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라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소문이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누가복음 7:11-17)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7 11-17 말씀을 읽을 때에 예수님께서나인이란 으로 가셔서(11) 만나신독자”(12) 죽은”(12) “청년”(14) 어머니”(12)과부 보시고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13)위로하셨다”(13, 현대인의 성경)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어 말씀 묵상 글의 제목을 예수님의 말씀인울지 말라”(13)이라고 정했습니다.

 

(a)    그리고 생각난 것은 어제 주일 밤에 제가 교회 목양실에서 본당으로 걸어가다가 생각난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찬송가 가사인슬픔 많은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는 제목 아래 만든 유튜브 동영상이었습니다 (https://youtu.be/aePFK0KcSXs?si=IJZ19deAJdQn3Oyt).

 

(i)                      그리고 나서 저는다국어 성경웹싸이트를 열어서통합검색란에다가울지 말라 타이핑에서검색 눌렀더니 오늘 본문 누가복음 7 13 외에서 3 성경 구절이 것을 보고 읽었습니다:

 

·       (1) ( 8: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            구절(누가복음 8:52) 예수님이 죽음을 '' 비유하며, 소녀를 살리실 것이니 울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죽음의 권세보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권능과, 그분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임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소녀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슬퍼하며 울었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잠처럼 여기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n  핵심 의미

 

죽음에 대한 다른 시각: 사람들은 죽음을 비극적이고 영원한 끝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일시적인 ''으로 보셨습니다.

 

생명 주관자로서의 예수님: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다스리시고 생명을 회복시킬 있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중요성: 말씀은 죽은 자도 살리실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궁극적 부활의 예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과, 장차 모든 믿는 자들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구절은 죽음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권능과, 그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강력한 선포라고 있습니다”(인터넷).

 

·       (2) (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자 에스라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듣고 또한 레위 사람 들을 통하여 율법을 깨닫게 때에 자기들의 죄가 들춰지므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통하여 죄의 자각(conviction of sins) 있으므로 울었습니다.  에스라도 이러한 눈물을 흘리 기록이 에스라 101절에 나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자각으로 인하여 울고 있을 때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일 이니 슬퍼하며 울지 말라 권면했습니다.  지금 현대 말로 한다면, 목사님을 통하여 또한 성경공부 교사 선생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님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어 회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에 목사님과 장로님과 교사 선생님들이 ‘오늘은 주일이니 슬퍼하며 울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n  우리 크리스찬들의 눈가에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유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로 비유할 우리가 거울을 자주 보지 않고 사는 번째 문제요 또한 거울을 보아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없는 우리의 영안의 어두워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설교 시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John White 목사님은 이러한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심리적인 기술로 울도록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모른 심리 조작이라는 기술을 쓰고 있다.  강력한 감정의 물결이 모든 회중 사로잡을 만족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  “우리가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을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것이 !  이는 우리가 내적 각성보다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 신경쓰 때문이다.  얼마나 냉철한 관찰입니까?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때에 우리 설교자들은 성도들에 내적각성보다 눈에 보이는 결과인 눈물에 신경을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말씀을 들으므로 죄의 자각으로 인한 회개의 눈물이라기보다 설교자들의 심리 조작으로 말미암은 감정(눈물)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말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내적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은 아닐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눈물은 전혀 심령의 내적 각성과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요엘 212-13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  그러나 과연 회개의 눈물, 죄를 슬퍼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까?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은 회개의 눈물이 우리의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날인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3) ( 5:5) “장로 중의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            구절(요한계시록 5:5)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모든 인류와 세상의 구원 심판을 집행할 권세를 가진 분이 오셨음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절망에 빠진 요한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후손이자 왕권을 가진 메시아를, '다윗의 뿌리' 예수님의 혈통적 기원을 의미하며, 이분이 '이겼다' 것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구원자로서 승리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봉인된 두루마리(하나님의 계획) 열어 역사를 주관하고 심판할 권한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n  구절별 의미 해석:

 

장로 중의 사람이 내게 말하되: 환상 속에서 계시를 받는 요한에게 권위 있는 존재(장로)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모든 것을 잃고 절망했던 요한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첫마디입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유대 지파의 사자: 구약 창세기에서 유다 지파의 상징으로, 왕권을 가진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다윗의 뿌리: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다윗 왕조의 계승자임을 뜻합니다.

 

이겼으니: , 죽음,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다는 의미로, 구원자로서의 자격을 증명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절은 세상의 모든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으며, 그분만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이끌어갈 유일한 분임을 선포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인터넷).

 

(b)    여기 누가복음 7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나인이란 에서나인”(Nain)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납니다.  성에서 엔돌(Endor)방향으로는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습니다.  한편나인성은 오늘날까지네인”(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합니다.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양편에는 무덤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바로 지점 부근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독자”(12)] 장례 행렬과 마주치신 것입니다(호크마).

 

(i)                      저는 나인이란 뜻이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구약 성경 룻기에 나오는나오미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이유는나오미 이름의 뜻이나의 즐거움이기 때문인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나오미 대해서 이미 묵상할 말씀 묵상의 글을 보다가인생에 맛을 여인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룻기 1 13, 21 말씀을 묵상한 글을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500123925).  말씀 묵상 중에 부분만 나누고 싶습니다:

 

·       오늘 본문 룻기 1 13, 21절을 보면 참으로 인생의 맛을 여인이 나옵니다.  여인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란 여인은 처음부터 인생의 맛을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처음엔 인생의 맛을 여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있는가 하면 그녀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때에는(1) 남편도 있었고 아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2)그녀는 풍족한 삶을 살았었습니다(21).  마디로, 처음엔 나오미는 그녀의 이름의 (“나의 즐거움”)대로 “희락”과 “즐거움” 있는 “행복”한 삶을 살았었습니다(다국어 성경).  그런데 그녀가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가서 살기 시작하면서(1-2) 이상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녀가 남편과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이주해서 살면서 남편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3) 땅에서 10년쯤 되었을 아들인 말론과 기룐마저 죽었기 때문입니다(4-5,현대인의 성경).  뿐만 아니라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살면서 빈궁해 지기까지 했습니다(21).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을 때에는 남편도 있었고, 아들도 있었으면 풍족한 삶을 살았었는데 모압 땅으로 이주해서 살면서는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었을 뿐만 아니라 빈손(21, 현대인의성경) 것입니다.”

 

·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을 보고더 이상 말릴 수가 없어 사람이 함께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18-19).  그들이 다시금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온 성이 떠들썩하며 여자들이 ‘정말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물었습니다(19, 현대인의 성경).  나오미는 그녀들에게 자기를 “나오미”(: “나의 즐거움”) 부르지 말고 “마라”(: “쓰다”)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19-20,현대인의 성경).  이유는 그녀는 이상 “나오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녀의 이름은 “나오미”였지만 그녀는 모압 땅에서 살면서 이상 전에 누렸던 희락이나 즐거움이나 행복을 누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녀는많은 “괴로운 시련”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겪고 있었던 많은 괴로운 시련으로 인한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다고 믿었습니다(20, 21,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셨고” 자기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20, 21).  그래서 그녀는 베들레헴의 여자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말한 것입니다(20).  여기서 “마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쓰다”입니다.”

 

·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에게 남은 사람 모압 여인 룻이란 며느리를 통해서 인생의 맛을 “마라”인 나오미에게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일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회복시켜주신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으로 하여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보아스(2:1)에게 속한 밭으로 인도하시사[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룻이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른 것이 “우연히”(3)라고 생각할 있겠지만 하나님의 주권속에서는 우연이란 것이 없기에] 보아스로 하여금 룻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시고(10-16, 20), 룻으로 하여금도 보아스에게 인애를 베풀게 하시사(3:10) 결국에 가서는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을” 아는(11)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로 하여금(12)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시사(4:10,13) 룻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13) 오벳(22)이란 아들을 낳게 하시사(13) 오벳으로 하여금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가 되게하셨습니다(15).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맛을 “마라”에게 그녀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15) 모압 여인 룻에게 임신케 하시고 아들 오벳[다윗의 할아버지(22)] 낳게하시므로 나오미에게 즐거움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에 가서 하나님께서는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낳게하시사(22) “다윗의 혈통에서”(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룻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렸습니다(1:5).” 

 

(c)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독자”(7:12)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을 주님은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울지 말아라.’하고 위로하셨습니다(13, 현대인의 성경). 

 

(i)                      여기서불쌍히 여겨라는 헬라어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플랑크니스테) 단어는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내장 속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동정을 느끼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자비를 베푸실 사용되며, 단순한 동정 이상의, 창자(σπλάγχνα) 움직이는 듯한 강렬한 연민과 사랑을 나타냅니다(인터넷).

 

·       헬라어 단어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인 누가복음 15 20절에 나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σπλαγχνίσθη)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기서 아버지가 탕자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안아준다는 것은, 아들을 잃었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연민,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을 상징하며, 아들이 품꾼이 되기를 청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먼저 다가와 용서와 회복을 베푸는 장면입니다(인터넷).

 

-            측은히 여긴다는 것의 의미:

 

깊은 연민과 사랑: 아들의 비참한 몰골과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파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본질적인 사랑이 표현된 것입니다.

 

용서와 수용: 아들의 죄를 묻거나 판단하지 않고, 아들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고백하기도 전에 달려가 안아줌으로써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이는 잃은 마리,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능동적인 사랑: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멀리서라도 아들을 보고 즉시 달려가 안아주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구원하심을 나타냅니다.

 

결론적으로, 구절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긍휼 어린 사랑이 회개하는 자를 어떻게 환영하고 회복시키는지, '돌아온 탕자 비유'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인터넷).

 

(ii)                    여기서 누가복음 7 13절에서울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울다라는 헬라어 “κλαε”(클라이에) 단어는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나 애통을 의미합니다(인터넷).

 

·       단어가 요한복음 20 11, 13, 15절에도 나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  석절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울면서 구부려 예수님의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앉아 있었던 천사들이 마리아에게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하고 물었고, 예수님은 그녀에게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여자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현대인의 성경)]하고 물으셨습니다.

 

-            저는 말씀을 묵상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죽은 줄만 알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나 애통인울고  있었다 것을 생각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인 것을 믿고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묘지에서 하나님께 하관 예배를 드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은 눈물로 표현하지 않을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게 됩니다.

 

·       누가복음 8 52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실제 죽었지만 그녀를 다시 살리실 하신 말씀으로, 당시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을 확신하며 비웃었지만(52-53),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일시적인 잠으로 보시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을 표현하신 그녀를 실제로 다시 살리셨습니다(참고: 인터넷).

 

-            핵심 의미

 

죽음이 아닌 : 죽음을 끝이 아닌, 잠시 깨어날 있는 상태로 재해석하여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믿음의 강조: 사람들이 죽음을 보고 절망할 ,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시며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50).

 

생명의 주관자: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며, 자신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일으킬 있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 죽음은 궁극적인 끝이 아니며 다시 생명으로 돌아올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인터넷).

 

·       요한계시록 5 5 말씀도 묵상하게 됩니다: “장로 중의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서 "울지 말라" 말씀은, 인류의 구원과 심판의 권세를 가진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셨으니, 멸망 앞에서 절망하지 말고, 그분만이 봉해진 두루마리(하나님의 구원 계획) 열고 역사를 주관하실 있기에 희망을 가지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이는 심판의 서막 속에서 절망하는 요한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자 승리자임을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인터넷).

 

-            핵심 의미

 

위로와 격려: 두루마리를 자가 없어 모두가 슬퍼하고 절망할 , 장로 명이 요한을 위로하며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원자의 등장: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승리와 희망: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지만, 이제는 승리하셨으며, 그분이 두루마리를 떼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심판의 주관자: 5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화되기 , 심판을 집행할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구절은 멸망의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d)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를 보시 불쌍히 여기사울지 말라하신 (7:13) 가까이 가셔서 그녀의 독자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습니다(14).  예수님께서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말씀하시자(14) 죽은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15).

 

(i)                      여기서일어나라하는 헬라어γέρθητι”( 에게르테티) 단어 헬라어 동사 'γείρω (egeirō, 일으키다, 깨우다)' 수동태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문맥에 따라 "일어나라,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으켜지다"라는 뜻이며, 특히 누가복음 7 14절에서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청년아,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γέρθητι)"라고 명령하신 구절로 유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일어서다' 아니라 '생명을 되찾아 깨어나라' 강력한 명령입니다(인터넷).

 

·       예수님의 지상 사역 부활의 기적들: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 앞서 기록된 가지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나인 과부의 아들( 7:14-15), 야이로의 [( 5:41-42) “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그리고 나사로( 12:1, 9, 17) 부활은 모두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7:16)(인터넷).

 

(e)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는 모습을 보고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소문이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16-17)하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선지자 신명기 18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세와 같은선지자 하나로서메시아 가리킵니다.

 

(i)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독자”) 살리신 것을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명기 18 15절에서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7:16)하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의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고통받는 백성을 찾아오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과 구원 사역을 행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찬양한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이 꼬리를 물고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호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