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장 1절).
관심을 가지고 듣는 귀가 필요합니다. 말보다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엔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miserable comforters)(욥16:2)이 많습니다.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하지만 그들의 말은 헛된 말(windy words)입니다(3절). 즉, 그들의 말은 우리을 강하게(strengthen) 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근심도 풀어주지 못합니다(5절).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며(torment) 말로 우리의 마음을 짓부수기(꺽기)까지(crush)도 합니다(19:2). 참으로 그들은 우리를 헛되이(vainly) 위로할 뿐입니다(21:34). 우리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전4:1).
그러나 우리가 낙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고후7:6). 오직 하나님 아버지시만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1:3). 고린도후서 1장 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분은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는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고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십시니다(4절). 위로하시되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위로도 넘치게 하십니다(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짐의 확신을 주십니다(10절). 전에도 우리를 큰 고난에서 건지셨던 하나님께서 현재의 고난에서도 그리고 앞으로 장차 받을 고난에서도 건지실 줄 믿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게 하십니다(6절). 심지어 우리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난도 견디게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십니다(4절). 우리가 위로 받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위로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6절). 그들을 향한 우리의 소망은 견고합니다(7절). 그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믿습니다(7절).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 1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로 지치고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회복과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이는 고난(심판)의 기간이 끝나고, 이제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러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으므로(2절) 회복이 시작되었기에 예루살렘에 위로와 평안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인터넷).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시편 126편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편 기자에게 어떠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 났었길래 그는 마치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과거에 일어 났던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일(회복)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를 생각할 때 시편 기자나 포로에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 가운데 슬픔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여 간구하는 가운데(5-6절) 기도의 응답이 더딤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낙망하며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의 역사로 말미암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들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이 얼마나 믿기지 않는 기적같은 일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 때 지난 날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경험한 도무기 믿기지 않는 기적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사 십자가에 내어주시므로 바벨론과 같은 사탄과 죄의 포로 생활하고 있었던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시게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사탄의 나라에서 건지시사 (구원하시사)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아들이 피 흘린 대가로 자유를 얻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의 권세”, 즉 사탄의 나라에 속해 있는 사탄의 자식도 아니요 사탄의 노예도 아닙니다. 그 사탄의 나라에는 오직 속임수와 사악함만 있습니다(맥아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그 사탄이 나라에서 건지시사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나라에는 오직 진리(truth)와 순결(purity)이 있습니다(맥아더). 이 주님의 나라를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라고 말씀했습니다(벧후1:11, 현). 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우리를 옮기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그치지(쉬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하며 위로받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골1:14). 여기서 “속량”이란 단어의 원어 헬라어 의미는 ‘대속물을 지불하여 구출하다’로서 노예를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믿는 죄인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맥아더). 에베소서 1장 7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그치지(쉬지) 않고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대가로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의 종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쉬지 그치지(쉬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