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는 것이 옳으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손이 회복된지라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누가복음 6:6-11)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6 6-11절을 읽은  마태복음 12 9-14절과 마가복음 3 1-6절도 읽고 함께 연관해서  가지고 나눠서 묵상합니다:

 

(a)    첫째로예수님께서는 다른 안식일”(6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안식일” 말고)(6:6) “거기”(12:9) 밑밭”(16:1; 2:23) 떠나 유대인들의 회당[“그들의 회당”(12:9)] 들어가 가르치고 계시는데 거기에 오른손이 마른 사람[“오른손이 오르라든 사람”(현대인의 성경)] 있었습니다(6:6).

 

(i)                      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묵상할  예수님을  받아 사도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과 복음을 전했다는 성경구절들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예를 들어사도행전 13:14; 14:1; 17:2; 18:4; 19:8-9).   중에 바울은 에베소에서는 회당에 들어가   동안이나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고권면했다는 말씀에  흥미를 갖게되었습니다

 

·       사도행전 18 19-21절을 보면 바울이 그의 2 선교 사역 말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방문했던 에베소에서 말씀을 선포했을  유대인들이 바울의 메시지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바울에게 좀더 머물러 주기를 요청한 일이 나옵니다.    바울은  요구를 거절하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사도행전 19 1절에서 바울은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다시 에베소에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3개월동안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쳤습니다(8). 

 

-            그리했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도를 비방했습니다(9).  이들은 바울이 선포한 말씀을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회복 불능의 완고한 불신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공격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사람들 앞에서 비방하였습니다

 

n  그래서 바울은 믿는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두란노 서원에서 2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10).  서방 사본은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집중적으로 강의한시간을  5시부터 10(오전11 - 오후4)였다고 밝힙니다(Metzger).  이것은 소아시아 지역의 문화적인 관습을  반영하는데   당시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사실상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배웠던 것입니다(유상섭).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10).  여기서 아시아란 에베소 외에 북쪽 비두니아동쪽 갈라디아남쪽은 루기아를 경계로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의 서부 해안을 따라 펼쳐진 아시아 지방을 말합니다(J.A. Harrill).  당시 에베소의 인구만도 25 정도에 육박했는데  인근 지역의 인구를 모두 합치면 숫자는 크게 상회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란노 강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가를 시사합니다(유상섭).

 

#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것은 이러한 말씀의 흥왕 지역적으로 말씀이 퍼져 숫자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이 일어나는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오히려 공격적인 자세로 바울의 복음을 사람들 앞에서 비방하였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누가복음 6 6-11절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7).

 

-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에는 긍정적인 말씀의 열매도 있지만 동시에 사탄의 부정적인 열매도 충분히 있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n  사도행전 말씀으로 말한다면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2:37)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았던 3,000명의 사람들(38) 있었던 반면에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듣고는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뿐만 아니라(7:54) 돌로 그를  죽인 사람들(58) 있었습니다.

 

#  그러므로 말씀 사역에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죄를 회개하는 사람도 있을  있지만 반대로 분노하며 불평하면서 말씀 선포자를 혀로 살인하는 사람들(참고요일3:15) 충분히 있을  있습니다.

 

(ii)                    저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감당하신 누가복음 6 6 말씀을 묵상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현대인의 성경)] 만나게 되신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       저는  만남이 결코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수님과  오른손이 마른(오그라든사람이  회당에서  시간에 만났다고 믿습니다.

 

-            제가 2025 10 7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주시는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목아래  말씀 묵상 글의  부분만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주어지는 만남들을 보면 우리의 관점으로   좋은 만남들이 있는가 하면 좋지 않은 만남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만남들이란 우리를 상쾌하게 하고 즐겁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지 않은 만남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며 괴롭게   아니라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아 보이는 만남입니다.  그러면  모든 만남들을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삶의 여정의 만남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만남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만남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만남들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만남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뿐이지 우리의 만남들은 하나님의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의 만남에 충실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펼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b)    둘째로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구실”(현대인의 성경)]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지켜보고”(현대인의 성경)](6:7)/”주시하고”(3:2) 있다가(6:7)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12:10).

 

(i)                      저는  말씀을 묵상할  얼마  제가  글이 생각났습니다: “Love is not looking for faults in others; rather, it is seeking to cover them”(사랑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것을 덮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이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제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결점이나 잘못이나 자기들이   죄를 찾아 고발할 증거(구실) 찾고 있었기 때문인  같습니다.

 

·       실제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지켜보고”(현대인의 성경)](6:7)/”주시하고”(3:2)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시하고”(3:2) 헬라어 단어 “παρετήρουν”(파레테룬) 지켜보다”, “주시하다 뜻인 파라테레오”(παρατηρέω)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눈으로 면밀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14:1; 20:20)(호크마).

 

-             단어는 불의한 마음이 어떻게 교훈을 얻기보다는 정죄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는지 보여주는데( 20:20;  9:24)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박해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종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법적정치적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습니다(인터넷).

 

n  안식일 치유에 관한  가지 맥락( 6:7;  3:2;  14:1) 모두 은혜와 완악한 신앙심 사이의 긴장감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동안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율법을 무기로 삼습니다.  따라서 주시하다”(3:2) 뜻인 파라테레오”(παρατηρέω) 메시아가 그들 앞에  계심을 놓친 마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됩니다(인터넷).

 

#    갈라디아서 4 10절에서 파라테레오”(παρατηρέω) 사람을 감시하는 것에서 꼼꼼한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이제 달력의 규정에 복종하여 "약하고 허무한 원리로 돌아가는"(4:9) 것을 슬퍼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감시를 묘사했던 바로  단어가 이제 갈라디아인들 스스로가 스스로 부과한 속박을 묘사하며율법주의가 영적인 올무임을 폭로합니다(인터넷).

 

(ii)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3:2) 있다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2:10)하고 물었는데  의도는 자신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침으로써 고의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마른 자를 외면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지난번 가르침을 스스로 파기할 수도 없게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실로 저들은 예수님을 위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자로 비난을 피할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려  같은 교묘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호크마).

 

(c)    셋째로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하시자 그가 앞으로 나왔습니다(6:8; 참고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어느 것이 옳으냐하고 물으셨는데(6:9)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3:4).

 

(i)                      저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을 행하는 이나 생명을 구하는  묵상할  마태복음 12 11-12 말씀을  연관시켰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을 행하는 이나 생명을 구하는  만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에 어떤 사람이   마리를 가졌는데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 빠졌다면  끌어올리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면양보다 더욱 귀한 사람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이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인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0)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하고 답변(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요 그것은 옳은 일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낼지언정  마른 사람에게 자비(mercy) 베풀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예수님을 송사 하려는 것의 도구로 삼았을 뿐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보다 당연한 처사(conduct)임을 주장하신 것입니다(호크마).

 

n  예수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 베푸는 일과 연관됩니다.   말씀은 제자들의 행위를 무죄한 것으로 선언하신 7절의 말씀을 연상(association)시킵니다.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나  마른 사람을 고칠 예수님 자신의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자신에 의해 선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호크마).

 

(d)    넷째로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3:5)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하고 말씀하셨을  그가 내밀매  손이 다른 (왼손) 같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12:13, 현대인의 성경).

 

(i)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셨다(3:5) 말씀하고 있는데 완악함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고그러한 마음 상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수고 없게 됩니다(호크마).

 

·       예수님께서는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탄식하셨는데 여기서 탄식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συλλυπούμενος” 복합 동사로서 예수의 슬픔이 단순히 동정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분께서 바라보시는 사람들과 “함께” 또는 “곁에서” 경험하시는 슬픔임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직접적인 슬픔의 대상이지만그들의 고통회중의 혼란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눈먼 상태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모여듭니다.  이는 이사야 53 3절에 묘사된 “고난의 사람슬픔을 아는 자”라는 종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데그는 죄뿐 아니라 백성의 감정적인 무게까지도 짊어지십니다(인터넷).

 

-            탄식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노하셨는데  노하심은 완악한 마음을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의로운 분노였습니다(인터넷).

 

n  마가는 예수님이 탄식하시고 또한 노하셨다고 기록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굳어진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서도 그들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거룩한 사랑이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참고인터넷).

 

(ii)                    여기서 예수님께서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고 말씀하셨을  그가 내밀매  손이 다른 (왼손) 같이 완전히 회복되었다(12:13, 현대인의 성경) 것은 예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오른손 마른 사람의 마른 오른손을 치유하시사 왼손과 같이 완전히 회복시키셨습니다.

 

·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능력(예를 들어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래도 즉시 존재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창세기 1 3절의 말씀처럼) 동일한 능력을 지닌 것입니다(1:1 - 3)(호크마).

 

-            저는  말씀을 묵상할  2012 10 26 예수님께서도 놀랍게 여기시며 칭찬하신 믿음이란 제목 아래 누가복음 7 9 말씀을 묵상한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부분만 나누고 싶습니다:

 

n  “셋째로예수님께서도 놀랍게 여기시며 칭찬하신 믿음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한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7 7 하반절을 보십시오“…  말씀만 하사  하인을 낫게 하소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자기의 종을 사랑하여  죽어가는 종의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유대 장로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벗들까지 보낸 로마 백부장은  벗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말씀만 하사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구하였습니다.   이유는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 하인이 죽을 병에서 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믿음이 아닙니까?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한  백부장의 믿음이 놀랍지 않습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놀라운 믿음이 아닐  없습니다.  주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만져 주신던지 안수해 주시던지 해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시길 원하였을텐데  로마 백부장은 주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의 종이 죽을 병에서 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한 믿음을 소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       오른손 마른 사람의 오른손이 회복되어 성하였다’(12:13)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온전케(육체와 영혼 모두를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신 것입니다(호크마).

 

-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밀이삭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증하셨는데 말입니다(6:1-5)(호크마).

 

(e)    마지막 다섯째로예수님께서 오른손 마른 사람의 오른손을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완전히 회복시키셨을  바리새인들은 화가 잔뜩 나서(6:11, 현대인의 성경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서로 의논하였습니다(3:6; 참고12:14; 6:11).

 

(i)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화가 잔뜩 났다(6:11, 현대인의 성경) 말씀하고 있는데  의미는 모든 감각과 이성을 잃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이성을 잃고 덤비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호크마).

 

·       그래서 그들은 회당에서 나가서[나간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 위반자로 규정하였기에 예수님과 동일한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였기 때문임(호크마)]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악을 꾀하여 헤롯당과 함께 연합하여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것입니다(참고호크마).

 

-            그들은 예수를 안식일 파기자로 단죄하고( 31:14) '어떻게 죽일꼬'하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 함께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생겨나는 필연적인 발상입니다(호크마).

 

n  저는 이것을 묵상할  누가복음 23 12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처럼 지냈으나 바로   서로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원수처럼 지냈던 헤롯[예수님이 태어나셨을  헤롯 왕은 아들인  헤롯은 이스라엘 지역의 왕이었음(인터넷)] 빌라도[로마 황제로부터 파송 받은 총독(인터넷)] 예수님에 관하여서는 서로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시편 2 2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원수로 지냈던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다정한 친구가 되어서 기름 부음 받으신 예수님을 대적했던 것처럼[그들은 예수님이 무죄인  알았지만 헤롯은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고(23:11, 현대인의 성경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번이나 말해 놓고서도(14, 15, 22결국 군중들이  소리로 외쳐대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끈질기게 요구하자 마침내 그들의 소리가 이기므로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하게 하였습니다(23-25현대인의 성경).