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우리를 자비로운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누가복음 6:36)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36절을 묵상할 때 먼저 원어인 헬라어 성경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제일 앞에 나오는 헬라어 단어인 “Γίνεσθε”(기네스테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너희들은 ~이 되어라’ 또는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으로서 단순히 ‘이다’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어떤 상태나 역할을 ‘되라’고 촉구하는 명령형 동사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20절)에게 ‘너희들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a) 이러한 ‘너희들은 ~이 되어라’ 또는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 말씀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36절 외에도 신약 성경에 4 군데 더 나옵니다:
(i)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여기서 ‘너희들은 ~이 되어라,’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은 ‘너희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입니다.
(ii) (마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 여기서 ‘너희들은 ~이 되어라,’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은 ‘너희들은 (인자이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으라’입니다.
(iii) (엡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여기서 ‘너희들은 ~이 되어라,’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은 ‘너희들은 (서로 친철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입니다.
(iv)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 여기서 ‘너희들은 ~이 되어라,’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은 ‘너희들은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라’입니다.
(b) 저는 이러한 ‘너희들은 ~이 되어라’ 또는 ‘너희들은 ~을 하라’ 또는 ‘너희들은 ~이어라’는 의미의 명령형 말씀들을 묵상할 때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목사님의 ‘비 시리즈’(Be Series)라는 성경 전체(구약 및 신약)를 주제별로 쉽게 풀이한 50권 분량의 성경 주석 시리즈가 생각났습니다[예를 들어, 창세기 1-11장은 “Be Basic”(너희들은 기본에 충실하라), 창세기 12-25장은 “Be Obedient”(너희들은 순종하라), 출애굽기는 “Be Delivered”(너희들은 건짐을 받으라), 요한복음 1-12장은 “Be Alive”(너희들은 살아있어라), 요한복음 13-21장은 “Be Transformed”(너희들은 변화를 받으라), 로마서는 “Be Right”(너희들은 바르게 되어라), 야고보서는 “Be Mature”(너희들은 성숙하라), 요한계시록은 “Be Victorious”(너희들은 승리하라)임](참고: 인터넷).
(i) 또한 저는 이동원 목사님의 ‘이렇게 ~하라’는 강해설교집 시리즈 책들이 생각났습니다[예를 들어, “이렇게 고난을 이기라”(베드로전서), “이렇게 예언하라”(소선시서), “이렇게 종말을 대비하라”(다니엘서), “이렇게 주 안에 살라”(골로새서), “이렇게 사역하라”(디모데전서), “이렇게 기도하라”(주기도문), “이렇게 풍성하라”(에베소서), 등등](참고: 인터넷).
(c) 저는 이 “Γίνεσθε”(기네스테에)란 헬라어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어떤 존재나 상태가 되라고 명령하는 뉘앙스(인터넷)를 생각할 때 “존재”(being)가 “행함”(doing)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저에게 주신 확신(assurance)을 재확인(reconfirmation)하게 됩니다.
(i)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시기보다 우리가 누구인가/어떠한 사람이 되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다고 믿습니다(저는 주님의 행하심보다 주님의 존재를 알아가므로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 제가 “존재”와 “행함”에 관하여 쓴 글들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 “’당신이 행하는 일보다 당신이 누구인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The kind of person you are is far more important than the kind of work you do). 이 말은 ‘존재’(being)가 ‘행함’(doing)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존재에서 행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 “행함보다 존재에 초점을 맞춘 신앙 생활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또한 성도님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초첨을 맞추기 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교육의 초점은 ‘하라’와 ‘하지 말라’와 같은 ‘행함’(Doing)이 아니라 ‘성경은 나를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와 같은 ‘존재’(Being)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롬8:16)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17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성도님들에게 ‘고난을 받으세요’라고 가르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하고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존재’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 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교육을 먼저 한 다음에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소망의 메시지)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자녀와 상속자로서의 행함)하고 성도님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존재에서 행함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존재에서 나오지 않는 행함은 외식이요 위선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론(Doctrine of God)에서도 하나님의 존재(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하나님의 행하심(하나님은 무슨 일을 행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생활을 할 경우 마귀에 시험(유혹)에 빠져 범죄할 위험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16)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이 우리의 명철/지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나에게 사랑으로 행하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일어나 결과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만일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음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행하심에만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행하실 수 있는 것인가?’하고 의문과 의심 속에서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주님의 행함보다 주님의 존재를 알아가므로 믿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주님을 믿기 보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알아가므로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주님이 행함을 보고 믿는 것보다 우리의 신앙의 견고함에 더 유익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요한복음 14:11,20:29, 현대인의 성경).”]
(2) 저는 계속해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36절을 원어인 헬라어 성경을 읽으면서 두 번째 관심을 갖게 된 헬라어 단어는 바로 “οἰκτίρμων”(오이크티르몬)입니다. 이 단어가 누가복음 6장 36절에 두 번 나오는데 그 단어의 한국어 의미는 ‘자비로운’(merciful)입니다.
(a) 이 헬라어 단어의 의미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을 표현하다’ –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것처럼 깊은 연민(애통함)을 느끼는 것(인터넷). 이 헬라어 단어는 깊은 연민과 긍휼, 동정심을 포함하며, 고통받는 이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자비로운 성품을 의미합니다(인터넷).
(i) 누가복음 6장 36절은 복수형을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지속적인 자비의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이 도덕적 권면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직접 비롯됩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운(οἰκτίρμων) 성품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인터넷).
· “성경적 관점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로운(οἰκτίρμων) 성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핵심 기준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마음과 뜻을 닮아 사랑하고, 용서하며,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돌보는 삶으로 실천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 세상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긍휼을 나누는 삶을 살아갑니다”(인터넷).
- “새로운 가족 공동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 돌봄, 차별 극복 등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실현됩니다”(인터넷).
n “행함으로 드러나는 믿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관념이 아닌,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특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비로운 삶이 중요합니다”(인터넷).
(ii) 이 헬라어 단어는 “οἰκτίρμων”(오이크티르몬)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36절 외에 딱 한군데 더 나옵니다. 바로 야고보서 5장 11절에 나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 사도 야고보는 “주”님을 가리켜 “긍휼이 여기시는 이(οἰκτίρμω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천적인 의로움을 강조하는 “야고보서” 편지에서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의 자비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는 확신 안에서 인내의 견고함을 뿌리내리게 합니다(인터넷).
-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될 말로서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됩니다(나우웬).
n 헨리 나우웬은 긍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룬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나우웬)[참고: “불붙듯 하는 하나님의 긍휼”: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56839635].
- 제가 2013년 8월 22일에 “하나님의 긍휼”이란 제목 아래 느헤미야 9장 27-31절 말씀을 묵상하여 쓴 글입니다:
“긍휼이 크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경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할 때에 그의 계명을 복종케 하시려고 우리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경고를 받아들이는 자는 시편기자처럼 “큰 상”을 받는 것입니다(시19:7-13).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을 굳게 하고 주님의 경고를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매를 드시고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신실하게 축복 하시지만 우리가 거듭 불순종할 때에는 신실하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신실한 징계가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기 때문입니다(히12:11). 징계를 받을 때에서야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강을 얻은 후에 우리는 다시 범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용서하시고 건져 주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긍휼이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결국 누가복음 6장 36절이나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οἰκτίρμων”(오이크티르몬)라는 헬라어 단어는 쓰여진 것은 윤리적 권면(ethical exhortation)과 목회적 위로(pastoral comfort)라는 두 가지 맥락 모두에서 말씀의 이중적인 힘, 즉 거룩한 삶을 향한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고통받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므로 그들을 안심시키는 힘이 드러납니다(인터넷).
· ‘제자도와 성화에 대한 함의 (Implications for Discipleship and Sanctification):
1. 마음의 자세: 신자들은 필요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마음가짐을 함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 구체적인 순종: 자비는 용서(마18:33), 자선(눅 11:41), 환대(롬 12:13),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옹호(히13:3)를 통해 나타납니다.
3. 복음 전파의 증거: 교회가 아버지의 자비를 반영함으로써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마 5:16)’(인터넷).
- 경건적 묵상(Devotional Reflection): 성경에서 '자비로운'이라는 단어(“οἰκτίρμων”)가 나오는 구절들을 묵상하는 것은 신자들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바라보며 경이로워하도록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우리를 자비로운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성령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재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