕감을 주느냐 화를 냅니다.

 

원인: 자아(Self) 너무 강해서,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기보다 자신의 '체면' '자존심' 지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있을진저(Woe to you)’라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신앙은 공동체를 전염시키고, 정작 본인은 구원의 앞에서 서성이며 남들도 들어가게 막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인터넷).

 

-             말만 번지르르한 신앙'에서 벗어나 '손가락을 대는 수고(행함)' 옮겨가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 3가지를 제안해 드립니다.

 

1.      '비판'하고 싶을 , '도움' 가지를 먼저 찾기

 

누군가의 부족함이나 교회의 문제가 눈에 들어올 , 입을 열기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훈련입니다.

 

실천: ‘ 집사는 저러지?’라는 비판이 올라올 , ‘내가 분을 위해 오늘 있는 작은 도움(격려의 문자, 대신 들어주기 ) 가지는 무엇인가?’ 찾고 실행한 뒤에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먼저 움직이면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2.      '영적 용어' 사용 줄이고 '구체적 동사' 사용하기

 

추상적이고 거룩해 보이는 (: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뒤로 숨지 않는 연습입니다.

 

실천: ‘기도할게요라고 말만 하고 잊어버리는 대신, ‘지금 여기서 같이 짧게 기도할까요?’라고 제안하거나, ‘사랑합니다라는 대신이번 주에 식사 같이 대접하고 싶습니다처럼 구체적인 시간과 몸을 쓰는 약속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3.      '나의 약함' 먼저 고백하기

 

율법교사들처럼 완벽한 ,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실천: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보다사실 저도 부분이 됩니다.  우리 같이 노력해 볼까요?’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먼저 오픈하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질 '모욕감' 사라지고, 함께 짐을 지는 '동역' 시작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처럼 높은 의자에 앉아 지시하지 않으셨고, 가장 낮은 곳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직접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말의 권위' 아닌 '섬김의 흔적'으로 증명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