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 세대의 사람”(눅7:31)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누가복음 7:31-32)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31-32절 말씀을 묵상하시 시작하면서 먼저 유사한 말씀이 어디에 기록되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11장 16-17절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a) 이 두 성경 말씀들을 비교할 때 몇 가지 작은 차이점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i) 첫째로, 누가복음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눅7:31)하고 말씀하신 반면에, 마태복음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마11:16)하고만 말씀하셨습니다.
(ii) 둘째로, 누가복음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눅7:32)하고 말씀하신 반면에, 마태복음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마1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ii) 마지막 셋째로, 누가복음은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하고 말씀하신 반면에, 마태복음은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 저는 이 세 가지 작은 차이점들을 중심으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31-32절 말씀을 3가지로 나눠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로, 누가복음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눅7:31)하고 말씀하신 반면에, 마태복음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마11:16)하고만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대의 사람을”(혹은 “이 세대를”) 비유하신 것일까요?
(i) 누가복음 7장 31절의 제일 가까운 문맥인 30절을 볼 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 때문입니다(30절).
· 마태복음 11장 16절의 경우에는 제일 가까운 문맥보다 마태복음에서 “이 세대”란 말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 등), “이 세대”란 말은 흔히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부인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사람을”(혹은 “이 세대를”) 비유하신 이유는 그 세대가 에수 그리스도(메시아)의 구원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참고: 호크마).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먼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이 세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현대인의 성경).
(ii) 저는 “이 세대”를 묵상할 때 누가복음 11장 31-32절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심판 때에”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일너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 세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을 지적하며, 먼 이방인들이나 과거의 어리석은 자들조차 더 나은 지혜를 보이고 회개했음을 통해 이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즉, 솔로몬과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지혜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셨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그 당시 현재의 유대인들이 훨씬 더 큰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인터넷).
- “핵심 의미 분석:
남방 여왕 (사바 여왕):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온 이방인: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을 듣고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어려운 질문을 던지며 지혜를 구하고 솔로몬의 지혜를 인정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정죄 이유: 이 세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것을,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러 온 이방 여왕보다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니느웨 사람들:
요나 선지자의 외침에 회개한 이방 민족: 요나의 경고를 듣고 왕부터 백성까지 금식하며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요나 3장).
정죄 이유: 하나님의 '표적'(요나)을 받은 이 세대 사람들이, 요나의 메시지 하나에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보다 더 완악하며, 요나보다 더 크신 분(예수님)을 만났음에도 회개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이 세대 사람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 특히 구약의 약속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을 지칭합니다.
정죄의 근거: 이들은 솔로몬의 지혜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보다 더 큰 '표적'(예수님의 사역과 존재 자체)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므로, 심판 때에 그들보다 더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더 큰 계시와 기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불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는 경고이며, 이방인들의 작은 지혜나 회개조차도 이 세대 사람들의 불신앙보다 낫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인터넷).
(b) 둘째로, 누가복음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눅7:32)하고 말씀하신 반면에, 마태복음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마11:16)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대의 사람을”(혹은 “이 세대를”)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하고 비유한 것일까요?
(i) 예수님께서 "이 세대"를 장터 아이들에 비유하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하며, 마치 놀이에 맞춰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딴청을 피우는 모습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장터”란 말의 원어 “ἀγοραῖς”(아고라)는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합니다(호크마).
- 그리고 예수님께서 비유를 드시면서 그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언급하신 이유는 아이들의 불일치하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하셨기 때문입니다(호크마).
(c) 마지막 셋째로, 누가복음은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하고 말씀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하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17절; 눅7:32)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묵상을 해야 합니다.
(i)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셨습니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됩니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습니다.
-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경멸하고 비난하였습니다.
n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습니다(호크마).
(3)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경멸하고 비난했던 것처럼, 지금도 “이 세대의 사람”(눅7:31)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a) “이 세대의 사람”들은 그릇되고 죄악된 길로 걸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죄에서 돌아서게 하고자 사랑으로 책망하는 참 목사님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i) 그들이 경멸하고 비난하는 참된 목사님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아서게 합니다(렘23:22, 현대인의 성경). 참된 목사님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교인들에게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렘4:1). 진실된 목사님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 그리고 참된 목사님들은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찬송가를 하나님께 찬양 드릴 것입니다: (1절)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2절) 돌아와 돌아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3절) 돌아와 돌아와 환난 있는 곳과 죄를 범한 데와 미혹 받는 데서 (4절) 돌아와 돌아와 집에 돌아 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후렴]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와 어서 와 돌아오라”(새찬송가 525장 “돌아와 돌아와”).
- 그리고 참 목자들은 집을 나간 한 영혼이 탕자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때에 “그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을 것입니다(눅15:20,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잃었다가 얻은 그 영혼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32절).
(b) 그러면서 “이 세대의 사람”(눅7:31)들은 성도들을 그릇되게 하며(렘23:13),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 죄에서 돌아서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며(14절), 하나님을 멸시하며 자기 마음의 완안한 대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평안할 것이다’, ‘아무런 해도 너희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하는(17절) 거짓 목사들의 말을 듣고 따르고 있습니다.
(i) 그들이 따르고 있는 거짓 목사들은 자기들 멋대로 지어낸 거짓말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그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해설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더하실 것입니다”(계22:18,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거짓 목사들은 하나님의 기록된66권 성경 말씀 외에 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도님들을 그릇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사53:6, 현대인의 성경). 그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릇된 관점(2절)과 그릇되 가치관(3절)과 그릇된 생각(4-5절)을 가지고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6절). 그러므로 그들은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져가고 있고 점진적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렘23:27).
· 거짓 목사들은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교인들을 그 죄에서 돌아서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계속해서 더 죄를 범하도록 주일 예배 때 강단에서 설교로 그들을 축복 설교하고 위로의 설교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과 세례 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므로 책망하지 않습니다(계3:19).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릇되고 죄악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c) 제가 2018년 7월 18일에 “우리들 가운데 참 목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에스겔 2장 5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여 쓴 글에 결론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i) “요즘은 목사가 다른 목사(들) 때문에 속상해 하고 슬퍼합니다. 같은 동역자들끼리도 서로 실망해 합니다. 그리고 서로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며 수치스러워 하기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자꾸만 미디어를 통하여 소수의 목회자들의 범죄가 속히 그리고 널리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그 소식을 접한 후 부터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아무개 목사, 아무개 목사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게 생각할 수가 없겠죠. 그리고 심지어 교인들은 그 목사들을 비판하며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바로 전하는 목사보다 가려운 우리의 귀를 긁어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사보다 교인들을 두려워하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처럼 이 세대를 본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주님께 불충하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뜻을 추구하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혜로운 성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참 목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참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요 또한 패역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러한 참 목사가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맞이했습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321174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